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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보이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허선혜

194호

2021.01.21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2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
여왕개미
바퀴벌레
나비

1장_김민들레씨의 꿈
잠들어있는 김민들레씨.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마치 이명처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찢어질듯한 목소리.

“리틀보이!” “리틀보이!” “리틀보이!”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김민들레씨. 가쁜 숨을 고른다. 액체가 머리 위로 떨어진다.
김민들레씨
비가 오나?
손을 내어보고 떨어진 것의 정체를 보고 또 화들짝 놀랐다.
김민들레씨
어? 검은비?
조민들레씨, 등장한다.
조민들레씨
민들레! 나야.
김민들레씨
이거봐. 검은비야!
조민들레씨
검은비 아니야.
김민들레씨
그럼 뭐야?
조민들레씨
그... 물감... 물감이더라고.
김민들레씨
물감? 아이, 놀랐네.
조민들레씨
나도 놀라가지고 너처럼 우아악!!! 하고 일어났는데 알아보니까 그 거인들이 가지고 놀다 버린 물감이더라고. 자꾸 그렇게 우리 사는 흙에다 버려. 흙 귀한 줄 모르고.
김민들레씨
아이고, 다행이다. 나는 또 검은비가 내리는 줄 알고. 그, 뒤에 들쳐업고 온 건 뭐야?
조민들레씨
실은 얘를 좀 보여주려고 왔어.
조민들레씨, 업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다. 지렁이다. 몸 색깔이 온통 흰색이다.
김민들레씨
이게 뭐야?
김민들레씨
박지렁이 3세.
김민들레씨
잉? 아니. 저번 주만 해도 말짱했던 애가 왜 이래?
조민들레씨
그러게 말이야. 이 땅에 정말 저주가 내린 건지. 죽거나 이상해지거나 이상하게 태어나거나.
김민들레씨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조민들레씨
있지. 한 번도 이렇게 말해본 적이 없지만 나는 솔직히 좀 무서워. 민들레씨도 우리 둘 뿐이 안 남고. 좀, 이상하지 않아?
김민들레씨
어떤 게?
조민들레씨
아, 그때 히마에 다녀온 민들레씨들 씨들이 다 이상하게 발아했잖아.
김민들레씨
그건 그때 가져온 흙하고 안 맞나보다 했잖아.
조민들레씨
그게 다일까?
김민들레씨
그럼 뭐야?
조민들레씨
아무래도 이상해. 여왕개미님을 한 번 더 알현해봐야겠어.
김민들레씨
또? 우리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잖아.
조민들레씨
봐. (지렁이를 가리키며) 얘는 3세야. 3세. 3세가 이렇게 되어버렸어. 이 말은 뭐겠어?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는 거잖아. 4세, 5세, 6세, 7세... 이럼 안되잖아.
김민들레씨
안되지. 아주 심각한 문제야.
조민들레씨
가봐야지. 뭐라도 해봐야지.
김민들레씨
그래. 가보자고.

2장 여왕개미의 궁정
여왕개미, 일개미들에게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다.
여왕개미
그래, 훔쳐온 쌀이 몇 알이나 되는지 장부정리를 좀 부탁해요. 뭐? 마흔여섯째 새끼가 이유식을 거부해? 저기, 20층 오른쪽에서 세 번째 굴에 사는 개미한테 맡겨보세요. 이유식은 그분이 제일 잘해. 저기, 산 너머 굴 공사는 어떻게 되어가나? 천천히 차근차근 빌드업 해주세요. 우리 식구들이 전부 다 이동하려면 그냥 잘 지어서는 안 되지. 수고가 많아요.
김민들레씨와 조민들레씨, 쭈뼛거리며 여왕개미의 궁정으로 들어온다.
여왕개미
뭐야. 앞에서 안 막고 뭐했어?
조민들레씨
여왕개미님. 정말 섭섭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저희를 박대하실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왕개미
또 무슨 일입니까?
김민들레씨
저, 그게... (지렁이를 보여주며) 이 아이를 좀 보세요. 색깔이 이렇게 변했어요.
여왕개미
그게 뭐죠?
김민들레씨
지렁이에요. 분명 지렁이인데, 이렇게 하얗게...
여왕개미
여긴 정말 안 되겠네. 이주를 더 서둘러야겠다.
조민들레씨
이주를 가십니까?
여왕개미
이 땅에 이렇게 저주가 내렸는데 더 이상 살 수가 있겠어요?
조민들레씨
어디로, 가십니까?
여왕개미
알려줄 수 없어요.
김민들레씨
알려줄 수 없다니요? 우리는 한 공동체잖아요.
여왕개미
예전에는 그랬죠. 온 땅이 다 황폐해져서 먼지만 흩날리던 때는 모두가 한 마음이었으니까.
조민들레씨
아니, 지금은 아닌 이유가 뭡니까?
여왕개미
두 분을 비롯한 많은 민들레씨 분들이 히마로 좋은 흙을 가지러 다녀오시고 우리 삶은 좀 더 나아졌는데 분명 좀 더 나아진 것 같았는데... 왜 자꾸 더 안 좋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김민들레씨
그때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바람만 불면 날아가는 이 몸뚱이로 그 흙들을 이고 지고 돌아왔어요.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서요.
여왕개미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더 나았을 수도...
조민들레씨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여왕개미
글쎄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들을 해왔어요. 이 땅이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당신들이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하고...
김민들레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여왕개미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김민들레씨
여왕님!!
조민들레씨
(김민들레씨를 말리며) 이 땅을 살리려고 했다는 건 꼭 기억해주세요. 가보겠습니다.
조민들레씨, 김민들레씨를 데리고 돌아간다.

