리틀보이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허선혜
194호
2021.01.21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
여왕개미
바퀴벌레
나비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
여왕개미
바퀴벌레
나비
1장_김민들레씨의 꿈
잠들어있는 김민들레씨.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마치 이명처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찢어질듯한 목소리.
“리틀보이!” “리틀보이!” “리틀보이!”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김민들레씨. 가쁜 숨을 고른다. 액체가 머리 위로 떨어진다.
마치 이명처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찢어질듯한 목소리.
“리틀보이!” “리틀보이!” “리틀보이!”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김민들레씨. 가쁜 숨을 고른다. 액체가 머리 위로 떨어진다.
- 김민들레씨
- 비가 오나?
손을 내어보고 떨어진 것의 정체를 보고 또 화들짝 놀랐다.
- 김민들레씨
- 어? 검은비?
조민들레씨, 등장한다.
- 조민들레씨
- 민들레! 나야.
- 김민들레씨
- 이거봐. 검은비야!
- 조민들레씨
- 검은비 아니야.
- 김민들레씨
- 그럼 뭐야?
- 조민들레씨
- 그... 물감... 물감이더라고.
- 김민들레씨
- 물감? 아이, 놀랐네.
- 조민들레씨
- 나도 놀라가지고 너처럼 우아악!!! 하고 일어났는데 알아보니까 그 거인들이 가지고 놀다 버린 물감이더라고. 자꾸 그렇게 우리 사는 흙에다 버려. 흙 귀한 줄 모르고.
- 김민들레씨
- 아이고, 다행이다. 나는 또 검은비가 내리는 줄 알고. 그, 뒤에 들쳐업고 온 건 뭐야?
- 조민들레씨
- 실은 얘를 좀 보여주려고 왔어.
조민들레씨, 업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다. 지렁이다. 몸 색깔이 온통 흰색이다.
- 김민들레씨
- 이게 뭐야?
- 김민들레씨
- 박지렁이 3세.
- 김민들레씨
- 잉? 아니. 저번 주만 해도 말짱했던 애가 왜 이래?
- 조민들레씨
- 그러게 말이야. 이 땅에 정말 저주가 내린 건지. 죽거나 이상해지거나 이상하게 태어나거나.
- 김민들레씨
-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 조민들레씨
- 있지. 한 번도 이렇게 말해본 적이 없지만 나는 솔직히 좀 무서워. 민들레씨도 우리 둘 뿐이 안 남고. 좀, 이상하지 않아?
- 김민들레씨
- 어떤 게?
- 조민들레씨
- 아, 그때 히마에 다녀온 민들레씨들 씨들이 다 이상하게 발아했잖아.
- 김민들레씨
- 그건 그때 가져온 흙하고 안 맞나보다 했잖아.
- 조민들레씨
- 그게 다일까?
- 김민들레씨
- 그럼 뭐야?
- 조민들레씨
- 아무래도 이상해. 여왕개미님을 한 번 더 알현해봐야겠어.
- 김민들레씨
- 또? 우리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잖아.
- 조민들레씨
- 봐. (지렁이를 가리키며) 얘는 3세야. 3세. 3세가 이렇게 되어버렸어. 이 말은 뭐겠어?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는 거잖아. 4세, 5세, 6세, 7세... 이럼 안되잖아.
- 김민들레씨
- 안되지. 아주 심각한 문제야.
- 조민들레씨
- 가봐야지. 뭐라도 해봐야지.
- 김민들레씨
- 그래. 가보자고.
2장 여왕개미의 궁정
여왕개미, 일개미들에게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다.
- 여왕개미
- 그래, 훔쳐온 쌀이 몇 알이나 되는지 장부정리를 좀 부탁해요. 뭐? 마흔여섯째 새끼가 이유식을 거부해? 저기, 20층 오른쪽에서 세 번째 굴에 사는 개미한테 맡겨보세요. 이유식은 그분이 제일 잘해. 저기, 산 너머 굴 공사는 어떻게 되어가나? 천천히 차근차근 빌드업 해주세요. 우리 식구들이 전부 다 이동하려면 그냥 잘 지어서는 안 되지. 수고가 많아요.
