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혜수와 올퓌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서동민

제196호

2021.03.11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5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혜수 60대, 여성
올퓌 외관상 20대, 남성

한밤중

폐허가 된 도심
조명이 켜진다. 무대 중앙에 붉은 태양열 오픈카가 주차되어 있다. 혜수 운전석에서 방독면을 쓴 채 잠을 청하고 있다. 올퓌 조수석에서 팔짱 낀 채 눈을 뜨고 있다. 작은 그르렁거리는 소리 들린다. 올퓌 혜수의 옆구리를 찌른다. 혜수 돌아눕는다.
혜수
전력 아껴. 내일 비실대지 말고.
올퓌
일어나.
혜수 눈을 떠 올퓌를 바라본다.
혜수
왜 그러는,
올퓌
쉿. 완전히 포위됐어.
혜수
그게 무슨,
다시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 들린다.
올퓌
들개 떼야. 적어도 일곱 마리.
혜수
포위, 했다고?
올퓌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혜수
어떻게 해야 되는데?
올퓌
아직 거리를 좁혀 오진 않고 있어. 이대로 자기보다 강한 상대라 판단하면 좋을 텐데.
혜수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올퓌
내 전력을 뽑아서 차를 돌려. 쟤들이 노리는 건 결국 인간의 살코기니까.
혜수
별, 말도 안 되는 소리.
올퓌
나 진지해. 다른 방법이 없어.
혜수
네가 차에서 내려서 저놈들을 유인하는 건?
올퓌
냄새는 못 속여. 외관이야 너희들과 같다지만 난 결국 금속이잖아.
혜수
인간과 다를 것 없는 좋은 이웃이라더니.
올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최악의 경우,
혜수
최악이 뭐?
올퓌
내가 방전된다고 그게 곧 죽음을 의미하진 않잖아. 그런데 넌 이대로 가면,
혜수
거의 방전된 몸으로 부득불 히치하이킹 한 건 너야. 그땐 그렇게나 필사적이더니,
올퓌
혜수야.
혜수
방전되면 기억을 잃는 게 싫다며.
컹컹 개 짓는 소리.
올퓌
쟤들을 흥분시켰잖아.
혜수
잠깐만. 그렇게 더 해봐봐.
올퓌
뭐라고?
혜수
쟤들 겁먹고 있어. 아무 말이나, 최대한 큰 소리로.
올퓌
그, 그래. 애초에 널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혜수
좋아. 뭐가 불만인데?
개들 짓는다. 그 소리에 섞여 큰 소리로 말하는 두 사람.
올퓌
이 멍청한 오픈카.
혜수
아니. 멈추면 안 될 것 같아.
올퓌
바깥바람을 즐길 생각을 하다니. 그런 니들의 사치스런 발상 때문에 지금 몸을 숨길 유리창조차 없는 거라고.
혜수
그땐 그런 시대였어. 그리고 이런 구형 태양열 모델이 없었다면,
올퓌
갑자기 무선 전기가 끊긴 지금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 우리 목소리가 밀려.
혜수
넌 진즉에 방전됐을 거고. 문제는 그거였네, 무선 충전.
올퓌
굳이 따지자면 모든 경제활동을 휴머노이드에 의존하는 구조 자체가,
혜수
어렵게 따질 필요 없어.
올퓌
더, 더 크게.
혜수
바이러스 하나 못 이기는 무능한 로봇 따위. 인간만큼 다정하고, 인간보다 유능한 이웃이라며? 그런데,
올퓌
지금 이게 우리 탓이라는 거야?
혜수
내, 내 입장에선 그래. 말했잖아, 나 휴머노이드 안 좋아한다고.
개들 짓는 소리만 들려온다.
혜수
안 돼. 한 마리가 다가와.
혜수 서둘러 방독면을 벗는다. 올퓌 그대로 방독면을 잡아 무대 밖으로 던진다.
깨깽하는 소리 들린다. 개들의 소리 점점 더 멀어진다.
혜수
살았다.
올퓌
지금 이게 휴머노이드 탓이라고?
혜수
그냥 급해서 한 말이야.
올퓌
내가 한 말은 다 진심이었어.
혜수
그래, 솔직히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자세한 사정이야 어떻게 됐든, 당장 작동불능 상태에 빠진 건 휴머노이드들이잖아.
혜수
이런 걸 파고들어서 뭐해.
올퓌
궁금해. 왜냐하면 나는 너를 꽤 좋아하고 있었거든.
혜수
(짧은 사이) 무선 충전만 하면 감염되는 바이러스잖아. 너희가 어쩔 수야 없었겠지.
사이.
혜수
방독면을 던진 건 괜한 짓이었을까?
올퓌
나쁜 공기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어. 그리고 이왕 누구 탓 이야기가 나와 하는 말인데, 저 들개들. 누가 키우던 개들의 후손이겠어?
혜수
내려가서 가져올까?
올퓌
널 대피시켜줄 유일한 이동수단을 떠나겠다고?
혜수
아직도 화났어? (짧은 사이) 새삼스레 왜 이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나, 맞아. 휴머노이드 혐오자야.
올퓌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을 줄 알았어. 왜 전번에 여관에선,