3장 리틀보이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다가 손을 뿌리친다.
김민들레씨
놔!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조민들레씨
그러게 말이야. 비참하기 짝이 없네. 우리도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나야하나.
김민들레씨
그것 밖에 답이 없나. 우리가 그때 의기투합해서 다같이 히마로 날아갔던 게 뭐야. 우리 땅에서 잘 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냐.
조민들레씨
그건 그랬지만. 지금은 사정이 말이 아니잖아.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민들레씨들, 간신히 몸을 지탱한다.
김민들레씨
괜찮아?
조민들레씨
난 괜찮아. 너도?
김민들레씨
버틸 만해.
조민들레씨
꼭 그때 같네. 바람 부는 방향이나 속도나.
김민들레씨
요즘 내 꿈에 리틀보이가 나와. 리틀보이. 기억나?
조민들레씨
그럼. 기억나지. 그, 갑자기 번쩍!! 하기 전에 다들 소리쳤던 거 아냐. 리틀보이!! 리틀보이!!
김민들레씨
그래. 리틀보이!! 리틀보이가 우리의 구세주일지도 몰라!
조민들레씨
리틀보이가?
김민들레씨
왜들 그렇게 리틀보이를 찾았겠어! 힘을 가진 존재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조민들레씨
리틀보이가 무슨 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김민들레씨
신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에너지를 가진 외침들이었다고! 리틀보이는 적어도 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 거야.
조민들레씨
그렇다고 하기엔 목소리들이 좀 원망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김민들레씨
아니면. 방법이 있어? 지금 내가 떠올린 것 말고 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조민들레씨
글쎄...
김민들레씨
밑져야 본전 아니야. 정말 어쩌면, 우리를 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몰라. 가보자.
조민들레씨
어딜가!
김민들레씨
이렇게 바람도 불고. 이건 분명히! 리틀보이를 찾아가라는 신의 계시야.
조민들레씨
다시 히마로 가자고?
김민들레씨
다녀와보자고! 뭔가 촉이 와. 계속 꿈에 나온 것도 오늘을 위해서였던 거야. (조민들레씨의 손을 잡으며) 가자!
조민들레씨
어어, 잠깐만!!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를 붙잡고 날아오른다.