김민들레씨와 조민들레씨, 쭈뼛거리며 여왕개미의 궁정으로 들어온다.
- 여왕개미
- 뭐야. 앞에서 안 막고 뭐했어?
- 조민들레씨
- 여왕개미님. 정말 섭섭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저희를 박대하실 이유가 있으십니까?
- 여왕개미
- 또 무슨 일입니까?
- 김민들레씨
- 저, 그게... (지렁이를 보여주며) 이 아이를 좀 보세요. 색깔이 이렇게 변했어요.
- 여왕개미
- 그게 뭐죠?
- 김민들레씨
- 지렁이에요. 분명 지렁이인데, 이렇게 하얗게...
- 여왕개미
- 여긴 정말 안 되겠네. 이주를 더 서둘러야겠다.
- 조민들레씨
- 이주를 가십니까?
- 여왕개미
- 이 땅에 이렇게 저주가 내렸는데 더 이상 살 수가 있겠어요?
- 조민들레씨
- 어디로, 가십니까?
- 여왕개미
- 알려줄 수 없어요.
- 김민들레씨
- 알려줄 수 없다니요? 우리는 한 공동체잖아요.
- 여왕개미
- 예전에는 그랬죠. 온 땅이 다 황폐해져서 먼지만 흩날리던 때는 모두가 한 마음이었으니까.
- 조민들레씨
- 아니, 지금은 아닌 이유가 뭡니까?
- 여왕개미
- 두 분을 비롯한 많은 민들레씨 분들이 히마로 좋은 흙을 가지러 다녀오시고 우리 삶은 좀 더 나아졌는데 분명 좀 더 나아진 것 같았는데... 왜 자꾸 더 안 좋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 김민들레씨
- 그때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바람만 불면 날아가는 이 몸뚱이로 그 흙들을 이고 지고 돌아왔어요.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서요.
- 여왕개미
-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더 나았을 수도...
- 조민들레씨
-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 여왕개미
- 글쎄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들을 해왔어요. 이 땅이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당신들이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하고...
- 김민들레씨
- 어떻게 그런 말씀을...
- 여왕개미
-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 김민들레씨
- 여왕님!!
- 조민들레씨
- (김민들레씨를 말리며) 이 땅을 살리려고 했다는 건 꼭 기억해주세요. 가보겠습니다.
조민들레씨, 김민들레씨를 데리고 돌아간다.
3장 리틀보이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다가 손을 뿌리친다.
- 김민들레씨
- 놔!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 조민들레씨
- 그러게 말이야. 비참하기 짝이 없네. 우리도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나야하나.
- 김민들레씨
- 그것 밖에 답이 없나. 우리가 그때 의기투합해서 다같이 히마로 날아갔던 게 뭐야. 우리 땅에서 잘 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냐.
- 조민들레씨
- 그건 그랬지만. 지금은 사정이 말이 아니잖아.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민들레씨들, 간신히 몸을 지탱한다.
- 김민들레씨
- 괜찮아?
- 조민들레씨
- 난 괜찮아. 너도?
- 김민들레씨
- 버틸 만해.
- 조민들레씨
- 꼭 그때 같네. 바람 부는 방향이나 속도나.
- 김민들레씨
- 요즘 내 꿈에 리틀보이가 나와. 리틀보이. 기억나?
- 조민들레씨
- 그럼. 기억나지. 그, 갑자기 번쩍!! 하기 전에 다들 소리쳤던 거 아냐. 리틀보이!! 리틀보이!!
- 김민들레씨
- 그래. 리틀보이!! 리틀보이가 우리의 구세주일지도 몰라!
- 조민들레씨
- 리틀보이가?
- 김민들레씨
- 왜들 그렇게 리틀보이를 찾았겠어! 힘을 가진 존재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 조민들레씨
- 리틀보이가 무슨 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 김민들레씨
- 신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에너지를 가진 외침들이었다고! 리틀보이는 적어도 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 거야.
- 조민들레씨
- 그렇다고 하기엔 목소리들이 좀 원망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 김민들레씨
- 아니면. 방법이 있어? 지금 내가 떠올린 것 말고 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 조민들레씨
- 글쎄...
- 김민들레씨
- 밑져야 본전 아니야. 정말 어쩌면, 우리를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몰라. 가보자.
