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자칫 진정성 있게 보일지도 모르는 나의 낭만을 다루는 법

쓰는 동안

정진새

제216호

2022.04.14

2022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모집이 진행되는 사이, 다양한 창작자들이 각자의 희곡 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쓰는 동안]에서는 쓰기와 읽기의 내밀한 습관, 생활에서도 작가로 있는 방법, 쓰기를 위한 습관과 리추얼, 자칫 낭만적으로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진정성을 다루는 법,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역사

세계 연극의 역사를 떠올린다. 극작술 법칙을 생각한다. 극작가의 희곡을 찬찬히 되새긴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제일 많이 틀렸고, 레싱의 『함부르크 연극론』이 다음으로 틀렸고,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도 만만찮게 틀렸고, 한스-티스 레만의 『포스트 드라마 연극』 또한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들의 방식으로만 ‘연극’을 풀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서구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애초에 연극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물리적으로도 가장 멀리 있는, 분단된 섬나라 남한의 한국어를 쓰는 극작가로서 나의 연극은 그들과 퍽 멀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연극의 역사를 떠올린다. 지붕이 생긴 극장에서 창극을 시도하면서 종이 대본을 넘기던 시절을 생각한다. 일본에서, 혹은 유럽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온 젊은 극작가들, 그리고 그러한 극작가 동료로부터 영향을 받은 극작가들의 희곡을 빠르게 되새긴다. 애초에 근대극의 세례를 받은 조선의 극작가는 ‘젊은’ 사람들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연극’이라는 것이 청년 예술가들에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주어졌기 때문이리라.

장면을 그려보자면, 젊은이들의 근대극은 야심만만했을 것이다. 하는 이들이 지식인이었기에 다분히 계몽적이었을 것이고, 대중극이라고 해도 그 목적은 뻔했을 것이다. 작가가 한참 가르치고 깨우쳐 주어야 하는 존재로 ‘관객’이 설정되었을 때, 아마도 극작가는 선생님이었고, 선구자였고, 사상가였고, 활동가였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과도한 명분과 대의가 주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틀려먹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런 방식으로 ‘연극’을 되풀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지식인의 양상 또한 변모했겠지만, 실체는 비슷했을 것이다. 식민지에서,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기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한국의 극작가는, 제국의 서구인이 발명한 보편성을 식민지의 동아시아 지식인이 재구성한 민족성에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뭔가를 써왔을 것이다.

그것은 연극이라는 거울에 비친 세상의 ‘진실’ 혹은 ‘사실’일 거라고 여겨지지만, 어쩌면 편집되고 조작된 것이었으리라. 사회 구성원의 ‘각성’을 위한 드라마, 그것을 위한 헛된 사실들과 도구화된 진실들. 사실주의라는 명목하에, 잘못 베껴진 현상들.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 인간 행동이 교정되고 순화된다는 오만한 발상들.

유발 하라리의 저작 『사피엔스』의 방식으로 말하면 헛된 것들의 구성물인 신화와 상징과 역사를 현재화하는 것이 ‘연극’이고, 그것은 작고 하찮은 인간을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눈속임 장치였다. 허나 그 위력이 전례 없이 약해져 있는 지금, 나는 ‘연극’ 그 자체를 의심해본다. 인류가 위대해야 마땅했던 시기의 예술적 기획이 이제는 효력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때가 아닌가. 그리하여, 연극의 최전성기였던 그리스 비극의 시대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지금 여기’의 극작가는, 망했다와 다행이다, 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본문사진0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대신하여 참고하는 책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탱알 지음). 고대 드라마의 원리를 그리스 비극을 통해 귀납적으로 추출하여 정리한 것이 『시학』이라면, 『다.만.페』는 한국의 여성서사 웹툰을 통해 현대적인 비극을 정리해냈다. (사진출처_인터넷 교보문고)

망했다

희곡을 쓰면서 생각한다. 지난 시절 익혀왔던 연극이론과 극작술, 그리고 고전명작은 다 틀렸다. 세상과 인간을 더 잘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호도하고 은닉하고 날조했다. 물론, 의제를 발견하고 논점을 세우고 영향력 있는 인물의 입을 빌어 토론의 장으로 옮겨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점들을 포착해낸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 그것을 문학과 예술의 방식으로 보여주었기에 너무나도 감동적이다.

허나 문제는 그것을 충분히 책임 있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극작술이라는 미명하에 적당히 논의하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적당히 풀어나갔다. 원망스럽다. ‘인간학(人間學)’이라는 대의 아래 과학적 진실이나, 실체적 사실과는 무관한 판결을 내렸다. 절망스럽다. 너무나도 인간/예술 중심의 확증편향으로 이야기가 끝나버린 셈이다. 계발된 의제가 종국에는 어떻게든 보편성을 획득한 척 이야기를 마치거나, 혹은 중립적인 상태로 마무리를 짓거나 하면서.

