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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 Ex Machina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윤노아

제196호

2021.03.11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5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무대
무대 중앙에 원탁을 둔다. 원탁 위에 여성을 형상화한 인형을 놓는다. 관객을 등지지 않는 구도로 각 인물이 앉을 의자를 원탁 주위에 설치한다. 의자는 각 인물이 여신으로서 관장하는 영역과 관련된 형상이다. 극에서 헤라는 가정, 아프로디테는 사랑, 아테나는 지혜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부각 된다. 각 인물의 복장 또한 여신으로서 관장하는 영역에 관련하나, 여신이기보다 여성에 가까운 차림새일수록 좋다.
어두운 무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작아 내용을 알아듣기 어렵다.
소리가 차츰 커진다.
완연한 여성의 음성이 된다.
여성
그리하여 마음을 다하여 바라노니,
사이.
여성
신이시여, 부디 제 삶에 관여 말아주시기를.
조명이 원탁 위에 오른 인형을 집중적으로 비춘다.
원탁 주위에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가 앉아 있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는 조명 바깥에 있기에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아프로디테
이 여자, 혼자 가파른 절벽에서 뭐 하고 있는 거죠?
헤라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것 같구나.
아프로디테
세상에. 자살하려나 봐요.
아테나
기품을 모르는군요. 그리 가볍게 말하다니.
아프로디테
어머. 그럼 뭐라고 하죠? 날아갈 준비를 한다고 해볼까요? 이카로스처럼요.
추락하기 위해서.
헤라
얘야, 추락은 운 나쁜 비행이고 비행은 운 좋은 추락에 불과하단다.
아테나
죽음은 실패한 삶이고 삶은 성공한 죽음 같지요.
아프로디테
저런. 부러 요란스럽게 말하는 것이 곧 기품이로군요?
아테나
무게를 잃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프로디테
어쩌죠? 나는 몸도 마음도, 심지어 목소리마저 가벼운데요. 깃털처럼요.
헤라
모두 조용히.
사이.
헤라, 원탁 위에 오른 인형을 향해 검지를 겨눈다.
헤라
우리는 이 여인을 구할 것이다.
무대가 밝아진다.
헤라, 손을 거둔다.
아테나, 무릎에 손을 올린다.
아프로디테, 머리카락을 꼰다.
사이.
아프로디테, 손뼉을 친다.
턱을 괸다.
아프로디테
아시다시피 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당장 저곳으로 아리따운 자를 인도하겠어요. 에로스가 필요하겠군요. 아리따운 자와 이 여자를 화살로 꿰어보죠. 달콤한 사랑에 빠지면 죽음 따위 무색해질 거예요. 죽음만이 사랑을 폐기할 수 있으니까요. 어때요? 내가 권능을 부려도 되겠나요?
아테나,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테나
오르페우스의 사례를 잊으셨군요. 만약 여자가 사랑을 품은 채 죽는다면, 아리따운 자는 아리따운 마음으로 여자를 구원하러 저승까지 향할 겁니다. 구원엔 실패하겠지요. 운명의 세 여신이 진단할 필요도 없이, 산 자는 죽은 자에게 무모할 뿐 끝내 무용합니다.
아테나, 헤라를 본다.
아테나
양어머니, 저 아테나의 지혜를 사용하게 해주세요. 노파의 모습으로 이 여자 곁에 서겠습니다. 자결은 지혜롭지 못한 결정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또는 우매한 까닭에 죽음을 택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손수 지혜를 나눠 주겠습니다. 저의 지혜를 얻는다면 자결의 덧없음 따위 금세 깨우칠 될 것입니다.
아프로디테
궁금해요, 아테나. 이 여자의 판단이 어째서 지혜롭지 않죠?
아테나, 아프로디테를 본다.
아테나
자기 몸을 저승에 내던지는 것이 지혜로워 보입니까?
아프로디테
나야 모르죠. 당신처럼 지혜롭지 않으니까. 내겐 이 여자가 그저 사랑스럽게 보여요. 어쩜 저리도 아리따운 몸과 마음으로 절벽 앞에 섰을까.
아테나
사랑은 이성을 앗아가죠.
아프로디테
자살은 이성이 아닌 감정적인 판단에 근거하겠고요. 사랑은 말이지요, 아테나. 모든 감정에 기인한답니다. 일말의 호의는 물론, 치솟는 증오에서도 솟아나요.
사이.
아프로디테
삶을 포기하게 되는 무력감에서도 샘솟을 수 있어요. 다시 묻지요, 아테나. 이 여자의 결정이 지혜롭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요? 내게 이 여자는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완벽하게 보일 따름인데요.
아테나
제가 이 여자를 사랑스럽게 여긴다면 당신처럼 판단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프로디테, 제 친어머니 메티스는 비록 지혜로웠으나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지요. 사랑에 눈이 멀어 제 아버지, 제우스는 속아 잡아먹혀 버렸고요.
