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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둘기의 미처 해독되지 않은 구구에 관하여

쓰는 동안

신해연

제216호

2022.04.14

2022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모집이 진행되는 사이, 다양한 창작자들이 각자의 희곡 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쓰는 동안]에서는 쓰기와 읽기의 내밀한 습관, 생활에서도 작가로 있는 방법, 쓰기를 위한 습관과 리추얼, 자칫 낭만적으로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진정성을 다루는 법,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비둘깁니다. 이 도시에 사는 비둘기1). 저는 구구- 하고 웁니다. 여러 가지 디테일의 구구가 있으나 당신에겐 그저 별 의미 없는 구구일 뿐이겠죠. 저는 어쨌거나 희곡을 쓰고 연극을 만드는 일을 하는 비둘깁니다. 이게 졸업 이후 내내 해온 저의 ‘일’이었어요. 대학 교육까지 받은 제가 어떻게 도시의 비둘기가 됐는지, 물론 안 궁금하시겠지만 이번 기회를 빌려 말해보자면, 보고야 말았거든요. 역시나 대학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어느 날, 거리에 걸린 현수막 하나를.
현수막 속에는 이러한 문구가 써져 있었어요. ‘비둘기가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먹이를 주지 맙시다.’ 그 사이에는 생략된 문장이 있는데 괄호 열고, 비둘기로 인하여 누군가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괄호 닫고는 없었어요. 괄호를 열었으면 다시 괄호를 닫아줘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현수막을 보다가, 깨닫고야 말았어요. 맞아요, 제가 바로 이 도시의 비둘기였던 거예요. 비싼 등록금을 내고, 계절 학기까지 챙겨 들으며 겨우 겨우 졸업을 하고 죽어라 글을 써서, 각종 지원 사업을 돌고 돌고 돌다가 마침내 비둘기가 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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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누군가라, 떠오르는 얼굴이 없지는 않았어요. 원래 예술 하는 비둘기들이란 자고로 성공 전까지는 가족들의 근심거리 아니겠어요? 얼마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근엄한 얼굴로 ‘너 니 애비 나이는 아냐? 낼 모레면 칠순이다’라는 말로 넌지시 저의 직업적 전망에 대한 우려를 건넬 때, ‘내 말이. 그러니까 아빠도 할 수 있어. 윤여정 선생님 봤지? 잊지 마. 아빤 우리 집안의 기둥이야’라는 응원을 건넸었거든요. 물론 저도 처음엔 나의 글이 세상을 구하진 못하더라도, 나 자신 정돈 구해줄 줄 알았죠. 진심으로. 그래서 졸업 후엔 매년 다니지도 않는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정말 정말 좋은 글을 쓰게 해주세요. 정말 정말 좋은 글을 쓸 수만 있다면 발가락 하나쯤은 없어도 돼요. 바라는 거라곤, 그것뿐이에요. 간절함은 해가 갈수록 커져서, 그다음엔 발가락 두 개를, 또 그다음에는 세 개를, 그러니까 계속 아무도 원하지 않은 발가락을 걸어 대면서 정말 정말 진짜 정말로 좋은 글을 쓰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발가락은 그대로 있고, 뭐,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비둘기로 인해 괴로워하는 누군가가 비단 가족만은 아닐 거예요. 매번 밥 사주고 술 사주는 내 친구들만도 아니고요. 작가 비둘기의 책상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구우우는 공연 팀을 만나 지금 여기, 그들만의 구구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칩니다. 거치는데, 거치면서, 빈번히 사람을 잃거나, 정신을 잃습니다. 가끔은 사실 나의 글이란 나 자신의 구원자이기보다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아무개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쓰면 쓸수록 모두가 곤란해지는 기분이랄까. 종종 죄송해하고, 주로 눈치를 보며. 이상하네요. 책상에서 쓸 때는 이 글이 나와 이 세계를 구할 것이 분명했거든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구구였다고요. 어떤 누군가는 연극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또 사람을 얻는다던데, 물론 저는 아니었던 거죠. 이쯤 되면 심각하게 이것이 나의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해요. 생각하다가, 또 그만 생각을 해버리고 말아요. 다음 이야기 말이에요. 아, 이것이야말로 지긋지긋한 비둘기의 귀소본능일까요. 아니 왜? 너 또 이상한 이야기를 쓰다가 곤란해지고 싶냐? 하지만 다시 울어대기 시작해요. 내 안의 비둘기는 아주 끈질겨요. 어쩌면 이 이야기라면, 배우는 사랑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작가님, 이것이야말로 제가 한평생 기다려온 바로 그 인물입니다, 라는 열렬한 고백을 하고 연출은 당장 다음 작품도 함께 하자는 약속을 받기 위해 손가락을 내밀고, 또 무대와 조명과 의상과 소품과 음악과 그 모든 연극을 이루는 각계의 전문가들 역시 너도나도 함께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야 말 바로 그 이야기. 그건 늘 지금 내가 하는 공연은 아니에요. 하지만, 다음에는 꼭 그럴 것만 같거든요. 과대망상인가요? 하지만 이런 과대망상도 없다면 뭐 하러 혼자 세상을 짊어진 듯 쪼그라든 등으로 밤이고 낮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겠어요.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인데 말이에요.