4장 히마
히마를 걷는 민들레씨들.
김민들레씨
여긴 왜 이렇게 된 거야? 이렇게 아무도 없다니.
조민들레씨
우리가 떠날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김민들레씨
다들 떠났나봐.
조민들레씨
왜 떠났지? 유령마을 같아.
김민들레씨
엇. 이거 봐.
조민들레씨
뭐야?
김민들레씨
이 벽에 그림 좀 봐. 벌 가족의 다정한 모습이야. 이거 분명 우리 있을 때 빛이 반짝! 했을 때 남은 걸 거야. 벽에 이렇게 예쁘게 남다니. 그래, 리틀보이님께서 남겨주셨나보다. 이렇게들 살라고. 그거 알지? 거인들이 커다란 돌 같은 거에 눈 대고 튀어나온 거 툭 누르면 번쩍! 하잖아. 그리고 보고 있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 찍혀 나온다고. 그 눈부신 장면을 기억하려고! 리틀보이님이 그 커다란 돌로 이 다정한 가족을 여기에 찍었나봐. 크. 멋지다.
바퀴벌레,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민들레씨들 앞까지 다가온다. 민들레씨들과 바퀴벌레 마주친다. 바퀴벌레, 샤샤샥 도망간다.
조민들레씨
어어! 잠시만요! 잠시만 저희 얘기 좀 들어주세요.
바퀴벌레
저는 오염되지 않았어요! 잡아가지 마세요!
조민들레씨
네?
김민들레씨
그게 아니고, 저희는 저기 바다 너머 함청에서 왔는데요.
바퀴벌레
함청? 그, 우리 마을 와서 흙을 퍼갔던 자들이 사는 곳 아냐?
조민들레씨
네. 저희가 그때 흙 퍼갔던 자들이에요.
바퀴벌레
어휴. 난 또 몇 달에 한 번씩 오는 소탕꾼들인 줄 알았네.
김민들레씨
소탕꾼들이요?
바퀴벌레
그 이후로 우리 마을에 한 번씩 와서 싹 잡아 간다고.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직후에는 어휴, 말도 못해. 오염이 됐건, 안 됐건 다 잡아갔어. 잡아가서는... 어휴... 말도 못해.
조민들레씨
오염이 됐어요? 이곳이?
바퀴벌레
오염됐지, 그럼. 내가 나 살자고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나도 오염이 됐겠지. 응, 됐고말고. 사방천지가 다 오염이 됐는데 말이야.
김민들레씨
유감이네요.
바퀴벌레
유감은 무슨.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다시 온 거야?
조민들레씨
저, 리틀보이님 아십니까?
바퀴벌레
리틀보이?
김민들레씨
네, 리틀보이님을 찾으러 왔어요!
바퀴벌레
설마, 다시 오는 거야? 리틀보이가?? 여기에 또??
조민들레씨
그런 게 아니고. 저희는 그냥 단순히 찾아보고 싶어서...
바퀴벌레
안 돼. 다시는 오면 안 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는 오염되지 않았어요!! 살려주세요!!
바퀴벌레, 황급히 샤샤샥 도망간다.
김민들레씨
저기요!!! 왜 이렇게 놀라는 거야?
조민들레씨
세상에. 이 땅이 다 오염이 됐다니. 그래서 아무도 없구나.
김민들레씨
참. 정말 너무하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멀쩡한 자들을...
조민들레씨
그런데 말이야.
김민들레씨
우린 참 다행이었네. 싹 잡아가기 전에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말이야.
조민들레씨
그런데 혹시...
김민들레씨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조민들레씨
아니겠지.
김민들레씨
말해봐.
조민들레씨
혹시나, 정말 혹시나...
김민들레씨
그래, 혹시나!
조민들레씨
우리가 이미 오염된 흙을 퍼나른 건 아니겠지.
김민들레씨
... 에이, 우리가 무슨 오염된 흙을 퍼날라. 너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우리 마을의 그 푸석푸석하고 먼지바람만 날리던 흙하고 여기의 곱고 고운 향긋한 향이 올라오는 흙하고 두 눈으로만 봐도 차원이 달랐는데! 오염은 무슨!
조민들레씨
그렇지? 달랐지?
김민들레씨
... 그럼, 달랐지.
조민들레씨
괜한 소리를 했네, 내가. 다시 길을 떠나보자고. 여긴 먹을 것도 없고. 최대한 빨리 리틀보이님을 찾아야겠어.
김민들레씨
그래야지.

5장 걸어보는 민들레씨들
계속 걷는 민들레씨들. 조민들레씨, 힘들어보인다. 걷는 것조차도 힘겨워보이는 상태.
김민들레씨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여보세요!
조민들레씨, 결국 걸음을 멈춘다.
김민들레씨
조금 쉬었다갈까?
조민들레씨
그러자.
김민들레씨
정말 아무도 없구나.
조민들레씨
여긴 정말 이상해.
김민들레씨
그래. 이상하지. 이렇게나 아무도 없다는 것이...
조민들레씨
내 몸이 이상해. 너무 힘들어. 금방이라도,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김민들레씨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조금만 쉬었다 가자. 그럼 괜찮아질 거야.
조민들레씨
아무 것도 없는 게, 너무 무서워.
김민들레씨
왜 그래.
조민들레씨
아무 것도 없잖아. 너무 무섭다고!
김민들레씨
나도 무서워! 그러니까 무섭다는 소리 좀 그만해!
조민들레씨
내 몸도, 내 몸도 오염이 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김민들레씨
아니, 가만히 있는데 왜 오염이 되겠어. 흙을 퍼먹기를 했어, 얼굴에 바르기를 했어? 기분 탓이라고.
조민들레씨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그냥, 달라. 몸의 상태가 너무 달라.
김민들레씨
나도 썩 좋지는 않은데. 그건 뭐, 이런 황폐해진 곳에 있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어? 기분도 울적해지고.
조민들레씨, 드러눕는다.
김민들레씨
그럼 여기 좀 누워있어. 내가 저기, 저기 언덕까지만 한 번 다녀와볼게. 걷기도 많이 걸었고. 저기까지 갔는데도 없으면 그냥, 돌아가자고. 알겠지?
조민들레씨
빨리 다녀와. 나 무서워.
김민들레씨
알았어.

