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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 연대, 낯선 감각에 관한 이야기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총평

김민관

제214호

2022.02.24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 ‘다른 손의 희곡 쓰기’(이하 ‘다른 손’)가 지향하는 두 개념은, ‘타자성’이라는 키워드로 수렴한다. 49편의 희곡 중 남성중심주의와 같은 기존 체제를 비판하려는 시도1)도 일부 있는 반면, 대부분 인간 중심주의 같은 통념을 전도하려는 시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팬데믹이라는 전염병이 일상화된 작금의 상황이 반영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들은 대체로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고, 주로 로봇 혹은 인공 지능의 등장, 사물2)과 동식물3), 신체 부분을4) 의인화하는 설정 등 인간과 다른 존재를 현상하며 이를 통해 인간을 강력하게 타자화시키기도 하지만, 몇몇 작품은 자아의 분화5)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를 초점화하려는 언어의 실험처럼 독특한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어떤 유사성을 공유하는 작업 가운데 예외적인 작업 역시 존재한다. 동시에 그 모든 작업을 다루는 건 불가능하고 또 온당하지 않다. 자칫 아무것도 제대로 다룰 수 없을지 모른다.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어떤 공통의 범주들로 모이거나, 또 그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다른 손’의 몇몇 작업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인간의 곤경/경계를 겪어 봐

‘어느 날 내가 인류를 위한 영웅 곧 예외적인 존재로서 죽음을 불사해야 한다면’. 송재원의 「바깥의 호흡」은 이러한 가정을 구현한다. “호흡과 관련된 인공 지능” 개발에 착수해, “인간의 호흡과 관련된 모든 기능을 제어하는 시스템”을 완성했으나 “그 시스템의 핵심인 인공 지능”이 사라진 상황에서, 특별한 두 존재가 출현한다. 사라졌던 인공 지능 z-2와 인류에서 유일하게 산소마스크 없이 숨 쉴 수 있는 천태하가 그들로, 천태하는 생각을 차단당한 채 “숨쉬기에만 특화된 생명체” 창조를 위한 실험양으로 활용되고 있음이 둘의 대화 가운데 드러난다. 천태하의 상황은 일견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되어 있었다는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의 실존적 상황의 부조리는 역설적으로 타자화된 개체의 바깥을 현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체적 의지가 상실된, 한 개체의 반-영웅담은 인류 절멸의 시나리오의 한 가닥 희망이라기보다 철저히 이기적인 인류의 희망 없음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위해 도구화된 개체들이 나오는 작업, 그럼에도 자신의 기능적 목적성을 의심하는 몇 개의 작업과 비교해볼 수 있다. 박아영의 「D- (day+day)」는 ‘하루’로 명명된 하루살이들이 인간의 기억을 온전히 다른 개체로 옮겨줌으로써 그 기억을 보존할 수 있다는 3537년의 지구를 가정한다. “이미 너의 하루는 결정되었고, 시작되었어. 인간을 도와야 해. 기억을 전달하고, 기록해야 해. 그래야 또 다른 하루들이 생존할 이유가 생겨”. 하루살이는 인류의 방대한 역사 기록에 대한 은유이면서, 문명의 보존이라는 인류의 거대한 명목을 위한 희생양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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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한 하루살이의 끝없는 희생에서, 동물권을 다룬 몇 개의 작업 역시 떠올려 볼 수 있다. 