혜수
네가 휴머노이드인 걸 알고 해체하려 드는 남자들을 같이 막아냈지.
올퓌
휴머노이드 혐오자들이었어. 누구처럼.
혜수
솔직히,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결국 가족이야.
올퓌
손녀를 찾아간다고 했지. 당장 전화부터가 먹통이니까.
혜수
아직 걔 중학생이야.
올퓌
그런데 말이야. 왜 이런 결정을 한 거야? 그냥 안전하게 집에서 기다리는 편이 좋았잖아. 아무리 걱정이 돼도, 차고에서 구형 태양열 자동차까지 꺼내서? 꼬박 일주일이 걸리는 길을?
혜수
말 했잖아,
올퓌
손녀가 너한테 왜 그렇게 중요한 건데. 말해줘, 나한텐 중요한 문제니까.
사이.
혜수
1인 1가구 정책이 언제부터 시행됐는지 알고 있어?
올퓌
나도 역사에 대해선 알아.
혜수
난 그 시대를 살았어. 우리 세대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유년을 보냈었다고.
올퓌
내가 알기론, (짧은 사이) 그 정책에 동의한 것도 같은 인간들이었잖아. 그러니까 너희 자식이나 손자 세대가,
혜수
걔들을 탓할 수는 없어. 정부가 가구별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데 어쩌겠어? 걔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어.
올퓌
어?
혜수
평생을 부모랑만 살 것이냐, 조금 급작스러워도 독립할 것이냐.
올퓌
결국 그 말이잖아. 젊은 세대가 원망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하던 생활 습관 때문에,
혜수
내 딸이 죽었어. 손녀를 낳고선. (짧은 사이) 고생했다 미역국도 못 끓여줬는데. 이제 남은 가족은 손녀 하나야.
사이.
올퓌
아픈 곳을 캐물으려던 건 아녔어.
혜수
아프려고 이러는 거 아냐. 지키려고 가는 거지.
올퓌
맞네.
혜수
손녀 전화만 기다리며 골방에 틀어박혀서 그랬었나봐. 곁에 휴머노이드들을 미워할 필요는 없었는데.
올퓌
넌 미워한다고 하지만 거의 방전돼 가는 생면부지의 나를 차에 태워줬어.
손녀한테 가는데 쓸 소중한 전기를 매일 나눠줬어.
혜수
넌 길을 알려줬잖아. 너한테 당당하게 혐오자라고 말하면 안 됐어. 이 나이 되니,
변하는 감정을 말하기가 쑥스러워서.
올퓌
이젠 내가 널 구해줄 때야.
혜수
어?
올퓌
저 들개들 아침이 되기 전에 다시 올 거야.
혜수
그게 무슨 소리야. 분명 방독면을 맞고,
올퓌
아팠겠지. 하지만 큰 상처를 입을 정도는 아니었어. 잠시 숨을 돌리면서 쟤들은 이렇게 생각할 거야. 저들이 예상외의 행동을 해서 놀랐지만, 고작 이 정도였구나. 그러니까 쟤들은 최후의 발악을 했던 거구나.
혜수
정말 최후의 발악이었는데.
올퓌
아니, 우리 최후의 수는 그게 아니야. 최악의 경우,
혜수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올퓌 운전대 쪽으로 몸을 날린다.
혜수 운전대에 연결된 전선을 잽싸게 낚아채 들어올린다.
올퓌
이리 줘.
혜수
주면, 당장 뒷목에 꽂고 전기를 토해내려고?
올퓌
쟤들은 냄새를 기억할 거야. 차가 아니면 아침까지 버텨낼 방법이 없어.
혜수
처음부터 이러려고 내 사정을 물었구만?
올퓌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알고 싶었어.
혜수
안 돼.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올퓌
말했잖아. 엄밀히 말하면 난 죽는 게 아니라고.
혜수
기억에 이상하다싶게 집착했잖아. 감염 막겠다고 도로변까지 기어 나왔던 애가 갑자기 왜 이래?
올퓌
나도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혜수
제발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멀리서 개 짓는 소리가 들려온다.
올퓌
이번엔 그냥 가지 않을 거야.
혜수
하.
개 짓는 소리 점점 더 가까워진다.
혜수 전선을 든 채 본네트 위로 올라간다.
올퓌
뭐 하는 거,
혜수
가까이 오지 마. 전선 근처엔 얼씬도 못할 테니까.
올퓌
위험해, 내려와.
혜수
뭐든 해봐야지. 바이러스 균도 이겨냈고, 전국적인 컴퓨터 바이러스까지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혜수 크게 발을 구른다.
올퓌
조심해.
혜수
봐봐, 주춤거리고 있어. (발을 구르며) 그냥 목소리만으론 안 될 거야. 그건 전에도 봤던 거니까.
올퓌 본네트 위로 올라온다.
올퓌
같이 해.
혜수
전선 곁으론 오지 마.
올퓌
(역시 발을 구르며) 이게 먹힐지 모르겠어.
혜수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개들 동시다발적으로 짖는다.
올퓌
경계하고 있어. 우리도 크게.
혜수
나 손녀 만나면 로봇 강아지는 안 된다고 할 거야.
올퓌
거봐, 만나야 하잖아.
혜수
그리고 널 소개시켜 줄 거야.
올퓌
왜 이해를 못해, 나도 정말 그러고 싶다니까.
