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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저 브레이크 (Freezer Break)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김지우

제197호

2021.03.25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1년 5월까지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눈)오리
붕어(싸만코)
(얼음)틀

1.

캄캄한 어둠. 멀리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리가 가까워지다 문이 열리면, 눈부신 빛과 함께 거대한 손이 나타난다. 손, 오리를 무대 위로 올려 놓고 사라진다. 문이 닫힌다. 다시 어둠.
오리, 두리번댄다.
소리
읍읍!
정체불명의 소리에 겁 먹은 듯 뒷걸음질치는 오리. 등 뒤에 무언가가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대쪽으로 도망친다.
소리
읍읍! 읍! 으으읍!
오리
뭐야! 누구야!
소리
으읍!
신경 쓰지 마.
오리, 놀라서 펄쩍 뛴다.
대꾸하지 않으면 조용해져. (사이) 내 말이 맞지?
오리
너는 누구야?
나? 나는…
곧 거대한 직사각형의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오리에게 다가가면,
붕어
또 시작이다, 또!
무대 위 밝아진다. 팬 돌아가는 소리. 그림자의 자리에는 파란색 테두리의 뚜껑이 얹힌 틀이 서 있다. 뒤이어 붕어가 포장지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다.
붕어
쟤야말로 무시해.
아무 짓도 안 했거든.
붕어
하려던 참이었잖아. 하여간, 얼음만 보면 시비 걸기 바쁘다니까.
오리
난 얼음이 아닌데?
아니라고?
틀, 부리 앞까지 다가와 오리를 관찰한다.
좀 다르게 생기긴 했는데……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다.)?
붕어
코도 없는 게.
밀가루 껍질 주제에.
붕어
어쭈, 한 판 붙어 보겠다는 거야?
상대가 되어야 붙든 말든 하지, 이 밀가루 껍질아.
붕어
너 정말!
붕어, 포장지에서 튀어나와 틀에게 달려들지만 바로 나가떨어진다.
나는 플라스틱이거든. 너 따위가 이길 수 있는 재질이 아냐.
토라지는 붕어.
오리
저기, 그러니까… 너희는 여기 산 지 오래된 거지?
어. 신분이 다르긴 하지만.
붕어
(궁시렁대며) 다르긴 뭐가 달라.
난 여기 주인이야. (벽 툭툭 치며) 이 냉동고는 나랑 처음부터 한몸이었다고. 쟤는 작년 여름에 들어온 불청객이고.
붕어
네가 왜 주인이냐? 주인은 손이야!
오리
손?
붕어
널 두고 간 거대한 손 말이야. 여긴 온통 손이 보관하는 것들로 가득하거든. 저기, 저쪽에 저 봉투 있지? 아까 널 놀라게 한 애들이야, 꼬마 만두. 쟤들도 보관되는 처지고. 답답할 것 같아서 귀퉁이라도 조금 뜯어 주려고 했는데 글쎄, 포장이 얼마나 잘 되어 있던지….
소리
읍! 으읍!
붕어
(만두들에게) 못 열겠다니까! 그냥 그렇게 지내! (오리에게) 여럿이서 붙어 있으니까 외롭진 않을 거야.
아님 더 끔찍할지도.
오리
너희도 보관되는 중이야?
붕어
비슷해. 난 지지난 여름에 여기로 이사 왔거든.
정확히 말하면 팔려 온 거지.
붕어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점 출신이야. 이사 오던 날, 난 내가 본격적으로 아이스크림의 운명을 따르기 시작한 줄 알았어. ‘올 것이 왔구나!’ 싶더라니까.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몰라.
너한테 두근거릴 심장이 어디 있냐?
붕어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손에게 잡힌 거야. 아주 밝은 빛이 나를 휘감았고, 나는 (포장지 속에 들어가서 비장한 표정으로) “기다려라, 나의 친구들아. 붕어가 간다. 꿋꿋하게 나의 운명을 맞이하리라!” 하고 있었어. 근데 그때—
휴대폰 진동 소리, 그리고 뒤를 잇는
손1 (목소리)
어. 지금 나오라고? 알았어.
붕어