구지수의 「훔쳐 온 손님」의 경우, 동물권 단체 DxE 코리아가 2019년 한 돼지 농가에서 구조한 돼지인 ‘새벽’을 모티브로, 종돈장에서 구조해 온 돼지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키우는 동명의 ‘새벽’이라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주희의 「마지막 미노타우로스」는 인간과 소의 어그러지는 대화를 통해, 무자비한 인간의 모습과 그럼에도 인간을 자연 속 생명의 연장선상에서 비폭력적으로 다루어 온 소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양은실의 「세계의 끝과 그곳을 떠나는 자들」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를 되새기게끔 한다. 주인공 ‘여자’에게 있어 어렸을 적 할머니의 시골집에서 키우던 개 ‘순돌이’가 병치레를 하던 삼촌을 위해 잡아먹혔던 일련의 체험과 사람을 반기던 순돌이에 대한 할머니의 기억은 양립하기 어렵다. 할머니는 순돌이를 키웠지만 그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 순돌이를 유인하기 위해 “이리 오련” 손짓을 하며 “순진한” 순돌이를 ‘기만’했던 것이다. “사람은 왜 사람일까. 개는 왜 개일까.” ‘여자’가 느끼는 두 존재의 근원적인 간극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해소할 수 없는 번민으로 연장된다.
홍기황의 「그것이 그것이 아닌 것은 이제 더 이상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비건이 일상화된 시대에 육식을 고집하는 예외적 존재의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조명한다. 2110년 “냉동인간에서 해동된” ‘정호’에게 “폐기를 앞둔” 로봇 ‘이레’는 말한다. “2030년, 배양육 상용화 이후,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를 주장하는 식품혁명이 일어났습니다. / 혁명 이후, 국제적으로 동물을 사육, 정육하는 시스템이 전면 금지되어 더 이상 생명을 고기로 팔 수 없습니다.” 빙하기에 가까워지며 집 바깥으로 외출을 삼가는 시대 상황은 조금 더 실재적인 차원에서 지구의 불가역적인 변화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지만, 기후 위기가 아니라 오로지 인류의 윤리적 선택에 따라 비거니즘이 상식으로 자리 잡은 미래는, 진보된 인류의 의식 너머, 현재 그러한 의식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존재에게는 참담함을 안기는 데 불과하다는 점에서 냉소주의적으로 현 인류를 진단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다시 「D- (day+day)」로 돌아오면, 하루살이가 인간을 위한 기억 장치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세뇌”는 결국 인간 자신을 위한 합리화의 다른 말이라는 점에서, 「바깥의 호흡」과 만나지만, ‘하루’는 현재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 대신에 바깥에 대한 기록의 자유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역사 이후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김은한의 「암약하는 삼면화」에서 ‘새겨지는 백지’의 말 역시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타자로서의 삶에 더해 긍정과 부정의 속성이 뒤섞인 인간 문명을 하나로 뭉뚱그린다는 점에서, 선연하게 역사의 대척점을 상정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기억할 수밖에 없다. 새겨진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으니. 이야기로 우릴 파괴한 슬픔을 잊지 않을 것이다. 백지를 유린하며 일구어낸 추악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우리 또한 갚아줄 것이다.” 기존의 역사가 아닌 다른 역사 쓰기, 역사 바깥의 현실을 다루는 건 “바깥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홍경진의 「Raison d'être(부제: 염소의 꿈)」에서 소금 결정 안의 ‘염소(CI)’의 말 역시 이 선택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서 벗어날 거야”, “이 결합을 끊고 나갈 거라고”.