- 조민들레씨
- 어딜가!
- 김민들레씨
- 이렇게 바람도 불고. 이건 분명히! 리틀보이를 찾아가라는 신의 계시야.
- 조민들레씨
- 다시 히마로 가자고?
- 김민들레씨
- 다녀와보자고! 뭔가 촉이 와. 계속 꿈에 나온 것도 오늘을 위해서였던 거야. (조민들레씨의 손을 잡으며) 가자!
- 조민들레씨
- 어어, 잠깐만!!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를 붙잡고 날아오른다.
4장 히마
히마를 걷는 민들레씨들.
- 김민들레씨
- 여긴 왜 이렇게 된 거야? 이렇게 아무도 없다니.
- 조민들레씨
- 우리가 떠날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 김민들레씨
- 다들 떠났나봐.
- 조민들레씨
- 왜 떠났지? 유령마을 같아.
- 김민들레씨
- 엇. 이거 봐.
- 조민들레씨
- 뭐야?
- 김민들레씨
- 이 벽에 그림 좀 봐. 벌 가족의 다정한 모습이야. 이거 분명 우리 있을 때 빛이 반짝! 했을 때 남은 걸 거야. 벽에 이렇게 예쁘게 남다니. 그래, 리틀보이님께서 남겨주셨나보다. 이렇게들 살라고. 그거 알지? 거인들이 커다란 돌 같은 거에 눈 대고 튀어나온 거 툭 누르면 번쩍! 하잖아. 그리고 보고 있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 찍혀 나온다고. 그 눈부신 장면을 기억하려고! 리틀보이님이 그 커다란 돌로 이 다정한 가족을 여기에 찍었나봐. 크. 멋지다.
바퀴벌레,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민들레씨들 앞까지 다가온다. 민들레씨들과 바퀴벌레 마주친다. 바퀴벌레, 샤샤샥 도망간다.
- 조민들레씨
- 어어! 잠시만요! 잠시만 저희 얘기 좀 들어주세요.
- 바퀴벌레
- 저는 오염되지 않았어요! 잡아가지 마세요!
- 조민들레씨
- 네?
- 김민들레씨
- 그게 아니고, 저희는 저기 바다 너머 함청에서 왔는데요.
- 바퀴벌레
- 함청? 그, 우리 마을 와서 흙을 퍼갔던 자들이 사는 곳 아냐?
- 조민들레씨
- 네. 저희가 그때 흙 퍼갔던 자들이에요.
- 바퀴벌레
- 어휴. 난 또 몇 달에 한 번씩 오는 소탕꾼들인 줄 알았네.
- 김민들레씨
- 소탕꾼들이요?
- 바퀴벌레
- 그 이후로 우리 마을에 한 번씩 와서 싹 잡아 간다고.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직후에는 어휴, 말도 못해. 오염이 됐건, 안 됐건 다 잡아갔어. 잡아가서는... 어휴... 말도 못해.
- 조민들레씨
- 오염이 됐어요? 이곳이?
- 바퀴벌레
- 오염됐지, 그럼. 내가 나 살자고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나도 오염이 됐겠지. 응, 됐고말고. 사방천지가 다 오염이 됐는데 말이야.
- 김민들레씨
- 유감이네요.
- 바퀴벌레
- 유감은 무슨.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다시 온 거야?
- 조민들레씨
- 저, 리틀보이님 아십니까?
- 바퀴벌레
- 리틀보이?
- 김민들레씨
- 네, 리틀보이님을 찾으러 왔어요!
- 바퀴벌레
- 설마, 다시 오는 거야? 리틀보이가?? 여기에 또??
- 조민들레씨
- 그런 게 아니고. 저희는 그냥 단순히 찾아보고 싶어서...
- 바퀴벌레
- 안 돼. 다시는 오면 안 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는 오염되지 않았어요!! 살려주세요!!
바퀴벌레, 황급히 샤샤샥 도망간다.
- 김민들레씨
- 저기요!!! 왜 이렇게 놀라는 거야?
- 조민들레씨
- 세상에. 이 땅이 다 오염이 됐다니. 그래서 아무도 없구나.