6장 나비와의 만남
걷는 김민들레씨, 힘들어보인다.
김민들레씨
뭔가가 다르긴 한 것 같네. 온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프고... 리틀보이님. 제발 빨리 나타나주세요. 저희 이러다 죽겠습니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비틀대며 추락하려한다.
김민들레씨
어? 저기. 안녕하세요!
나비
살려주세요.
나비, 한쪽 날개가 뻥뻥 뚫려 있다. 나비, 쓰러진다. 김민들레씨, 쓰러지는 나비를 안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김민들레씨
괜찮으세요?
나비
감사합니다.
김민들레씨
날개가...
나비
그러게요. 어느새 보니...
김민들레씨
어디서 사고를 당하신 건가요?
나비
아니요. 그냥 살다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어디 나만 그런가요. 다들 이렇게 되다 죽었는걸.
김민들레씨
저희 마을도 똑같아요. 머리를 두 개 가지고 태어나고 금방 죽고 갑자기 몸이 썩고 난리도 아니에요.
나비
나마 출신이신가?
김민들레씨
아니요. 함청 출신이에요.
나비
함청? 함청이라하면... 메마른 땅을 살리려고 온 일꾼들의 고향이 아닌가.
김민들레씨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나비
다들 불쌍한 사람들이지. 잘해보려고 온 거였는데.
김민들레씨
아니에요. 여기 고운 흙으로 잘 지냈는데요, 뭐.
나비
고운 흙? (헛웃음) 그런 농담은 안 치는 게 좋겠어요.
김민들레씨
불편하게 해드렸으면 죄송해요.
나비
뭘. 그나저나 여긴 또 웬일로? 이렇게 죽어버린 곳을...
김민들레씨
리틀보이님을 찾으러왔어요.
나비
리틀보이를?
김민들레씨
네. 사실, 저희 마을이 여기처럼 황폐해졌는데 아직 생명체들이 살아요. 평생을 그곳에서 산 사람들인데 어떻게든 땅을 다시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나비
그런데, 리틀보이를 왜 찾아요?
김민들레씨
자꾸 제 꿈에서 리틀보이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마치, 그분을 불러야만할 것처럼요. 그분의 힘이 필요한 것처럼. 저희의 구세주는 아닐까 하고요. 리틀보이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가요?
나비
구세주? 당신네들은 그러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네요.
김민들레씨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비
번쩍! 당신도 봤을 거 아니에요.
김민들레씨
네 맞아요. 번쩍!! 리틀보이님이 소중한 시간을 찍어낸 그거 말씀하시는 거죠?
나비
소중한 시간?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리틀보이가 그 빛으로 앗아간 생명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그 빛은 죽음의 빛이었어요. 리틀보이는 구세주가 아니라 악마였다고!
김민들레씨
악마...요?
나비
그래요. 아카라는 곳의 못된 지도자가 리틀보이를 만들었다죠. 이 세상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리틀보이는 더러운 야망이 담긴 더러운 폭탄이었어. 그때 내렸던 검은비만 생각하면 난 아직도 온몸이 벌벌 떨려요.
김민들레씨
검은비...
나비
검은비는 리틀보이가 떨어지면서 만들어낸 회색 버섯 모양의 구름이 만들어낸 겁니다. 뚝뚝... 뚝뚝... 그땐 우리도 그게 뭔지 전혀 몰랐어요. 그 비를 맞고서 가족을 찾는다고. 살림살이를 지키겠다고... 그때 아무도 말을 안해줬어요. 그게 뭔지...
김민들레씨
검은비를... 맞으면 안되는 거였나요?
나비
혹시... 검은비를 맞은 흙을 퍼나른 겁니까?
김민들레씨, 할 말을 잃는다.
나비
쯧쯧쯧. 나쁜 놈들.
김민들레씨
그럼 제가... 제가 가져온 흙이... 저희 마을을 그렇게 만들게 된 겁니까?
나비
그 비를 잔뜩 맞으면서 나도 가족을 찾겠다고 날아다녔는데, 내가 결국 본 건... 벽에 남은 어린 벌들의 그림자였죠. 그냥, 뭣도 모르고 열심히 꿀을 나르던... 벌들의 모습이 그렇게 남아있더라고. 아직도 생각이 나요.
김민들레씨
그럼 그 그림자가...
나비
세상 참 무심하지. 남은 자들도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고...
김민들레씨
그 흙들이...
나비
남은 자들도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고...
나비, 숨을 거둔다. 김민들레씨, 죽은 나비 옆에서 한참을 운다.