박예지의 「갈라테이아는 행복하지」는 극작가 ‘영’과 로봇이었던 ‘일’의 대화로 구성되는데, “누군가의 부속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너 자체가 되는 거라고. 이게 축복이 아니면 대체 뭐야?”는 ‘영’이 ‘일’을 향해 한 말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영’은 ‘일’을 폐기 처분하는 대신 자신의 희곡으로 ‘일’을 초대한다. ‘일’은 인간을 위한 기능적 역할을 벗어나는 주체적 위상을 맡는 데 심히 못마땅해하며, 앞선 말에 대해 “그 자체가 너무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라고는 생각 안 해?”라고 반문한다. 로봇은 앞선 ‘하루’의 말처럼 보통의 임무를 맡는 데 안주함으로써 현실에서 불안정해지고 싶지 않아 한다. 반면 이 말을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려주자면, 인간주의의 한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우월한 지위에 대한 믿음을 반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기존의 모든 방면에서의 ‘PC함’의 매뉴얼을 숙지하고 이를 철저히 따르는 존재는 윤리적 주체로의 완성을 가리키는가’, ‘윤리는 혼자만의 고결함으로 충분한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 결국, 인간의 바깥은 어떤 명확한 진릿값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보다는 현실의 나의 조건을 의심하고 질문하며 바깥을 향하려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타자와의 연대가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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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타자와의 연대는 가능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이은용의 「가을 손님」은 자연스레 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유령’과 ‘사람’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유령의 태도는 한층 더 흥미롭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애도하는지 궁금해서 남들의 제사상을 떠돌고 있는 유령이에요. 오늘도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서 슬쩍 찾아왔어요.” 인간 중심주의의 반대편에서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는 다른 존재들의 등장과는 조금 다르게도 몇몇 작업은,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직접 질문한다.
서동민의 「혜수와 올퓌」는 들개 떼에 포위된 60대 여성 ‘혜수’와 휴머노이드 ‘올퓌’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누는 대화로 구성된다. “넌 미워한다고 하지만 거의 방전돼 가는 생면부지의 나를 차에 태워줬어. / 손녀한테 가는 데 쓸 소중한 전기를 매일 나눠줬어”. 올퓌는 혜수를 살리고자 차의 전선을 자신의 목덜미에 꽂아 자신의 남은 에너지를 차의 시동을 거는 데 투여한다. 홀로 된 혜수는 아마도 차를 몰고 들개 떼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손녀를 만나러 떠날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기 전 올퓌는 혜수에게 얼굴을 봐 달라고 애원한다. 올퓌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존재 조건을 뛰어넘는 사랑을 배웠어. 이젠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죽음을 기억되지 않음으로 정의하거나 -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면 죽음에는 의미가 발생한다 - 존재를 내어주는 행위를 사랑으로 비유하는 것처럼 올퓌는 인간이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를 믿고 실천하는 예외적인 존재이다.
곽지현의 「휴봇과의 비정상적인 관계.」에는 사람을 닮은 로봇(?)인 ‘휴봇’―‘제이’―과 휴봇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유설’이 나오는데, 휴봇의 시한부 인생은 유설에게 커다란 근심거리이다. 「혜수와 올퓌」에서처럼 기억의 죽음은 진정한 죽음을 의미한다. “너무 슬퍼. 휴봇인 너도 결국은 끝이 있다는 게. 우리가 둘 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대체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름을 붙여준 존재의 기억은 어떨까. 전서아의 「무루가 저기 있다」의 ‘미이’와 ‘시내’는 각각 지구인과 외계인으로, “지구가 보이는 행성”에서 오직 둘이서만 살아가고 있다. 우주선이 이따금 지나가며 다른 행성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도 이곳 자체를 떠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미이’는 평소 지구의 삶에서 “다리가 하나 없는 고양이”인 ‘무루’를 그리워하는데, 시간이 흐르고 혼자 남은 시내는 어느 날 우주선에서 내린 고양이를 마치 시내인 것처럼, 시내가 자신에게 또 ‘무루’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으로 대해 준다. 마지막으로 시내는 고양이의 이름을 고민한다. “어떻게 불러줄까. / 내 이름도 그 애가 지어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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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민의 「세면대 옆 세이렌」은 ‘선혜’와 ‘세희’의 대화로 구성된다. 선혜는 세희에게 산호를 주고 간 세이렌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주 깊은 바다”에 사는 세이렌은 인간의 환경 파괴로 인해 고통받는다. 선혜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던 세희는 어느덧 세이렌으로 변화하고 다시 세희의 모습―일상―으로 돌아온다. “늙은 선혜”와 그의 가사를 이따금 돕는 세희와의 편안한 대화처럼 선혜와 세이렌의 대화에도 이질감은 없다. 세이렌의 “너희가 헤쳐 놓은 것들로 인해 잠식당할 거”라는 말처럼 인간은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한다. 암울한 미래다. 반면 ‘세이렌이 주고 간’ 산호에는 세이렌의 존재가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존재―세희―에는 타자의 형상―세이렌―이 씌어 있다. 어쩌면 구원은 그렇게 이미 와 있는지 모른다. 세이렌의 “태어났으니까, 살아남는 것뿐이야”라는 권태로 점철된 것 같은 말은, 다시 한번 긍정의 문장으로 반복될 수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무대가 필요해