손이 나를 다시 포장지에 싸서, 냉동고에 집어넣었어.
문 닫히는 소리.
붕어
그러더니 까맣게 잊어버리더라구. (사이) 완전 멋지지?
오리
…뭐가?
붕어
당장 먹힐 아이스크림에서 나중에 먹힐 아이스크림이 되었다는 게! 덕분에 여기 오래 머물게 됐다니까. 친구들도 엄청 많이 사귀었구. (틀을 가리키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 쟤는 친구 아니야. 마음에 안 들거든.
나도 너 마음에 안 들어.
붕어
(놀리듯) 안 물어봤는데.
저게 진짜.
붕어, 황급히 오리 뒤로 숨는다. 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오리
(틀에게) 그럼 넌 어쩌다 여기서 지내게 된 거야?
말했잖아, 주인이라고.
오리
아….
난 얼음을 만들어. 나한테 물을 부으면 반듯하고 가지런한 정육면체 얼음이 나와.
오리
내가 아는 얼음은 되게 더럽고 지저분한데.
얼음이 어떻게 더럽고 지저분할 수 있어? 야, 붕어. 네가 말해 봐.
붕어
뭘?
내 얼음이 얼마나 예쁜지.
붕어
(능청스럽게) 미안, 기억이 안 나서 말이야.
본 적 있잖아!
붕어
그랬나? 밀가루 껍데기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넌 어디에서 온 건데? 포장지도 없이.
오리
난 공원에서 왔어.
정적.
오리
왜 그래?
붕어
공원에도 냉동고가 있어?
바보야, 공원에 왜 냉동고가 있냐?
붕어
좀 특별한 공원일 수도 있지!
오리
아니, 아니. 냉동고가 아니라 바깥. 바깥에서 왔어.
다시 정적.
그럼 그 전에는 어디 있었는데?
오리, 고개로 위를 가리킨다.
냉동고 윗칸?
오리
하늘.
하늘? 무슨 하늘?
오리
겨울 하늘.
겨울? 지금 겨울이야?
오리
응.
(신경질적으로) 아씨, 봄은 된 줄 알았는데. 여름 되려면 얼마나 남았어?
오리
나도 잘 몰라.
바깥에 있었다면서.
오리
나는 여름을 본 적이 없어. 눈이거든. 추운 겨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주 아주 작은 얼음 비슷한 거. 어제 아침에 떨어져서 공원에 쌓여 있었는데, 웬 거대한… 손, 손이 나를 무언가에 담더니, 이런 모양으로 찍어냈어. 그러고 나서 여기로 데리고 왔어.
언짢은 표정의 틀.
붕어
그럼 여기가 네 첫 냉동고야?
오리
그렇지.
붕어
축하할 일이네! 마음에 들 거야. 내가 친구들 다 소개시켜 줄게. 얘들아! 여기 신입이—
오리
아니, 그게 아니라, 난 돌아가야 해.
붕어
왜?
오리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붕어
그렇게 치면 나도 마찬가지야. 진작 먹혀서 사라졌어야 했어.
오리
넌 음식이잖아. 네가 냉동고에 있다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
붕어
원래 첫날엔 다 뒤숭숭한 법이야. 일단 머물 구석을 찾아 줄게.
오리
눈은 바깥에 쌓여 있다가 녹아 없어져야 해. 땅에 스미거나 공기 중으로 날아가야 돼. 친구들은 모두 자기 몫의 일을 할 텐데, 내 자리만 움푹 패여 있을 걸 생각하면……. (떠올리기 끔찍한 듯 고개 저으며) 돌아가야 돼.
녹든 날아가든 다 없어지는 건데 그게 뭐가 그렇게 급해서—
오리
(언성 높이며) 나가야 한다니까?
나가 봐, 그럼.
정적.
나가 보라고. 공원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할 수 있으면 가 봐. 아니, 그 이전에, 저 문을 열 수 있으면 나가 봐.
붕어
틀, 그러지 마.
밖에서 왔다고 유난 떨 생각 마. 여기 들어온 이상 너도 우리랑 똑같아. 우리한텐 선택권이 없어. 모든 건 손에게 달렸어. 우린 그냥 여기 앉아서 채워지고, 비워지고, 버려지는 수밖에 없다고. (사이) 얼른 나가려고 발버둥쳐 봐. 그래야 지쳐서 입 다물겠네. 시끄러워 죽겠어.
틀, 구석으로 사라진다.
오리
……나갈 방법이 없어?
붕어
저 문, 아주 무거워. 저걸 열고 닫을 수 있는 건 손뿐이야.
오리,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문을 밀어 본다. 처음에는 부리로, 그 다음에는 머리로, 나중에는 온몸으로. 꿈쩍 않는 문의 모습에 뒤돌아 몇 발짝 떨어지더니, 온 힘을 다해 돌진한다.
붕어
(놀라서) 야!
오리, 볼품없는 충돌음과 함께 쓰러진다.

