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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담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이철용

제197호

2021.03.25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5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종삼 정신과 의사
태준 외계인 손 증후군에 걸린 중년 남자
태준의 왼손 어머니
신경정신과 병원 진료실
태준, 움찔거리는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상태로 종삼을 바라보고 있다
종삼
손에 문제가 있으시다고요?
태준
네, 선생님. 손이 제 의지를 무시하고 멋대로 움직여요.
종삼
왼손입니까, 오른손입니까. 아니면 양쪽 다 그래요?
태준
왼손이 그럽니다. 아주 곤란해요, 이거.
종삼
지금도 그래요? 어디 한번 봅시다.
태준
성질이 고약하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태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낸다,
활어처럼 팔딱거리며 책상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 왼손
종삼
(놀랍다는 듯) 지금 태준 씨가 움직이고 있는 게…?
태준
아닙니다. 저하고 아무 상관 없어요.
종삼
한 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태준
네, 대신 조심하세요. 아까도 괜히 건드렸다가, 어, 엇.
종삼이 태준의 왼손을 향해 다가가자, 태준의 왼손이 종삼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가까스로 왼손을 떼어놓자 태준의 얼굴에 달라붙어 긁고 할퀴는 태준의 왼손
종삼, 태준의 팔을 끌어낸 다음 자신의 팔로 눌러 제압한다
종삼
(헉헉대며) 괜찮으십니까?
태준
괜찮습니다. 괜찮으세요?
종삼
예,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이거 오시느라 아주 힘드셨겠어요.
태준
말도 마세요.
종삼
(태준의 왼손의 동태를 살핀다) 조금 잠잠해진 것 같군요.
태준
혹시 모르니 계속 누르고 있으세요.
종삼
몇 가지 여쭤보죠.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태준
정확히 2주 됐습니다.
종삼
최근 넘어졌거나, 어디 부딪혀서 머리를 다치신 적 있습니까?
태준
아뇨, 없습니다.
종삼
뇌수술 병력이 있거나 관련 질환을 앓고 계십니까?
태준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종삼
가족 중에는요?
태준
큰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 치매를 앓고 계셨어요.
종삼
앓고 계셨다고요? 지금은요?
태준
돌아가셨어요. 2주 전에요.
종삼
장례를 치르셨겠군요.
태준
네, 물론이죠.
종삼
손이 그렇게 된 게, 혹시 그 장례식 직후입니까?
태준
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은데요.
종삼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태준
자주 뵙지는 못했어요.
종삼
흠.
사이
종삼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한쪽 뇌가 다른 쪽 뇌의 일을 인지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증상이죠. 주로 뇌 수술을 했거나 뇌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어요. 본인이 모르는 뇌출혈이나 경색이 있을 수 있거든요.
태준
그건 아닐 거예요. 석 달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어요. MRI도 받고, 뇌 검사도 했지만 멀쩡했어요.
종삼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글쎄요, 심리적인 유발 원인이 있는 거겠죠. 그런데 심리적인 이유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증상이라 의문이 조금 듭니다. 손을 가만히 두면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태준
글쎄요.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아요. 뭘 쥐어달라는 것처럼, 맞아요! 쥘 것을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없으면 불안한 듯이.
종삼
한번 직접 보도록 하죠.
종삼, 조심스럽게 태준의 왼손을 누르고 있던 팔을 뗀다
태준의 왼손, 부르르 떨다가 다시 책상 위를 뛰어다니듯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책상 위에 놓인 잡동사니를 하나씩 쥐고 던지는 태준의 왼손
볼펜에 손이 닿자 더듬더듬 만져보다가 이내 그것을 쥔다
종삼
펜?
태준의 왼손이 펜으로 책상을 노크하듯이 두드린다
태준
이게 무슨 뜻일까요?
종삼
설마….
슬며시 노트를 밑에 가져다 대는 종삼
태준의 왼손이 펜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태준
쓸 것을 찾고 있었나 봐요!
종삼
뭐라고 쓰는지 한 번 봅시다.
얘야.
종삼
얘야, 얘야라고 썼어요!
태준
어머니는 항상 저를 저렇게 부르곤 하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요.
잠은 잘 잤니?
멀리 왔다 갔으니 피곤하겠다.
그런데 얘야.
종삼
태준 씨의 안부를 묻네요?
왜 나를 죽였니?
사이
종삼
저게 무슨 소리입니까?
태준
모르겠습니다.
종삼
확실합니까?
태준
어머니는 주무시던 중에 돌아가셨어요.
왜 내 목을 졸랐니?
종삼
목을 졸랐다고 하는군요?
태준
아닙니다.
종삼
그럼 왜 태준 씨 왼손은 저런 말을 하는 걸까요.
태준
그걸 알고 싶어서 선생님을 찾아온 거잖아요.
종삼
전혀 당황하지 않으시네요.
태준
제가 어머니를 목 졸라 죽였다는 겁니까?
종삼
무의식 속에서 죄책감이나 트라우마가 발현하면 암시에 걸려 본인이 제어하지 못 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죠. 그것이 극단적으로 발생하는 걸 해리성 인격 장애라고 부르고요.
태준
제가 어머니를 죽였다면 왜 여기 있겠어요? 교도소나, 법정에 가서 면담하고 있겠죠.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어요. 사망진단서도 있고, 장례식에 온 친척들도 있고, 또….
종삼
물론 태준 씨가 어머니를 죽였을 리는 없지요.
태준
근데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종삼
미안합니다. 꼬치꼬치 캐묻는 게 제가 하는 일이라서요. 하여튼 규명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비유하자면 태준 씨 왼손이…. 신병을 앓는다고 해야 할까요? 태준 씨 무의식에 근거해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왼손이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어쩌면 태준 씨 마음속에 있는 억압을 거둬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실마리를 찾아봅시다. 최근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좋으니 말씀해보세요. 사소한 것일수록 더 좋습니다.
태준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를 만나봤어야 했던 것 같아요.
종삼
그렇게 못한 이유가 있습니까?
태준
한 두 가지가 아니죠. 따로 살기도 했고요.
종삼
아버님은요?
태준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종삼
잠깐만요. 그럼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홀로 내버려 두셨단 말입니까?
태준
…….
종삼
맞습니까?
태준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선생님?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 안 계세요. 중요한 건 제 손이 지금 말을 안 듣는다는 거죠.