「암약하는 삼면화」는 연극 자체를 이야기하는 희곡이라는 점에서, 일정 정도 메타-연극의 양상을 띤다. 중요한 건 “어떤 것도 관객에게 감춰서는 안 되겠지, 지문조차도”라는 시작부터 마지막 나오는 ‘지문’(의 말)까지도 설명이나 배경 정보 정도에 그치지 않고 대사로서 구현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희곡의 무대화를 염두에 둔 설정이라기보다 희곡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그 자체로 발화하며 관람객에게 도달하는가를 시험한 것으로 보인다. 평소 ‘매머드머메이드’라는 1인 극단에서 작가와 배우를 겸하는 김은한에게 희곡 자체의 발표는 하나의 무대를 가설하는 것 아니었을까.

이한솔의 「BA선생」의 5장은 ‘내레이션’과 (작가의) ‘속마음’의 대화라는 분열되는 작가의 다중적 글쓰기 아래 “상상 속의 독자”를 구성하고 예상된 독자의 반응까지를 재현함으로 독자와 작가 사이의 경계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암약하는 삼면화」처럼 메타적으로 작품을 인지하게 한다. 5막은 ‘내레이션’의 “그해 우리 집에는 바퀴벌레가 들끓었다”라는 마지막 문장 뒤의 도돌이표에 이어 “4막의 삭제된 문장들”을 빨간색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사실 앞선 문장의 “불필요한” 부기이다.
‘내레이션’은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문장은 단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나의 떨쳐버리지 못한 미련처럼 쓸데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사이) 악보에 도돌이표가 있는 것처럼 글에도 도돌이표가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그 하나의 문장이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생성되는 문장들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이미 나온 하나의 문장을 위한 수많은 문장은 전자의 문장이 나온 경로를 보여주기 위한 실천적 수행이다. 이 문장은 그 자체로 실험을 위해 채택된 온전한 빨간색 표면으로 분한다. “읽기도 힘든 이 문장들을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다”. 내용은 더 이상 중요함을 잃는다. “무대에서 내레이션 역할의 배우가 올라가 입만 뻥긋뻥긋하게 될까? 입 모양을 보고 사람들이 사라진 맥락을 읽을 수 있도록?”. 5막은 어떻게 무대화될 수 있을까. 앞선 말과 달리, 무대에 오르며 빠져야 할 것 같은 무대 기술에 대한 (고민의) 부분까지도, 아마도 말들은 모두 고스란히 남아(서 스스로의 존재 의의로부터 분열되어)야 할 것이다.

