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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 썼다면 순조로웠을지도

쓰는 동안

김은한

제215호

2022.03.24

2022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모집이 진행되는 사이, 다양한 창작자들이 각자의 희곡 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쓰는 동안]에서는 쓰기와 읽기의 내밀한 습관, 생활에서도 작가로 있는 방법, 쓰기를 위한 습관과 리추얼, 자칫 낭만적으로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진정성을 다루는 법,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쓰는 동안’ 극작가의 머릿속, 머리 밖, 주변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번 기회로 자신을 살펴봅니다. 언뜻언뜻 떠오른 단어나 문장이 29개 나왔어요. 이들을 문장으로 엮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볍게 하려고 합니다. 규칙은 두 개. 어떤 단어나 문장이었는지 들키지 않기, 처음 써 내려간 순서를 바꾸지 않기. 무언가 만들고 싶을 때 그걸 함께 만들어갈 어떤 강박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규칙을 세우고 실행한다. 이런 게임 같은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해보고 있어요. 너무 자유로우면 가닥을 잡기가 힘들더라고요.
희곡을 쓸 때는 한눈을 많이 팝니다. 결말까지 선명히 떠오른 경우에도 바로 가지 않으려고 해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끼면 계속 가봅니다. 모르는 말이 나올 때까지 가보는 게 즐거움입니다. ‘이제 그만 뭔가 나타나 주지 않을래?’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씁니다. 주제 의식은 그때쯤 등장하곤 합니다. 이제껏 장막을 쓰지 않았어요. 올해 상반기까지 장막 희곡을 한 편 완성하기로 친구와 약속했습니다. 아직 제목만이 마음속에서 숙성되고 있습니다.
지원사업이나 공모전에서 한 건 해내고 싶다는 마음에서 벗어난다면 아주 짧아도 ‘장막 희곡’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장짜리 연극, 한 장짜리 희곡을 언젠가 만들고 싶습니다. 일본의 단가는 31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시간은 즐거이 음미하며 놀 수 있다고 해요. 이건 시라는 장르의 특성이겠지만 희곡 또한 그럴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책이 예로부터의 VR 체험기구였듯이 머릿속에서 연극이 상연되는 거죠. 말이 아니어도 뉘앙스를 충분히 즐길 수 있으면 어떨까. 작가는 공감각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요즘은 인터넷 단어 맞추기 게임 워들(wordle)을 하면서 간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있어요. 매일 다른 다섯 글자 영어단어를 맞추어야 하는데, 맞추려고 시도한 흔적이 하나의 그림으로 남아요. 네모네모로직처럼요. 유치하더라도 무언가 내놓아보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희곡을 쓰며 살아가겠노라 마음먹기 전에, 즐겁게 쓰는 구석을 많이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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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조합이지만 어쩐지 사랑스러운 걸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소재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극작과 실연을 같이 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가능한 극작법을 고민하기도 하고요. 관객이 작가가 되어 설정과 대사를 제시하는 작품을 만든 적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과 ‘희곡’을 갖고 있다는 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작품만큼의 희곡을 갖고 있습니다.
주로 쓰는 것은 코미디입니다. 이제까지는 수줍어서 ‘연극이지만 웃긴 구석도 있어요’라는 태도로 작품을 만들었어요. 앞으로는 진지하게 웃게 만드는 데 집중하는 희곡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난 2년 동안은 ‘코미디 캠프’, ‘333희극희큭낭독극장’ 등 코미디 극작을 하는 기획에서 불러주신 덕분에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극작가는 묘하게 자신감이 붙지 않는 직군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시려나요. 자신감이 충분한 분께서는 따뜻한 조언을 부탁드려요.
극작가는 언제나 작품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개 좋은 팀을 만나거나 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야 제작을 할 수 있으니 서랍에 잠든 작품도 여럿. 그러고 보니 2020년부터 ‘매머머메 럭키박스 주주총회’라는 기획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한 해에 만들다 만 희곡, 탈락한 희곡은 그때 소비하고 있어요. 20분 분량의 신작도 한 편씩 낭독하고 있는데 의외로 반응이 뜨거운 편이라 기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입니다. 주로 연극에 관한 연극이에요. 연극인들만 즐거워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연극in에 쓴 다른 리뷰에서도 종종 했는데요, 관심이 있으시다면 찾아보세요) 주로 누군가가 연극을 그만둔 미래를, 혹은 내가 연극을 그만둔 미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시리즈 기획입니다. <연극 연극 모듬>(가제)이란 이름으로 공연하고 싶어서 모아두고 있습니다. 주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척하는 작품을 많이 쓰다 보니 지금도 자연스럽게 독자를 의식하고 있지요.
최근에 쓴 작품은 「염가 아우스벨렌」이라는 20분 희곡입니다. 어떤 영상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쓴 작품이에요. 비트코인처럼 연극을 채굴하는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썼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기회 되는 대로 만들어봅니다. 지금 한국에서 연극을 하는 환경을 생각해볼 때, 묵혀두었다가 나중에 여력이 되면 공연하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희박한 세계니까요. 덕분에 항상 거칠고 조금 신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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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시래기처럼, 아이디어도 가능한 한 그늘진 곳에서 잘 말리며 맛있어지기를 기다린다.