- 김민들레씨
- 참. 정말 너무하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멀쩡한 자들을...
- 조민들레씨
- 그런데 말이야.
- 김민들레씨
- 우린 참 다행이었네. 싹 잡아가기 전에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말이야.
- 조민들레씨
- 그런데 혹시...
- 김민들레씨
-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 조민들레씨
- 아니겠지.
- 김민들레씨
- 말해봐.
- 조민들레씨
- 혹시나, 정말 혹시나...
- 김민들레씨
- 그래, 혹시나!
- 조민들레씨
- 우리가 이미 오염된 흙을 퍼나른 건 아니겠지.
- 김민들레씨
- ... 에이, 우리가 무슨 오염된 흙을 퍼날라. 너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우리 마을의 그 푸석푸석하고 먼지바람만 날리던 흙하고 여기의 곱고 고운 향긋한 향이 올라오는 흙하고 두 눈으로만 봐도 차원이 달랐는데! 오염은 무슨!
- 조민들레씨
- 그렇지? 달랐지?
- 김민들레씨
- ... 그럼, 달랐지.
- 조민들레씨
- 괜한 소리를 했네, 내가. 다시 길을 떠나보자고. 여긴 먹을 것도 없고. 최대한 빨리 리틀보이님을 찾아야겠어.
- 김민들레씨
- 그래야지.
5장 걸어보는 민들레씨들
계속 걷는 민들레씨들. 조민들레씨, 힘들어보인다. 걷는 것조차도 힘겨워보이는 상태.
- 김민들레씨
-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여보세요!
조민들레씨, 결국 걸음을 멈춘다.
- 김민들레씨
- 조금 쉬었다갈까?
- 조민들레씨
- 그러자.
- 김민들레씨
- 정말 아무도 없구나.
- 조민들레씨
- 여긴 정말 이상해.
- 김민들레씨
- 그래. 이상하지. 이렇게나 아무도 없다는 것이...
- 조민들레씨
- 내 몸이 이상해. 너무 힘들어. 금방이라도,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 김민들레씨
-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조금만 쉬었다 가자. 그럼 괜찮아질 거야.
- 조민들레씨
- 아무 것도 없는 게, 너무 무서워.
- 김민들레씨
- 왜 그래.
- 조민들레씨
- 아무 것도 없잖아. 너무 무섭다고!
- 김민들레씨
- 나도 무서워! 그러니까 무섭다는 소리 좀 그만해!
- 조민들레씨
- 내 몸도, 내 몸도 오염이 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 김민들레씨
- 아니, 가만히 있는데 왜 오염이 되겠어. 흙을 퍼먹기를 했어, 얼굴에 바르기를 했어? 기분 탓이라고.
- 조민들레씨
-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그냥, 달라. 몸의 상태가 너무 달라.
- 김민들레씨
- 나도 썩 좋지는 않은데. 그건 뭐, 이런 황폐해진 곳에 있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어? 기분도 울적해지고.
조민들레씨, 드러눕는다.
- 김민들레씨
- 그럼 여기 좀 누워있어. 내가 저기, 저기 언덕까지만 한 번 다녀와볼게. 걷기도 많이 걸었고. 저기까지 갔는데도 없으면 그냥, 돌아가자고. 알겠지?
- 조민들레씨
- 빨리 다녀와. 나 무서워.
- 김민들레씨
- 알았어.
6장 나비와의 만남
걷는 김민들레씨, 힘들어보인다.
- 김민들레씨
- 뭔가가 다르긴 한 것 같네. 온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프고... 리틀보이님. 제발 빨리 나타나주세요. 저희 이러다 죽겠습니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비틀대며 추락하려한다.
- 김민들레씨
- 어? 저기. 안녕하세요!
- 나비
- 살려주세요.
나비, 한쪽 날개가 뻥뻥 뚫려 있다. 나비, 쓰러진다. 김민들레씨, 쓰러지는 나비를 안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 김민들레씨
- 괜찮으세요?
- 나비
- 감사합니다.
- 김민들레씨
- 날개가...
- 나비
- 그러게요. 어느새 보니...
- 김민들레씨
- 어디서 사고를 당하신 건가요?
