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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김풍년

제215호

2022.03.24

2022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모집이 진행되는 사이, 다양한 창작자들이 각자의 희곡 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쓰는 동안]에서는 쓰기와 읽기의 내밀한 습관, 생활에서도 작가로 있는 방법, 쓰기를 위한 습관과 리추얼, 자칫 낭만적으로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진정성을 다루는 법,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진득하며 손끝이 매운 엄마는 당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모든 것을 ‘개갈 안난다’며 마땅찮아 하셨다. 젓가락 짝이 맞지 않아도 개갈 안나고, 지퍼를 끝까지 올리지 않아도 개갈 안나고, 칠칠에 사십육이라 외워도 개갈 안나는 거다. 그렇다고 부정의 의미로만 쓰지는 않는다. 이빨에 김을 붙이고 영구 흉내를 내도 개갈 안난다며 배꼽을 잡았고, 하루 더 자고 갈 줄 알았는데 기어코 막차를 타겠대도 개갈 안난다며 아쉬워하신다. 구순이 넘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개갈 안난다며 슬퍼하셨다.

정신없고, 일머리는 더더욱 없는 아부지는 개갈 안나는 냥반이셨다. 서쪽에서 해돋이를, 동쪽에서 해넘이 기다리는 느낌.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개갈 안나는 건 아니었다. 틈만 나면 우리에게 한자를 가르쳐주셨다. 의례 한자를 배울라치면 一, 二, 三, 四 숫자부터 시작하는데 우리는 첫날부터 忠南(충남), 天安郡(천안군), 聖居邑(성거읍), 新月里(신월리), 二區(2구), 四零七~十五(407-15) 꽤 난이도 있는 한자를 접했다. 열여덟 개의 단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稷山(직산)’. 농사 직(稷)에 뫼 산(山)자는 ‘身土不二’를 부르고, 신토불이는 ‘臨戰無退’를, 임전무퇴는 물러남(退) 없이(無) 한자의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성(聖)스러운 기운이 머무(居)는 가운데, 새로운(新) 달(月)이 떠오르려는 四零七~十五번지 서쪽 창으로 석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아부지의 상기된 광대뼈를 비추는데 ‘불도 안 켜고 뭔 개갈 안나는 짓이냐!’는 엄마의 일갈에 장면은 사정없이 컷아웃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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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둬야 하나?> Ⓒpoongnyun
첫 연습실 리허설 후, 한숨과 후회뿐이다. 까맣게 속을 태우고 나면, 잿더미 속에서 작은 불씨가 조용히 말을 건넨다. ‘괘얀아, 처음이잖아.’

농사 稷에 뫼 山이면 자식 개갈 안나기 십상이라며 엄마는 다달이 현금을 쥘 수 있는 공장에 나갔고 우리를 주산학원에 보냈다. 오빠는 매달 새로운 문제집으로 갈아타면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풀어드렸지만 나는 개갈 안났다. 주산만 배운다면 무엇인들 못 하랴. 문제는 판촉행사로 진행되는 [토요소림사비디오무료상영회]에 있었다. 시골 학교는 술렁였다. 운동장에 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악을 쓰던 아이들은 토요일만 되면 순한 양이 되어 십사 인치 흑백 브라운관 티브이 앞에 자신의 심장을 고스란히 바쳤다. 나도 처음에는 호기롭게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느닷없는 갈등과 반전, 역경과 배신은 내 심장에 첩 막대기를 끼어 사정없이 쥐어짰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소림사비디오는 일주일 내내 나를 쫓아다녔다. 개갈 안나는 이유로 소림사에 맡겨진 개갈 안나는 아이는 개갈 안나는 상황에 처하고 개갈 안나는 주막에서 개갈 안나는 스승을 만난다. 개갈 안나는 꼬임에 빠지지만 개갈 안나는 권법으로 개갈 안나는 위기를 극복하고 개갈 안나는 석양으로 사라지기까지, 수많은 장면 중 어떤 장면이 언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식탁이 두 동강 날 정도로 패대기쳐질 텐데 어찌하여 소란에 말려드는가. 육수나 질질 흘리며 닭백숙이나 뜯을 일이지 어찌하여 주정뱅이를 사부로 모시는가, 어찌하여 갈(葛)나무에 엉키고, 등(藤)나무에 설키냔 말이다. 이 통제 불가능한,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개갈 안나는 소림사비디오는 나를 점점 더 개갈 안나게 만들었다.

토요일은 금세 돌아왔다. 소림사비디오 한편을 끝까지 못 보는 아이는 커서도 개갈 안난다는 엄마의 말씀. 누구는 안 보고 싶어서 안 보나. 오늘은 보리라. 보란 듯이 꼭 보리라. 허나 어김없이 주인공 녀석이 개갈 안나는 짓을 시작한다. 나는 소굴에서 빠져나와 논두렁으로 들어선다. 숨통이 트인다. 찬 공기가 반갑다. 누구와 마주쳐서는 안 된다. 비디오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왔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바둑판처럼 펼쳐진 논길을 되도록 천천히, 되도록 크게 휘돌아야 한다. 서리 맞은 볏단아, 말 물어보자. 마른 콩대야, 목 꺾인 해당화야, 내 노래 들어보아라.

이젠 끝났겠다 싶어 집으로 향한다. 오늘도 개갈 안나게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빈집이 히죽댄다. 알싸한 연탄가스, 먼지 앉은 찐 고구마, 아랫목에 깔아 놓은 앙고라 이불, 이 순간 나는 서럽다. 목이 멘다. 항아리에서 차갑게 익어가는 열무김치를 바가지 가득 퍼온다. 소림사비디오, 너를 아그작 바그작 씹어 주리라. 뻘건 김치 물이 배거나 말거나 질질 흘리리라.