꿈을 기록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 가장 유효한 건 쓰기가 아니라 말하기(녹음하기)라고 해요. 전개가 막히면 한두 시간 혼잣말합니다. 긴 독백 등은 대체로 그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샤워하면서 흥얼거린 멜로디가 의외로 좋은 것처럼요. ‘지금 이게 왜 공연되어야 하는가’는 고려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분명한 입장은 있습니다. 나름대로 재미있게 만들되, 가능한 다양한 관객이 즐겁게 볼 수 있는 형태로 걷어내거나 덧대거나 합니다.
지금은 너무 유명한 방식이지만 작품을 만들 때 만다라트(만다라차트)를 쓰기도 했어요. 극작을 시작하기 전 방향을 가다듬을 때 한 번씩 점검하곤 했습니다. 언제나 제목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제목을 중앙에 적어두고 더듬더듬 생각의 폭을 넓혀봅니다. 최근에는 「제리 플릿의 모험」, 「멀리서 응원하고 극장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적어두었습니다.
작업은 집에서 데스크톱으로만 하고 있어요. 종종 고양이가 많이 지내는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집에 와 몰아서 정리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밖에서 기획을 꾸릴 때는 수첩을 사용하고 아이디어나 대사를 적어둘 때는 스마트폰 메모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하나 만든다고 마음먹으면 우선 타임테이블부터 정해요. 어떤 이야기에 몇 분 정도 쓸지를 결정하면서 틀을 잡아요. 시간으로 잘라서 밀도를 만들려고 하는 편입니다.
올해 간신히 다양한 배우와 함께 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작년에 강화도 풍물시장에서 재미로 사주를 보았는데요. 혼자 일하지 말고 많은 사람과 함께 하면 성공할 거라고 말씀해주셨어요. 하반신 건강을 유지한다면 92세까지 살지도 모른다는 조언도 함께. 한국의 공연 제작 환경이 어서 빨리 안전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배우를 상정하며 맞춤식 대사를 쓰는 아테가키(当て書)도 시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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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풍물시장에서 만난 도사님. 전기수처럼 독특한 리듬으로 말씀하셔서 인상 깊었다.

이상적인 작업 페이스는 ‘발표할 만큼만’ 만드는 것입니다. 향후 2년 정도의 작업적인 비전을 설정한다.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 관객을 생각하고 필요한 만큼만 만든다. 신선하게 머리에서 갓 짜낸 희곡을 전한다. 세상에 좀처럼 없기에 만든다. 혹은 달리 말하고 싶기에 만든다. 강박적인 규칙에 매몰되지만 어떤 양식에 매몰되지는 않으면서. 연초에 너무 많은 절망적인 생각에 잠기고 연말에는 정산에 머리가 쏠리는 굴곡을 줄여보고 싶어요.
일본의 공연예술인 코바야시 켄타로는 자신의 희곡이 관객에게 ‘고급시계나 아름다운 자동차처럼’ 느껴지길 원하고 스스로 그런 장인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최근에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말입니다.
2019년부터 ‘연극은 몸에 좋다’는 표어를 마음에 두고 작업하고 있는데요. 아직은 영 좋지 않지만 조금만 더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새해가 되면 ‘이걸 왜 해야 하나?’, ‘왜 하고 있나?’,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따위를 생각하는 것도 싫어져서 – 물론 그 어떤 누구도 시키지 않았습니다만 – 정확한 욕망을 살피고 있어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심술궂은 감정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요. 한국어로 딱 옮길 수 없지만 찾아보시면 어쩐지 감이 잡히실 거에요. 이런 감정도 단어로 표현할 수 있구나! 생각하니 즐거웠습니다. 아마 희곡을 쓰는 제 마음도 제 생각보다는 좀 더 복잡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희적이고 회피적이고 종종 심술궂기도, 드물게 사랑스럽기도 한 어떤 감정. 방금 찾아보니 ‘쌤통’이라고 번역한다네요. 재미있고 조금 귀엽다. 칙칙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잘 옮겨보고 싶습니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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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김은한
매머드머메이드 명의로 2015년부터 매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신작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쉽고 즐거워서 나도 당장 하고 싶은 작고 좋은 연극을 추구합니다.

2023년 남은 계획

8~9월 스튜디오 나나다시와 <스탠드업 씨어터> 진행 중
10월 신작 구상 중
12월 지금 아카이브와 코미디 캠프를 궁리 중

정보/문의 인스타그램 @mammothmer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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