종삼
이봐요. 이건 윤리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방치하다시피 했단 말입니까? 치매 환자의 고독감에 대해 아세요? 상상해보세요. 있어야 할 물건은 없는데 없어야 할 물건은 있고,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고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상태를, 그런 사람이 느낄 불안과 공포, 괴로움을 말입니다.
태준
선생님.
종삼
당신을 돕지 않겠습니다. 진료를 거부하겠어요.
태준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종삼
아뇨,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태준
저도 괴롭습니다. 후회하고 있어요. 아무렇지 않았다면 제 왼손에 문제가 생겼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죄책감이 있으니까 왼손이 제 어머니 흉내를 내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어요. 돌아가신 어머니하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 심정입니다.
종삼
대화? 그래요, 그렇게 해봅시다.
태준
네?
종삼
오른손으로 펜을 쥐세요. 그리고 적어요, 어머니라고. 부르듯이.
태준
이런다고 치료가 될까요?
종삼
군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
태준
설명을 좀 해주세요.
종삼
정신분석학에서는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내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 불교에서는 이것을 주아, 객아라고 표현하지요. 지금 태준 씨의 객아는 태준 씨의 어머니예요. 태준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화해해야 합니다. 태준 씨 마음속에 있는 억압이 해소되면 이전처럼 왼손을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태준
아, 알겠어요. 어머니.
얘야.
종삼
보세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계속 쓰세요.
태준
엄마, 나예요.
너로구나.
태준
네, 엄마 아들 태준이요.
그래, 태준아.
왜 나를 죽였니?
종삼
돌려 쓰지 마세요. 회피하면 안 됩니다. 솔직하게 쓰세요.
태준
엄마가 짐덩이처럼 느껴졌어요.
내가?
태준
엄마는 저를 미워하셨죠. 저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해.
너는 내 가슴에 대못을 박았어.
태준
대못을 박은 건 엄마지 내가 아녜요.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태준
맞아요. 벌써 수십 년 전이네요. 엄마가 원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죠.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요. 난 그럴 수 없었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넌 집안 망신이야.
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어.
태준
혹시나 했지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엄마는 날 불행한 사람 취급했죠. 불행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어요! 난 제법 즐겁게 살았어요. 내겐 친구들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엄만 없었죠. 엄마를 목 졸라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던 거예요.
못돼 처먹은 놈.
넌 수치야.
난 너를 내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
어쩌다 너 같은 자식을 낳았는지.
태준
그만하세요!
널 얼마나 아꼈는데.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어?
태준
엄마가 죽어서 속이 다 시원해요!
나도 내가 죽어서 속이 시원하다.
진작 죽을 걸 그랬다.
태준
진작 죽지 그러셨어요.
그래.
내 불찰이다.
사이
태준
거긴 어떠세요.
살만하다.
태준
다행이네요.
얘야.
태준
네?
미안하다.
태준
(충격받은 듯) 미안하다고요?
너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널 없는 사람, 죽은 사람 취급하지 말았어야 했어.
태준
절 부끄러워하셨잖아요.
후회한다.
태준
정말이세요?
그래, 이렇게 되고 보니,
네가 죽는 것보다는 내가 죽는 게 맞는 거 같다.
태준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에요.
미안해, 얘야.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구나.
태준아.
정말 미안해.
그리고 넌 여기에 오지 말고.
죽지 마.
네가 제발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태준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간다, 이제.
잘 지내라.
부탁이야.
태준
가세요, 멀리 안 나갑니다.
바르르 떨리다가 뒤집히는 왼손
천천히 왼손을 움직여보는 태준
종삼
손이….
태준의 왼손이 태준의 얼굴을 부숴버릴 듯 움켜쥔다
종삼
태준 씨!
천천히 얼굴을 어루만진 뒤 쓸어내리는 태준
태준
제 손입니다.
종삼
노, 놀랐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태준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게 결국 나였네요.
사이
태준
전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으셨거든요. 제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셨어요. 이사를 하셨는지 찾아간 옛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더군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가 어떤 상태였는지 알게 됐던 겁니다. 제게 책임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괴로운 만남은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마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종삼
의사랍시고 여기 앉아서 사람들 얘길 듣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언제나 시대가 사람들보다 뒤에 있다는 생각요.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다시 오세요.
태준
물론입니다.
종삼
수고하셨습니다. 들어가세요. 멀리 안 나갑니다.
태준
(웃으며) 이만 가보겠습니다.
종삼
잠깐, 이거 가져가셔야지요.
필담한 노트를 태준의 손에 쥐여주는 종삼
태준
고맙습니다.
태준, 나간다.

-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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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용

이철용
친구들, 친구들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인과 동료와 동지들 생각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역시 친구들 생각을 많이 합니다.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사탄동맹>으로 등단했습니다. 캐치볼 모임, 기타 모임, TRPG 모임을 합니다. 친구들하고요.
mentalau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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