2.

다시 정신을 차린 오리. 걱정스러운 듯 오리 옆에 앉아 있는 붕어와 달리, 한쪽 구석에 앉아 둘을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는 틀.
붕어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들면 어떡해! 괜찮아?
오리의 꼬리 일부가 떨어진 채다. 오리, 착잡한 얼굴로 몸에서 분리된 눈덩이를 쳐다본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겠네.
틀, 등을 돌린다.
붕어
그러니까 내가 무겁다고 했잖아. (한숨 크게 쉬고는 오리 옆에 앉는다.)
오리
(풀 죽은 채로) …틀은 늘 저래?
붕어
(속삭이며) 아니. 얼음을 만든 지 너무 오래돼서 좀 예민해진 상태야.
오리
만들면 되잖아, 여기도 겨울만큼 추운데.
붕어
그러려면 손이 물을 부어 줘야 하는데, 여름이 아닐 땐 그럴 일이 없어. 기다리느라 지친 걸 거야. 틀한테는 얼음을 만드는 게, 네가 공원에 돌아가야 하는 거랑 같은 셈이거든.
오리
너는 나가고 싶지 않아?
붕어
바깥으로?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걸. 게다가 이곳의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다구. 단내만 진동하던 가게 냉동고보다 훨씬 좋아. 조용하고, 처음 보는 친구들도 많고, 손들이 마구잡이로 쳐들어와 쑤셔대지도 않고.
오리
나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게 될까?
붕어
…포기하게?
오리
문을 열 방법이 없잖아.
붕어
손이 널 꺼내러 올지도 몰라.
오리
그게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사이) 물어보고 싶다. 왜 여기 데리고 온 건지.
사이
붕어
아쉬웠던 거 아닐까.
오리
뭐가?
붕어
네가 사라지는 게. 너 금방 녹아 없어진다며. 여기 있으면 겨울이 다 지날 때까지, 아니, 봄 여름 가을을 모두 거치고 다시 겨울이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일 수 있잖아.
오리
나는 그대로이길 바라 본 적 없는데.
붕어
손은 변화를 싫어해. 모든 손들이 그래. 가게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녹았다가 다시 얼려진 아이스크림은 울퉁불퉁하기 마련이거든. 그런 친구들은 이사 가는 것 같다가도 돌아와. 늘.
오리
그럼 손들도 안 변해?
붕어
(코웃음) 그럴 리가. 늘 변하지. 모양도 변하고, 소리도 변하고, 두께도 변해. 그러면서 다른 것들은 변하지 않길 바라.
사이.
오리
불공평해.
붕어
맞아.
사이.
붕어
그러니까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해.
오리
또 문에 뛰어들었다가는 산산조각이 날 텐데. 그럼 난 평생 부서진 눈덩이로 지내야 하고.
붕어
다치라는 소리가 아니야, 바보야. 계획을 세우자는 거지.
오리
어떤—
발걸음 소리. 붕어, 황급히 포장지 속으로 들어간다. 문이 열린다. 눈부신 빛.
손1 (목소리)
이것 봐라.
손2 (목소리)
뭐 이런 생각을 다 했대?
손 1 (목소리)
두고두고 보려고. 엄청 귀엽지!
쿵, 문 닫히는 소리. 붕어, 다시 오리 옆으로 뛰어나온다.
붕어
이런 순간을 위한 계획.

3.

냉동고 거주민 회의. 모두가 붕어와 오리를 쳐다보고 있다.
붕어
자, 친구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친구를 돕기 위해서 모였어. (구석에 등지고 앉아 있는 틀을 보고는) 어디 보자… 한 자리가 비는 것 같은데. 한—자—리—가. (틀, 꿈쩍 앉는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우리 냉동고의 주인을 모시지 않을 수 없겠지? 모두 얼음틀에게 박수!
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돌아본다.
붕어
좋아. 자, 우리의 목적은 이 불쌍한 눈덩이 친구를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야. 그러려면 문이 열리는 타이밍을 놓쳐선 안 돼. 손은… 틀, 손이 하루에 문을 여는 횟수가 얼마나 되지?
내가 어떻게 알아.
붕어
주인이잖아!
(귀찮다는 표정으로) 많으면 하루에 두세 번. 적으면 이틀에 한 번 정도.
붕어
그럼 우리는 오늘부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이틀 동안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해. 손의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자기 자리로 가는 거야. 알겠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붕어, 냉장고 거주민 하나하나를 호명하며 위치를 배정해 준다. 오리, 슬그머니 뒤로 빠져 틀에게 다가간다.
오리
…고마워.
별로야, 이 계획. 손이 널 발견할 거야. 나가자마자 다시 들어오게 될 거라고.
오리
열심히 굴러야지, 뭐.
어떻게 잘 숨었다고 쳐. 그 다음엔 어쩌려고? 공원까지 가는 길은 알아? 너처럼 조그만 눈덩이가 어떻게 손의 발걸음을 따라잡으려고 해?
오리
공원까지 가지 못해도 괜찮아. 일단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돼. 그럼 녹을 수 있으니까.
오리
공원까지 가지 못해도 괜찮아. 일단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돼. 그럼 녹을 수 있으니까.
붕어
그리고… 꼬마만두들! 너희는 문이 열리는 순간 온 힘을 다해 봉투를 쓰러트려서—
오리
(머뭇거리다) 있지, 내가 빨리 녹으면 날씨가 그만큼 따뜻해졌다는 뜻이잖아.
소리
읍읍!
오리
……그럼 여름도 금방 올 거야.
틀, 한참 동안 대답 없다가,
응.
붕어
—시선을 분산시켜. 그때 틀이 나서 줘야 해. 우리 중에서 가장 단단한 몸집을 지녔으니까. 틀?
틀에게 쏠리는 시선.
……그래.
붕어
(활짝 웃으며) 완벽해! 그렇게 되면 우리 계획은—
오리, 틀에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다시 붕어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다.
홀로 앉아 있는 틀, 냉동고 문을 빤히 쳐다본다. 그때 틀의 시야에 작은 눈조각—이전에 떨어진 오리의 일부—이 들어온다.
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눈조각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그러다 자신의 얼음칸에 담아 본다.
든든한 기분을 느낀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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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김지우
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 번 들고 나가지도 못한 신발장 속 눈오리 집게를 가여워하고 있다. @iamalexa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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