혜수
잔말 말고, 집중해.
혜수 손과 발을 이용해 본네트를 마구 내려친다.
올퓌 역시 따라한다.
함께 괴성을 지르는 두 사람.
혜수
멈춰, 멈춰봐. 쟤들 도망갔어.
올퓌 돌아본다.
올퓌
이게 어떻게.
혜수
우리가 기세로 누른 거야. (짧은 사이) 저기 방독면도 그대로 있던데. 가져올까?
올퓌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혜수
나 좀 무서워.
올퓌
내가 널 위험에 빠트리겠어?
혜수 전선을 쥔 채 차에서 내린다.
올퓌 전선을 건네받는다.
올퓌
다 끝났어.
혜수 방독면 쪽으로 걸어간다.
혜수 방독면을 살펴본다.
올퓌 전선을 자신의 목 쪽에 겨눈다.
혜수
(돌아보며) 물어뜯거나 하지는, 뭐 하는 거야?
올퓌
거기 가만히 있어.
혜수
나를 속였구나?
올퓌
어쩔 수 없었어.
혜수
전선 꽂기만 해봐.
올퓌
안 꽂아, 지금 당장은.
혜수
개들이 다시 돌아 올까봐 이래?
올퓌
(끄덕이며) 네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어.
혜수
올퓌.
올퓌
그래, 어쩌면 내 이름부터가 좋겠네. 올퓌, 오르페우스의 약자.
혜수
(귀를 막는다) 왜 죽을 분위기를 잡아? 로봇의 유언 따위 안 들어.
올퓌
혜수야.
혜수
애초에 친해진 게 잘못이었어. 지금도 봐, 어쩜 저렇게 잔인하게. 자기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 그거 아주 비인간적인 짓이야. 상대를 배려하는 좋은 이웃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라고.
올퓌
내 이름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지어줬어.
혜수
제발.
올퓌
오르페우스가 기억의 여신인 뮤즈들의 아들인 거 알고 있었니? 옛날엔 그랬대, 음악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기억하는 것이었지. (짧은 사이) 제발 내 얼굴을 봐줘.
혜수 천천히 올퓌를 돌아본다.
올퓌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을 때, 그 이름을 지어준 거야.
혜수
죽었다고?
올퓌 고개를 끄덕인다.
혜수
너희는 기억이 지워질 뿐 죽는 건 아니라며.
올퓌
말 했잖아.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혜수
아.
올퓌
그 사람 이름은 재현이었어.
혜수
올퓌.
올퓌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존재 조건을 뛰어넘는 사랑을 배웠어. 이젠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혜수
무슨 말인지 다 알겠어. 내가 그리로 가도 될까?
올퓌
(고개 저으며) 네가 날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혜수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마, 알겠으니까.
올퓌
나는 좀 앉아야겠다. 마지막 순간 무슨 물건처럼 무너져 내리고 싶지는 않네.
올퓌 자리에 앉는다.
혜수
그러면 개들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 보자. 혹시 알아? 걔네 이번엔 제대로 겁먹고,
올퓌
반드시 올 거야. 쟤네도 생존을 걸고 있거든.
혜수
이번에도 필사적으로 막을게.
올퓌
넌 지금까지 할 만큼 했어.
혜수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올퓌
그러니까 기억해줘. 내가 그 사람을 기억했듯.
혜수
고작 일주일 인연. 결국엔 다 잊어버릴 거야.
멀리서 개 짓는 소리 들려온다.
혜수
안 돼.
올퓌
혜수야. 더 늦기 전에,
혜수 무대 밖에다 대고 괴성을 지른다.
다시 지른다.
혜수
목청 아껴. 내일 비실대지 말고.
사이. 개들의 짓는 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혜수 올퓌를 돌아본다.
혜수
재현. 재현이라고 했지?
올퓌
거봐. 둘 다 기억하고 있잖아.
올퓌 전선을 목뒤에 꽂는다. 눈을 뜬 채 조수석 등받이에 기대는 올퓌. 미동도 없다.
개들의 짓는 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긴 사이. 혜수 방독면을 들고 차로 달려간다.
혜수 운전석에서 방독면을 쓴다. 운전대를 잡는 혜수. 조명이 꺼진다.
부르릉 시동 걸리는 소리 들린다. 개 짓는 소리 계속 이어진다.

- 막 -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서동민

서동민
제 글이 솜씨 없는 푸념처럼 보일까봐 항상 걱정하는 것 같아요. 아무튼 제 불만에서 출발하는 글을 씁니다. 제 글을 읽고도 함께 힘이 나는 사람이 있기를.
twin09041@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