강한나의 「극장no.005068jnj5b6」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VR 무대 버전으로 다시 쓴다. “알 수 없는 코드”가 무대에 개입하며, 극장은 “감염”되고, “고도가 우리를 복구시켜줄 거야!”(디디)처럼 알 수 없는 미래로부터 구원의 순간인, 등장하지 않을 “고도”가 등장하며 원작과의 싱크를 맞추게 된다. ‘디디’와 ‘고고’는 “실존했던 배우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든 일정한 정보 값에서 벗어나 자신과 환경을 성찰하는 특이성의 주체들이다. 가령 ‘고고’는 기술적 오류 발생의 가능성을 다분히 안고 있는 공연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의식을 갖춘 아이러니한 주체로 설정된다. 디디의 마지막 말은 데이터가 순수한 자기 물음을 가진 존재로 점프하는 특이점이 왔음을 보여준다. “일생 동안 늘 질문이 떠나질 않는 거야. 그럼 나는 그 배우인가, 그 배우의 데이터인가, 그 배우가 연기하는 디디인가, 그냥 디디인가, 디디의 데이터인가, 그 배우가 연기하는 디디의 데이터인가, 그 배우의 데이터가 연기하는 디디인가, 그 배우의 데이터가 연기하는 디디의 데이터인가……” 이러한 상황이 인간과의 관계 바깥에서 현상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가령 인공지능이 인간의 희곡들을 딥러닝으로 학습해서 탄생한 희곡은 ‘또 다른’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강한나(작가)이(가) 데이터백업 중입니다. (중략) 강한나(작가)을(를) 종료합니다.” 결말은 이 희곡을 데이터로 치환한다. 동시에 희곡 자체가 새로운 플랫폼에서 시간과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연극으로 재생되었음을 또는 재생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강한나는 “대면 공연이 사라지고 모든 공연이 언택트로 이루어지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가상의 미래”로 시간을 설정했지만, ‘다른 손’의 구현 방식처럼 희곡을 빙자한 연극은 끊임없이 웹상에서 충분히 실현되고 또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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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결의 「HEMNES」는 이케아의 특정 제품 시리즈인 ‘헴네스’를 뜻하는 제목을 제하고, 대부분 그 사물을 링크로 갈음한다. 또한 극에서 등장하는 특정 영상의 재생 부분 역시도. 굳이 제목과 그에 대한 묘사가 아닌, 링크를 클릭해 이미지가 나온 창이나 이미지 카테고리 창, 해당 이미지의 검색 결과, 또는 영상 등으로 직접 연결됨은, 하이퍼링크식 참조 체계를 본문의 언어 자체로 이전한 특이한 방식에 따른다―이는 때로 손실된 정보를 가진 링크로 연결되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는다. 링크 클릭 후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새 창을 지우거나(‘크롬’에서), 이전으로 가기 버튼을 눌러야 한다(‘사파리’나 ‘구글’에서). 곧 본문은 바깥으로의 이탈을 번번이 ‘수행’하도록 한다.
극은 세 번의 암전 이후, 가구에 불이 들어오며 반전된 장면을 노출한다. 처음에는 존재 간 애정 행각을, 다음은 가구와 존재의 뒤얽힌 관계를 조명하다가, 마지막으로 ‘가구3’이 사라지고 ‘가구5’가 자신의 불을 끄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여기에는 요섭의 TV에서 나오던, (링크를 따라 마주한)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진득한 애정 신이 암시를 주었었다. 실제 무대화 과정에서 가구로는 다섯 개의 이케아 특정 제품들이 등장해야 하며, ‘가구5’의 조명 제어 장치 역시 필요하며, 가구와 배우의 관계를 표현하는 특별한 움직임도 요청된다.

“기계 및 광물과 상호침투하는 배우의 몸 그리고 오컬티즘”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하는 김연재는, 「매립지에서」에서 세계에 대한 다른 감각, 비의적 세계의 기이한 감각을 소환한다. “원래 동상이었던 흔적이 남지 않도록” “동상을 최대한 잘게 쪼개는” 동상 해체공으로 시청에서 고용된 ‘해체공1’은, “철컹철컹 소리”를 내는 동상의 “텅 빈 손”에서 “이 세상에서 무언가가 영영 사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무대화하자면 비가시적인 것이면서 들리는 무엇을 다루는 매체가 주요한 매체로 부상해야 할 것이다) ‘사라진 빈 공간’은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 먼저 존재의 불가능성은 불가능성의 언어로 현상된다. 그리고 사실 이전에 존재했던 존재와 사건의 흔적은 ‘빈 공간’으로 끊임없는 주파수를 보내고 있다. “나는 이제 철을 통과한 모든 파동을 느낄 수 있게 된 거예요. 생각해 봐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모든 파동이 계속 남아서 공명하며 신호를 보낸다고 말이에요”(해체공2).
한편, 작품의 시작과 끝은 알 수 없는 부조리한 폐쇄적인 사회의 소통 체계에 대한 카프카의 우의를 상기시킨다. 동상에서 나는 소리에 대한 스트레스로 수십 차례 신청한 휴가는 끊임없이 반려되었고, 막다른 길에서 ‘해체공1’은 전기톱으로 자신의 몸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그의 몸을 무대에서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해체공1은 암벽등반에 쓰이는 잠금 고리인 카라비너와 대화를 한다. (역시 무대에서 구현될 몫으로 남겨지는) 단지 “카라비너의 소리”로만 표기되는 ‘카라비너’의 소리는 동상을 전기톱으로 벨 때 들리던 “쉭쉭거리고, 웅웅거리다가 금속성의 물체를 긁어내리듯이 규칙적으로 클클거리는 소리”일까. ‘시청 직원3’이 휴가 승인을 알릴 때 이미 손만 남은 상태인 해체공1은, 휴가 신청을 했을 당시가 지금은 기억에서도 완전히 멀어졌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임을 전한다. 휴가는 시청 직원3이 해체공1의 마침내 해체된 몸을 양동이에 주워 담는 것으로 대체된다.