그럼 이쯤 되면 비둘기로 인해 괴로워할 사람은 다 언급했을까요? 사실 아직도 남았어요. 마지막으로, 당신. 이 글을 읽는 당신 말이에요. 우리 만난 적이 있겠죠. 아마도 있을 거예요. 난 당신의 얼굴은 모르지만, 당신의 뒤통수만은 너무나 잘 알거든요. 얼마 전, 근 일 년간의 프로젝트 마무리로 올라간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암전 후에 펼쳐질 또 다른 세계를 기다리면서. 내가 저렇게 썼구나 싶고, 아니 내가 저렇게 썼던가 싶은 것들 사이에, 있더라고요. 작가인 내가 쓰지 않았던 것이. 나와 무대 사이에, 당신의 뒤통수. 맞아요, 그건 내가 쓴 게 아니에요. 하지만 버젓이 거기 있죠. 배우긴 했어요, 연극을 이루는 3요소 같은 거. 하지만 책상 앞에서 나는 당신에 대해 까맣게 잊습니다. 거기에선 오로지 이야기와 나뿐이에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받게 될 사랑과 미움 같은 건 책상 앞의 비둘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쓸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당신의 뒤통수 따윈 안중에 없다는 듯 신나게 써 내려갈 땐 언제고, 막상 극장의 객석에 앉으면 나는 자꾸만 당신의 뒤통수를 훔쳐보는 거예요. 나에겐 다년간의 뒤통수 훔쳐보기 스킬이 있어서 이제 웬만한 시그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는데 때로 뒤통수는 서서히 객석 바닥을 향해 저물어가는 해처럼 스르륵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연신 고개를 좌우로 스트레칭하면서 온몸으로 관극의 피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끔 뒤통수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프로그램북을 미친 듯이 넘기며 무대와 프로그램북을 번갈아 비교 분석을 한다면, 그건 당연히 전혀 좋은 신호는 아니겠죠. 당신은 무얼 기대했을까요. 또 나는 무얼 기대한 걸까요. 지금이라도 저 뒤통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면. 무서운 기분이에요. 나는 여기 있고, 이야기는 저기 있으며, 그사이에 내가 모르는 뒤통수가 있다니. 저는 그저 그 뒤통수에 대고 구구 하고 말을 걸 뿐이에요. 아마 영원히- 그 표정을 알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것이 우리의 방향성이죠.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네요. 잠깐, 근데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이쯤 되면 내가 왜 저 현수막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됐는지 설명이 됐을까요. 누군가를 괴롭게 하는 비둘기인 나에게, 이제 더 이상 먹이를 주지 말라고, 그들은 말하네요. 맞아요,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저도 되고 싶어요. 다시 한번, 얼마든지 발가락을 걸 수 있다고요. 어떤 비둘기는 그러더군요. 지원에 기대어 하는 작업은, 진짜 일이 아니라고.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되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구구 하고 울어 대는 거냐고, 차라리 다른 종으로의 재취업을 노려보면 어떠냐고, 조언해주고 싶을지도 몰라요. 저도 이미 여러 번 생각해봤죠.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일련의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뒤, 다시, 또, 비둘기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요. 와우. 대체 왜? 무엇이 비둘기를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걸까요? 이것이야말로 비둘기 된 자의 숙명이려나. 그래서 도망갔어요. 하나의 작업이 끝나고 나면 떠나는 거예요. 최대한 멀리. 날지 못하는 비둘기는 루프트한자를 타고 떠났습니다. 낯선 도시, 낯선 거리, 낯선 말들. 내가 구구라고 울든 매애-하고 울든 애초에 상관이 없는 외래종이 되어. 나는 뜬금없이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세 시간에 걸쳐 야채를 잘라 겨우 볶음밥을 만들면서. 그 모든 것들과 멀어져요. 이해를 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필요도 없고, 오해를 받는다고 야속해할 필요도 없이. 온 도시와 사람들은 그저 나의 그림책의 한 페이지에요. 내가 뭐라고 상상하고 지어내든, 상관이 없어요. 상관이 없다는 건, 조금 쓸쓸한가요? 하지만 어쩐지 그런 쓸쓸함에 외려 안도하면서, 실컷 오해하고 오해 당하다가 문득 궁금해지죠. 이번에도 나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고 싶어질지. 난 이미 그 반복을 알거든요. 다 알면서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다시 실패하고 싶은지. 또 한 번, 쓸쓸하게 아무도 이해 못 할 구구- 하며 울고 싶은지.

글쎄요. 나는 지금 떠나왔어요. 아직 돌아가지 않았고요. 낯선 도시에서 여전히 비둘기예요. 맞아요, 비둘기였죠. 그러니까 어쩌면 첫 문장을 쓰는 그 순간부터, 시작됐는지도 몰라요. 내가 있던 그곳으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익숙한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 아직 한 번도 도착한 적 없던 곳으로. 나도 모르는 새에 이미 떠나왔던 거예요. 떠났기 때문에 돌아올 수도 있겠죠. 다시 그다음의 쓰기를 향해서. 구구는 언제나 미지이자 미완일 테니, 나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 나지막한 소리로 울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말이야,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구구-

[사진: 필자 제공]

  1. 귀소본능의 대가, 비둘기의 몰락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3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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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연

신해연 극작가
글을 쓰거나 연습 중이거나, 그 외엔 종종 지루해하고 자주 심드렁해집니다. 인스타그램 ddor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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