7장 민들레씨들의 결정
울고 있는 김민들레씨 옆으로 조민들레씨가 앉는다.
김민들레씨가 조민들레씨가 있는 곳으로 와 리틀보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한지도 꽤 지났다. 둘은 기운이 하나도 없다.
조민들레씨
나는 돌아갈래.
김민들레씨
어딜가?
조민들레씨
그래. 우리가 어딜가? 이미 오염된 몸으로.
김민들레씨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지.
조민들레씨
가서 뭐라도 해봐야지.
김민들레씨
뭐라도 해보려고 여기 온 거잖아.
조민들레씨
나는 그래도 갈래. 죽어도 나는 내 고향에서 죽어.
김민들레씨
나 때문이라니. 그게 다, 나 때문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조민들레씨
아무도 몰랐잖아, 그때는. 그렇게 해놓고도 아카에 사는 자들은 아무 말도 없네.
김민들레씨
왜 아무 말도 안할까. 바다가 오염이 됐다면 온 세상이 다 오염이 됐을 텐데. 왜 다들 아무 말이 없을까.
조민들레씨
보이면 다들 알텐데. 보이면... 그러니까... 보이지 않아서 그래.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무섭지가 않은 거야.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무서워.
김민들레씨
나는... 책임지고 싶어.
조민들레씨
뭘 책임져?
김민들레씨
내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내가 책임지고... 좋은 흙을 구해오고 싶어.
조민들레씨
온 세상이 다 오염됐을 거라며.
김민들레씨
아니. 그렇지 않은 데가 분명히 있을 거야. 아주 깨끗하고 좋은 흙을 찾아와서 우리 마을을 꼭 다시 깨끗하게 만들 거야.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조민들레씨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김민들레씨
애쓰는 거 아니야.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야. 근데 부탁 하나만 할게.
조민들레씨
무슨 부탁?
김민들레씨
가서, 솔직하게 이야기 해. 사실을. 전부 다.
조민들레씨
(김민들레씨를 바라본다)
바람이 불어온다.
김민들레씨
바람 분다. 어서 돌아가.
조민들레씨
정말 괜찮아?
김민들레씨
응. 걱정 마. 금방, 정말 금방 돌아올게.
조민들레씨
빨리 와야 해. 나 무서워.
김민들레씨
그래! 어서 가.
조민들레씨,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가 떠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8장 김민들레씨의 끝
걷는 김민들레씨. 걷다가 그림자가 새겨진 벽에 도착한다.
김민들레씨
오래 걸었다. 이렇게 오래 걸어본 민들레씨도 세상에 없을 거야.
흙을 파기 시작하는 김민들레씨.
김민들레씨
지금쯤이면 도착했을까? 도착해서 다 이야기하고 있을까? 민들레씨를 그래도 받아들여줄까? 같이 해결해보려고 할까? 높은 자들은 이야기를 들어줄까? 보이지 않아도... 문제라고 생각해줄까?
파낸 흙 안으로 들어가는 김민들레씨.
김민들레씨
일부러 그랬지만. 나의 삶이 더 중요했기에... 나를 선택한 것이었지만... 참 다행이다. 씨를 발아시키지 않아서. 그건 참 다행이다.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걸 방지하려고 내가 여기로 왔던 거야. 잘 버텨냈었네, 솜털들아. 너희는 아직 내 곁에 있지. 너희 덕분에 따뜻하다. 조금 쉬자. 잘자.
끝.
*참고자료
<원자폭탄,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 김기진·전갑생, 선인
<탈핵학교>, 김정욱 외 11명,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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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선혜

허선혜
극작가입니다.
연결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창작살롱 나비꼬리에서 다양한 만남을 위한 기획/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qeqe0321@naver.com
https://www.instagram.com/nabicor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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