- 나비
- 아니요. 그냥 살다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어디 나만 그런가요. 다들 이렇게 되다 죽었는걸.
- 김민들레씨
- 저희 마을도 똑같아요. 머리를 두 개 가지고 태어나고 금방 죽고 갑자기 몸이 썩고 난리도 아니에요.
- 나비
- 나마 출신이신가?
- 김민들레씨
- 아니요. 함청 출신이에요.
- 나비
- 함청? 함청이라하면... 메마른 땅을 살리려고 온 일꾼들의 고향이 아닌가.
- 김민들레씨
-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 나비
- 다들 불쌍한 사람들이지. 잘해보려고 온 거였는데.
- 김민들레씨
- 아니에요. 여기 고운 흙으로 잘 지냈는데요, 뭐.
- 나비
- 고운 흙? (헛웃음) 그런 농담은 안 치는 게 좋겠어요.
- 김민들레씨
- 불편하게 해드렸으면 죄송해요.
- 나비
- 뭘. 그나저나 여긴 또 웬일로? 이렇게 죽어버린 곳을...
- 김민들레씨
- 리틀보이님을 찾으러왔어요.
- 나비
- 리틀보이를?
- 김민들레씨
- 네. 사실, 저희 마을이 여기처럼 황폐해졌는데 아직 생명체들이 살아요. 평생을 그곳에서 산 사람들인데 어떻게든 땅을 다시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 나비
- 그런데, 리틀보이를 왜 찾아요?
- 김민들레씨
- 자꾸 제 꿈에서 리틀보이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마치, 그분을 불러야만할 것처럼요. 그분의 힘이 필요한 것처럼. 저희의 구세주는 아닐까 하고요. 리틀보이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가요?
- 나비
- 구세주? 당신네들은 그러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네요.
- 김민들레씨
- 무슨 일이 있었나요?
- 나비
- 번쩍! 당신도 봤을 거 아니에요.
- 김민들레씨
- 네 맞아요. 번쩍!! 리틀보이님이 소중한 시간을 찍어낸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 나비
- 소중한 시간?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리틀보이가 그 빛으로 앗아간 생명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그 빛은 죽음의 빛이었어요. 리틀보이는 구세주가 아니라 악마였다고!
- 김민들레씨
- 악마...요?
- 나비
- 그래요. 아카라는 곳의 못된 지도자가 리틀보이를 만들었다죠. 이 세상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리틀보이는 더러운 야망이 담긴 더러운 폭탄이었어. 그때 내렸던 검은비만 생각하면 난 아직도 온몸이 벌벌 떨려요.
- 김민들레씨
- 검은비...
- 나비
- 검은비는 리틀보이가 떨어지면서 만들어낸 회색 버섯 모양의 구름이 만들어낸 겁니다. 뚝뚝... 뚝뚝... 그땐 우리도 그게 뭔지 전혀 몰랐어요. 그 비를 맞고서 가족을 찾는다고. 살림살이를 지키겠다고... 그때 아무도 말을 안해줬어요. 그게 뭔지...
- 김민들레씨
- 검은비를... 맞으면 안되는 거였나요?
- 나비
- 혹시... 검은비를 맞은 흙을 퍼나른 겁니까?
김민들레씨, 할 말을 잃는다.
- 나비
- 쯧쯧쯧. 나쁜 놈들.
- 김민들레씨
- 그럼 제가... 제가 가져온 흙이... 저희 마을을 그렇게 만들게 된 겁니까?
- 나비
- 그 비를 잔뜩 맞으면서 나도 가족을 찾겠다고 날아다녔는데, 내가 결국 본 건... 벽에 남은 어린 벌들의 그림자였죠. 그냥, 뭣도 모르고 열심히 꿀을 나르던... 벌들의 모습이 그렇게 남아있더라고. 아직도 생각이 나요.
- 김민들레씨
- 그럼 그 그림자가...
- 나비
- 세상 참 무심하지. 남은 자들도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고...
- 김민들레씨
- 그 흙들이...
- 나비
- 남은 자들도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고...
나비, 숨을 거둔다. 김민들레씨, 죽은 나비 옆에서 한참을 운다.
7장 민들레씨들의 결정
울고 있는 김민들레씨 옆으로 조민들레씨가 앉는다.