서쪽 창으로 석양이 스미고 열무 씹는 소리가 잦아들 즈음, 아부지가 써 놓은 한자가 먼지처럼 떠돈다. 충성할 忠, 남쪽 南, 하늘 天, 편안할 安, 고을 郡, 성스러울 聖, 거할 居, 고을 邑, 四零七~十五. 충성할 忠과 성스러울 聖은 윗목에 서 있어. 고을 郡과 고을 邑, 거할 居는 아랫목으로. 하늘 天과 달 月은 화장대 앞에. 새로운 新, 어디 있지? 숨어도 다 보여. 개갈 안나. 충성할 忠과 거할 居, 앞으로 나와. 대결이다. 맞절. 시작! 하늘 天과 四零七~十五는 지붕 위로 올라가. 거기서 붙을 거야. 하늘 天, 방심하지 마. 四零七~十五는 당랑권의 고수라고. 성스러울 聖과 달 月, 자개 화장대가 마음에 들어? 콜드크림을 듬뿍 발라도 좋아. 곱게 키운 외동딸, 달 月. 아비의 원한을 갚기 위해 무예를 갈고 닦았지. 성스러울 聖은 젖먹이 때부터 그녀를 길러 준 유모이자 스승이지. 충성할 忠에게 여러 번 고백을 받았지만 달 月에 대한 신의를 끝내 저버리지 않았어. 고을 郡과 편안할 安, 계속 붙어 있군. 너희들만 편하겠다? 세상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편안할 安, 다리 꼬지 마. ㄑ과ノ이 꼬여 있잖아! 고을 邑? 네가 이토록 반듯한 아이인 줄 몰랐어. 울타리(口)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형상(卩)이니 누구든 드나들어 고을을 이룬다는 아부지의 말씀을 이제야 알아먹겠군.

완전한 글자끼리 조합은 어쩐지 아쉬워. 한자마다 부수와 나머지 자를 떼어 놓고 재배치해야겠어. 분신합체술. 하늘 天과 언덕 阝(부) 앞으로 나와. 합체! ‘天阝’ 언덕배기에 하늘이라. 장항선 통일호가 멀어지는 하늘 언저리? 좋아, 마음에 들어! 다음. 충성할 忠. 가운데 中을 떠받치는 마음 心을 뺄게. 분신! 거기에 귀 耳, 합체! ‘中耳’ 귀 가운데 있다? 보청기네. 세기보청기. 열 十이 주저앉아 다리를 쭉 뻗으면 일곱 七. 팔 벌리고 징징거리는 꼴이 영락없는 미운 일곱 살이군. 쉿! 십육 획 거북 龜(구)를 조심해. 그 녀석은 온몸이 하나의 부수라 더 이상 쪼갤 수 없어. 그 순간 쪼개지는 건 엄마의 목소리 뿐. ‘불도 안 켜고 뭔 개갈 안나는 짓이냐!’

여전히 나는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지 못한다. 갈등과 반전, 역경과 배신을 견디지 못하면서 극작을 하겠다니 참으로 개갈 안난다. 어쩌랴. 어차피 개갈 안날 바에는 제대로 개갈 안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자다 봉창 두들기는, 무릎을긁었는데겨드랑이가따끔한, 그런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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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가 되세요> Ⓒ박태준
장면을 알고 있으면서 매번 운다.
‘극작가가 되세요. 내 글에 내가 취합니다.’

고입연합고사 가정 시험에 싱크대의 배치 문제가 자주 나왔다. [준비대→개수대→조리대→가열대→배선대] 우리 집은 연탄 아궁이나 곤로에서 조리를 했고, 설거지는 상 채로 들고 나가 뒤란에서 했기 때문에 아무리 외워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내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가정 선생님은 얌전하고 존재감이 약한 분이셨다. 어떻게든 학생들 머릿속에 이 순서를 넣어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하루는 숨겼던 발톱을 드러내셨다.

‘넘태핑양 한구석탱이 지도에도 읎는 슴,
에메랄드빛 바다 우로 석양이 뽈갛게 넘어가넌디,
하이얀 파도가 무참히 부서져부러.
나 혼차 모래밭을 거닐자니 외로움이 겁나게 사무치네이.
얼래, 발끝에 걸리는 게 뭣이다냐?
준 개(주운 것이) 조가배(조가비)’

돌이켜 보면 준개조가배는 상급학교 진학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지식이 아니다. 여태껏 집을 구하면서 준개조가배로 배치되었는지 물어본 적 없다. 하지만 아직도 그날의 교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친구들은 책상을 두들기며 뒤로 넘어갔지만 나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서서서서언새앵니이님~!
다다다당신은 무림의 고수? 싸싸싸싸부로 모시겠나이다.
부디 하하하한 수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날 밤 꿈속에서 가정 선생님은 개그맨 김정렬 아저씨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준개조가배는 개갈 안나는 자에게만 보이느니라.
숭구리당당 숭당당 수구수리당당 숭당당”

[사진: Ⓒpoongnyun Ⓒ박태준]

  1. 글을 쓰다 막히면 독일어 정관사를 외워보라. 부정관사까지 외우면 어휴, 봇물 터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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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년

김풍년
고른치아 잡티피부 매력넘치네
카톡안와 문자안와 전환더안와
자동판매 밀크커피 도대체몇잔
짜장면은 소화못해 나이못속여
솔찬이랑 솔솔이랑 잔나비떼창
핫뜨거운 여름가고 볼품없지만
지금까지 읽어주니 메르시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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