아프로디테
알고 있어요. 내기했다면서요. 사랑스럽게도.
아테나
뭐가 사랑스러운지 이해를 못 하겠군요.
아프로디테
누가 더 작게 변신할 수 있는지 내기했던 것으로 알아요. 제우스가 파리로 변한 메티스를 삼켜버렸다지요? 당신은 제우스의 몸에서 머물던 파리, 아니지. 메티스로부터 태어났고요. 제우스의 머리를 찢으면서 말이에요.
아테나
당신은 그 또한 사랑스럽게 여길 작정인가요.
아프로디테
물론이에요. 분명한 사랑이랍니다.
아테나
어처구니없군요. 사랑처럼 중요한, 고귀해야 할 영역을 당신이 관장하다니.
아프로디테
지혜로운 여신 아테나, 당신은 사랑을 고귀한 것으로 여기나 봐요. 사랑은 고귀한 것일지 몰라요. 고귀한 자들이, 고귀한 사랑을 하죠.
아프로디테, 탁자를 짚고 일어선다.
아프로디테
하지만 고귀한 자들에겐 신이 필요 없답니다. 그들은 신이 없더라도 잘 살아갈 거예요. 내 은혜가 없더라도 고귀한 사랑을 지속하겠지요. 그런 소수의 짝을 축복하는 것이 사랑의 여신, 나 아프로디테의 일이라면 정말 한가롭겠어요. 하지만 신은 낙원에 오래 있어선 안 돼요. 늘 낙원 아닌 곳에 헌신해야지요. 신은 늘, 추하고 더러운 곳으로 향해야 해요. 안 그런가요? 무저갱을 정화할 수 있는 건 신뿐이며, 온갖 오물이 뒤엉키는 곳에서야말로 신을 찾는 절규가 들려오니까.
사이.
아프로디테
고귀한 것은 늘 희소하죠, 아테나. 대부분의 사랑은 추하게, 또는 멍청하게 이루어져요. 누군가를 질투해 죽이고, 사랑하지 않는 자와 동침하잖아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피조물이 그런 방식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반드시 그들과 함께할 작정이니. 그리하여 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떠밀린 탓에 못난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아레스와 뒤엉키지요. 허위로 사랑하고, 욕망에 솔직하답니다. 그런 나를 보세요, 아테나. 추하고 멍청한,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피조물들과 다를 바 없는 나를.
아프로디테, 아테나를 향해 상체를 숙인다.
아테나, 시선을 피한다.
아프로디테
어서요. 가까이에서 보세요. 난 이토록 아름답지 않던가요.
헤라, 탁자를 내리친다.
헤라
그만두거라,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 헤라를 훑다가 의자에 앉는다.
헤라
아테나, 너도 그만하렴.
사이.
아테나, 고개를 끄덕인다.
헤라
피조물은 곧 신의 자식이나 마찬가지란다. 피 섞인 이들끼리만 가족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근본, 부모는 피 섞이지 않은 자들의 관계로 탄생한다. 부모 자식의 관계에도 피는 중요하지 않다. 종이 달라도 좋다. 신의 자식마저 때때로 괴물 취급받지 않더냐.
헤라, 아프로디테를 바라본다.
헤라
아프로디테, 그대는 크로노스에 의해 거세된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태어났지. 그러나 분명 내 자식 같은 존재란다.
헤라, 아테나를 바라본다.
헤라
아테나, 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 딸이란다. 우린 분명한 모녀다. 트로이 전쟁에서도 손발을 맞췄잖느냐.
헤라, 인형을 바라본다.
헤라
이 여인을 또한 우리 가족이다. 가족으로서 살리는 것이다.
사이.
아테나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양어머니. 저는 이 여자를 살리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헤라
내가 충분히 말했거늘. 이 여인은 우리의 가족 같은 존재다. 우리는 이 여인을 구원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단다. 많은 힘을 들일 것도 없지. 아주 작은 힘을 들여도 이 여인은 죽지 않을 것이다. 힘을 가지고도 가족을 구하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
아테나
물론 우리에겐 권능이 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감정으로, 양어머니께서는 가정의 온기로, 저는 지혜의 냉철함으로 자결을 말릴 수 있겠지요. 허나 이 여자가 자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가정 때문이라면, 지혜 때문이라면, 그 모든 것 때문이라면 어쩌지요? 우리에게 이 여자를 살릴 권리가 있습니까? 양어머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신에겐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권능뿐입니다.
사이.
헤라
권리가 무엇이더냐?
아프로디테
우리에게 없는 것이지요.
헤라
신에게 없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아프로디테
저런. 헤라, 신에게 없는 것은 많아요. 내겐 고귀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이가 없답니다. 헤라에겐 바람피우지 않는 남편이 없네요. 아테나에겐 여유가 부족하죠.