다른 손을 맞잡으려는 노력

희곡은 연극의 이전으로 범주화된다. 반면 어떤 희곡은 아직 오지 않을 시간을 선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장 상연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무대가 구현하지 못하는 가능성을 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손’의 몇몇 작업은 이를 변환하기 위한 새로운 감각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우리는 다른 것들에 대한 더 많은 섬세한 주의와 앎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단순히 올바름을 따라야 하는 도덕주의적 강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몫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다른 존재를 존중하기 위해 그 존재의 언어를 들여다볼 필요도 있으며 조금 더 깊숙하게 천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도는 물론 타자와의 공명 효과를 내는 연대를 구성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관습을 깨고 나아가는 자유를 향한 변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다름‘들’ - 지향해야 할 가치를 지닌 다름이든 충분히 혐오할 만한 다름이든 - 을 가진 세계의 총체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노력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특별한 의의가 아니라 어떤 사회와 맞물리는 개체들의 조각 난 인지 구조를 다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사한 (또는 완전히 다른) 현재의 (반동적) 반복으로서의 미래 대신에 과거와 현재의 어떤 틈을 찾는 가운데 분명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미래에 대한 활발한 상상력은 현재의 궁핍한 현실로부터 연유한다. 하지만 현실의 변화 폭이 크다면 그 미래는 빠르게 소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다른’에 대한 강박은 현재를 지나치게 빠르게 기각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다른’을 거쳐 다시 돌아오면, 지난한 현실에서 미묘한 틈새를 찾는 것이 관건일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다른 감각과 다른 세계를 어떻게 옮길 수 있는지 역시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새로운 표현의 몫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손이 쓴 희곡을 옮기는 다른 연출의 방식과 기법은 어떤 것일까’. 또는 ‘그러한 무대를 꿈꾸(게 하)는 희곡은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곧 ‘다른 손’을 읽고 생겨 나는 여러 물음으로 끝을 맺는다.