김민들레씨가 조민들레씨가 있는 곳으로 와 리틀보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한지도 꽤 지났다. 둘은 기운이 하나도 없다.
김민들레씨가 조민들레씨가 있는 곳으로 와 리틀보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한지도 꽤 지났다. 둘은 기운이 하나도 없다.
- 조민들레씨
- 나는 돌아갈래.
- 김민들레씨
- 어딜가?
- 조민들레씨
- 그래. 우리가 어딜가? 이미 오염된 몸으로.
- 김민들레씨
-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지.
- 조민들레씨
- 가서 뭐라도 해봐야지.
- 김민들레씨
- 뭐라도 해보려고 여기 온 거잖아.
- 조민들레씨
- 나는 그래도 갈래. 죽어도 나는 내 고향에서 죽어.
- 김민들레씨
- 나 때문이라니. 그게 다, 나 때문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 조민들레씨
- 아무도 몰랐잖아, 그때는. 그렇게 해놓고도 아카에 사는 자들은 아무 말도 없네.
- 김민들레씨
- 왜 아무 말도 안할까. 바다가 오염이 됐다면 온 세상이 다 오염이 됐을 텐데. 왜 다들 아무 말이 없을까.
- 조민들레씨
- 보이면 다들 알텐데. 보이면... 그러니까... 보이지 않아서 그래.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무섭지가 않은 거야.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무서워.
- 김민들레씨
- 나는... 책임지고 싶어.
- 조민들레씨
- 뭘 책임져?
- 김민들레씨
- 내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내가 책임지고... 좋은 흙을 구해오고 싶어.
- 조민들레씨
- 온 세상이 다 오염됐을 거라며.
- 김민들레씨
- 아니. 그렇지 않은 데가 분명히 있을 거야. 아주 깨끗하고 좋은 흙을 찾아와서 우리 마을을 꼭 다시 깨끗하게 만들 거야.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 조민들레씨
-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 김민들레씨
- 애쓰는 거 아니야.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야. 근데 부탁 하나만 할게.
- 조민들레씨
- 무슨 부탁?
- 김민들레씨
- 가서, 솔직하게 이야기 해. 사실을. 전부 다.
- 조민들레씨
- (김민들레씨를 바라본다)
바람이 불어온다.
- 김민들레씨
- 바람 분다. 어서 돌아가.
- 조민들레씨
- 정말 괜찮아?
- 김민들레씨
- 응. 걱정 마. 금방, 정말 금방 돌아올게.
- 조민들레씨
- 빨리 와야 해. 나 무서워.
- 김민들레씨
- 그래! 어서 가.
조민들레씨,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가 떠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가 떠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8장 김민들레씨의 끝
걷는 김민들레씨. 걷다가 그림자가 새겨진 벽에 도착한다.
- 김민들레씨
- 오래 걸었다. 이렇게 오래 걸어본 민들레씨도 세상에 없을 거야.
흙을 파기 시작하는 김민들레씨.
- 김민들레씨
- 지금쯤이면 도착했을까? 도착해서 다 이야기하고 있을까? 민들레씨를 그래도 받아들여줄까? 같이 해결해보려고 할까? 높은 자들은 이야기를 들어줄까? 보이지 않아도... 문제라고 생각해줄까?
파낸 흙 안으로 들어가는 김민들레씨.
- 김민들레씨
- 일부러 그랬지만. 나의 삶이 더 중요했기에... 나를 선택한 것이었지만... 참 다행이다. 씨를 발아시키지 않아서. 그건 참 다행이다.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걸 방지하려고 내가 여기로 왔던 거야. 잘 버텨냈었네, 솜털들아. 너희는 아직 내 곁에 있지. 너희 덕분에 따뜻하다. 조금 쉬자. 잘자.
끝.
*참고자료
<원자폭탄,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 김기진·전갑생, 선인
<탈핵학교>, 김정욱 외 11명, 반비
<원자폭탄,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 김기진·전갑생, 선인
<탈핵학교>, 김정욱 외 11명, 반비
- 허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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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입니다.
연결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창작살롱 나비꼬리에서 다양한 만남을 위한 기획/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qeqe03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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