아테나
권리란 우리에겐 없는 것. 오직 피조물, 그중에서도 사람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끼리 소정의 자격을 부여하고, 이를 곧 권리라고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이상 권리는 침해받지 않습니다. 권리는 모든 사람이, 나아가 신이 보장했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사람은 모두 살아갈 권리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사이.
헤라
우리의 권능을 흉내 내는 게로구나.
아프로디테
처음 만들어질 땐 그랬을지도. 하지만 헤라, 어떤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답니다. 신에게 자결할 권능 따위 없는데도.
헤라
감히 신의 허락 없이 죽는단 말이냐.
아테나
자결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대체로 신을 믿지 않습니다.
헤라
그럼 무엇을 믿느냐?
아프로디테
자기 자신.
아테나
강인한 사람은 그렇지요. 약한 사람은 운명을 믿겠고요. 운명의 세 여신이 아닌, 그들이 관장하는 운명 자체를 말이에요.
사이.
아테나
양어머니, 아버지가 제 친어머니를 먹은 까닭은 운명 앞에서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난다면 아버지를 능가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기에. 이를 두려워한 아버지가 친어머니를 잡아먹은 것이라고 압니다. 아버지의 머리를 찢고 태어난 제가 남자였다면, 아버지는 저를 타르타로스 속에 던져버렸겠지요. 제가 주신이 된 까닭은 오직 여자였기 때문에. 여자인 저는 아버지를 능가하지 못할 것으로 간주 된 탓에 살아남고, 아버지에게 제 지혜를 이용하게 된 것 아닙니까.
헤라
제우스는 두려워했단다. 우라노스처럼, 크로노스처럼 꼴사납게 권좌에서 물러날까 봐. 다행히 네가 여자이기에 살아남은 거란다.
아테나
(이를 악물고) 저는 그것이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어집니다.
사이.
헤라, 아테나의 손을 끌어 감싸 쥔다.
헤라
나의 딸아, 신은 죽을 수 없단다.
아테나
제가 신이 아니었다면 치욕스러워 자결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신보다 지혜롭다는 제가요. 제 지혜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아버지에게 이용되기 위해서입니까. 저는 이 여자가.
아테나, 인형에 손을 얹는다.
아테나
너무나도 지혜로운 탓에 죽음을 결정한 것이 아닌가 의문스럽습니다. 지혜 의해 이 여자가 죽고 싶어졌다면, 저는 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로디테는 어떤가요? 사랑 때문에 이 여자가 죽음을 택하는 거라면, 그 또한 사랑스럽다며 방관하겠지요. 양어머니는 어떤가요? 이 여자가 가정 때문에,
사이.
아테나
아버지 같은 반려 때문에 죽음을 택하려 한다면 말리실 건가요?
사이.
아프로디테
아테나, 당신이 지혜롭다는 사실을 부디 기억하세요. 똑똑한 자는 똑똑한 탓에 신랄하답니다.
아프로디테, 기지개를 켠다.
아프로디테
때론 직관적으로 봐야 할 때도 있다고요. 여기, 헤라를 보세요. 가장 자주 분노하는 여신이 누구죠? 우리 사랑스러운 피조물에게 사사롭게 해를 끼칠 정도로요. 아레스가 누구 아들인지 당신은 잊었나 봐요.
헤라
그만.
사이.
헤라
내가 직접 이 여인에게 묻겠다.
헤라, 인형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헤라
듣거라. 너는 우리의 소중한 여인이다. 나 헤라는 너를 가족처럼 여겨 구원하고 싶다.
사이.
헤라
가정이, 사랑이, 지혜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 알려다오. 무엇 때문에 죽음을 택하려는 게냐.
사이.
헤라
정녕 우리 때문인 게냐.
무대가 암전된다.
사이.
헤라
(토해내듯이) 뛰어내렸구나.
아테나
절벽에 뻗은 가지에 부딪히면서.
아프로디테
만신창이가 된 채 물속에 잠겼군요.
헤라
저대로 하데스의 손아귀에 떨어지겠구나.
아프로디테
슬프군요. 죽어서도 신의 손아귀에 놓인다니.
헤라
모든 신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모든 피조물이 그럴 것이다.
아테나
그래도 만약.
사이.
아테나
지혜를 이용당하는 처지였다면 이제 후련할 것입니다.
아프로디테
사랑으로 고통스러웠다면 더는 연연할 것 없겠어요.
헤라
저 여인이 만에 하나.
사이.
헤라
이 헤라가 애써 지켜온 영역 때문에 죽음을 결심한 것이라면.
사이.
헤라
가정 때문에 죽음을 결심한 것이라면 나는 슬프겠구나.
사이.
헤라
미안하겠구나.
사이.
헤라
너무나도
사이.
헤라
나는 너무나도 부럽겠구나.

- 막 -

*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하던 극작술 Deus Ex Machina의 변형. Dea는 Deus의 여성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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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아
예의를 다하며 쓰고 싶어요.
Twitter : ameno_rrh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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