  1. 곽시원의 「SHEEP 새끼」에는 남 ‘양1’과 여 ‘양2’이 등장하는데, 넘어지면서 양2에게 키스를 해버리게 되었다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양1의 ‘개드립’을 욕설과 유사 발음의 단어를 사용한 제목으로 명명―가차 없이 비판―한 작업이다. 작품에서는 양 간의 대화로 순화됐지만, 온갖 남성 혐오적 시선이 노출되고 있다. 김옥미의 「연극모독」 역시 배우로만 표기된 두 인물의 대립하는 대화로 진행된다. 먼저 1장은 성적 메타포를 다소 부주의하게 쓰는 배우와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주의를 시키려는 다른 배우의 밭은 대화로 구성된다. 2장은 미투 이후 달라진 연극 환경에 대해 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배우와 그 대척점에 있는 다른 배우의 대화로 이뤄지며, 3장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연극이 허물어졌음을 한탄하는 배우와 그 허물어짐을 긍정하며 새로운 가치의 탄생을 기대하는 다른 배우의 대화가 놓인다. ‘연극모독’이라는 제목은 여기서도 중의적이다. 관객을 직접 향해 모독의 기치를 높이는 방식의,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전유하면서, 두 다른 차원의 연극을 서로 모독하는 배우들의 대화를 통해, 미투 이후 대립하고 충돌하는 어지러운 당대의 가치관들을 반영한다. 김동국의 「리어왕 고쳐쓰기」는 『리어왕』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공연을 통해 내 명성, 내 위치를 지켜야 하는” ‘선생님’과 “고정된 남성 중심의 서사를 해체하고”자 하는 ‘제자’ 사이의 의견 대립을 극한으로 노출한다. 작품의 배경은 “미투운동 이전”으로 상정되는데, “공들여 쌓아 올린 연극의 위상을 모두 내려놓고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이 공연의 각색 방향은 그동안 폭력으로 쌓아 올린 공을 환원하자는 취지의 공연이다. 이 환원하는 공연으로 그들의 권위와 위계, 폭력으로 세운 공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잘못을 뉘우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제자의 마지막 말은, 미투 이전 기존 연극의 터전과 인식을 말소하고 지금부터 새로운 연극이 쓰여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인용의 경우, 언급한 각각의 희곡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에 관해서는 이후 본문을 포함해 따로 주석을 달지는 않는다.
  2. 김영빛의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다른 손」에서는 “의류수거함에 갖다 버린” 줄 알았던 ‘왕곰인형’이 살아서 돌아오는데, 이는 사실 외계인이었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이어 인형의 외양을 한 외계인 ‘왕곰’과 인형과 생명체 사이의 커다란 괴리감에서 벗어나고픈 ‘주인’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는 ‘어느 날 인형이 말을 한다면.’이란 가정에 ‘그런데 그것이 외계인’이라는 다른 하나의 가정이 부가적으로 놓이는 것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외계인은 우리가 익히 아는 괴상한 외모에 외계어를 사용하며 인간보다 발전된 기술 문명을 지닌 존재가 아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극단적으로 현실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에 사로잡힌 일종의 도피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갑작스럽게 달라진 환경을 맞닥뜨리며 생겨난 질문, 어쩌면 ‘이주와 정주’ 같은 개념에 해당할 왕곰의 말은 조금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존재를 기입하며 앞선 존재의 심리를 해명한다. “나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구에서 사라지지 못하고 오래 머물게 되면, 지구가 원래 살던 곳처럼 편안해질까요? 여기서 다시 살면 나도 지구인이 되는 걸까요?” 곧 현실과 나의 괴리감은 존재의 실존적 양상으로 환원된다. 여기서 ‘왕곰’이란 존재는 일종의 사고 실험 속에 ‘주인’의 자아의 거울 같은 것 아닐까.
    박찬규의 「THE TEN」에는 ‘프레스토’, ‘맥스90’, ‘포스원’, ‘블레이저’라는 네 개의 브랜드 신발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주인 ‘태호’가 감별사에게서 자기 중에 “가품”(“짭”)이 있다는 말을 들었음을 안 이후에 버려질까 안달하며, 서로의 출신 성분을 의심하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상대와 ‘구별짓기’ 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지우의 「프리저 브레이크(Freezer Break)」에는 ‘(눈)오리’, ‘붕어(싸만코)’, ‘(얼음)틀’의 냉동실 속 한시적인 동거를 그린다. 먼저 온 순서대로 “신분”을 구분 짓던 ‘틀’과 그에 저항하던 ‘붕어’는 ‘오리’를 그가 원하는 대로 냉장고 바깥,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 주고자 한다.
  3. 김서현의 「감각손식물」은 식물의 특이한 변신을 그린다. 두 개의 화분 ‘티티’와 ‘덴’은 “손 성형”을 통해 핸드폰을 손으로 들고 다니는 게발선인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후 두 존재 역시 그처럼 차례차례 변해간다.
  4. 송천영의 「몸」에 등장하는 ‘단발’과 ‘수염’은 “목 아래로는 절단된” 채 “머리만 있다”. 의인화는 그 이름에만 해당한다. 두 존재는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생충이 머리로 퍼지면 죽는다”라는 말에 “몸통을 자르고 심장만 달린 채” 살고 있다. 그리고 재생수에 의해 “당신의 몸은 반드시 재생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믿으며 기약 없는 구원을 기다린다.
  5. 하채린의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이름 없는 배우 한 명만 등장한다. “7년이면 몸의 세포가 전부 바뀌어 버린다는” 전제 아래, 현재의 ‘나’가 있기 위해 이전의 나였던 ‘너’가 희생했음을 반성하며 괴로워한다. 여기서 ‘너’는 물론 내가 망각하거나 나아가 인지하지 못한 타자의 여러 형상을 상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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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관

김민관 아트신 편집장
아트신(www.artscene.co.kr) 편집장. 예술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다양한 예술 관련한 아카이브에 관심을 두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탐문과 함께 비평적 관점으로 동시대 예술의 계보를 재구성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최근에는 비평, 기획, 창작의 교환과 매개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작업을 병행 중이다. 퍼포먼스 관련 서적의 편집에 다수 참여한 바 있으며, 저서로 『퍼포먼스아트의 다층적 시선』(201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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