극작술은 아주 교묘하게 발전해왔다. 이성과 정념을 뒤섞고, 논리와 서사를 뒤바꾸는 식이었다. 불확정성의 상태를 견뎌내는 방식은 용납되지 않았다. 인간보다 드라마가 앞서는 느낌이었고, 주제에 맞춰서 의식을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극에서 발생한 불쾌감, 불안감, 불편감은 극적인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포섭되어야 마땅한 것이라고들 했다. 극 중에서 발생한 불가해한 혼돈을 정연하게 배치하고 불안을 진정시키는 것이 작가의 미덕이자 재능이 되었다.

과학과 기술과 미디어가 발달하기 전에는, 극작가의 발견과 통찰이 중요했고, 또 나름대로 신뢰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틀렸다. 다른 게 아니라 틀렸다. 극작가의 어떤 관찰은 유효하나, 어떤 통찰은 유해하다. 비과학적이고, 반기술적이고(=비전문적이고), 편협하다. 애초에 어떤 종류의 적당함 - 인간을 넘어서는 사실이나 증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 인간끼리는, 인간이기에, 인간이라서 믿어 의심치 않는, 확고한 관념 자체가 중요했던 탓이리라.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망했을까. 극작기술자가 되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을 들였고, 어느 순간 ‘현상 왜곡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그러려니 하면서 기술을 써보려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먹히는 시절이 아니게 되었다. 더없이 허망할 노릇이다.

본문사진2
가족주의 서사를 다시 쓰기 위해 참고하는 책. 앨리슨 벡델의 『펀홈-가족희비극』 요새는 ‘희곡’보다 그래픽노블이 더욱 잘 읽힌다. 머릿속에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를 상상하는 것보다, 만화체로 그려진 인물을 보는 것이 더욱 즐겁고 신난다. (사진출처_인터넷 교보문고)

다행이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진 않았다. 과한 투자는 했으나, 연극 하나에 몰빵하지 않았고,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았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역사와 철학 서적들을 구입만 해놓고 읽지 않았다. 때문에 사상의 뇌는 오염되지 않았다. 연극 서적들을 구비만 해두고 독파하지 않았다. 때문에 신념의 뇌는 순진하고 무구했다. 다만, 그것을 애써 구한 것은 사실이므로, 헛된 노력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만회를 위해 과학, 미래, SF 서적 등으로 서재를 다시 꾸며야 할 참이다.

화해/불화하는 가족서사나 거대한 구조 앞에 놓인 개인, 시적(詩的)인 상징이 적절하게 극화된 서사를 써야만 당선이 가능한 신춘문예나, 혹은 두어 시간짜리 근현대사 리믹스의 웰메이드 희곡공모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따라서 그로부터 기인한 책임감이나 부담감도 없었다. 그저 쓰고 싶은 대로 써온 것이 생존의 비결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극작의 기술은 어찌어찌 익혔지만, 쓸데가 없었고, 잘 쓰지도 못했기에 지금과 같은 전환기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뭐하나 제대로 열심히 하지 않아서 혹은 못해서 살아남은 경우라고나 할까. 인간학을 익혀야 하건만, 딱히 그게 싫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결과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게 된 상태라고나 할까.

이런 변명은 마련해두었다. 좋은 작품을 할 것인가, 나다운 작품을 할 것인가. 나다운 작품은 좋은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답지 않은 좋은 작품과 나다운 나쁜 작품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이 결국, 나의 진정성과 낭만성을 딜레마 있게 만들어 준다. 나는 왜 희곡을 쓰는 것일까. 좋은 작품은 무엇인가. 나는 ‘왜 때문에’ 자기부정을 늘어놓으면서, 희곡의 의미를 탈(脫)인간적인 것으로 확장하려는 것일까. 그러니까, 인간의 보편성을 추출해내거나, 아시안적인 것을 발견하거나, 식민지 개도국 국민을 각성케 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이런 고민도 더해진다. 나에게 좋은 이야기가 연극에게 좋은 이야기일까. 인간에게 좋은 이야기가 지구에게 좋은 이야기일까. 지금 좋은 이야기가 나중에도 좋은 이야기일까. 사실 결론은 아주 빨리 정해졌다. 나중까지 좋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지구에게 좋은 이야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연극에게 좋기를 바라는 마음은 기만이다. 지금의 인간인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하면 되고, 그 연극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나로 인해 연극은, 지구는, 인간은 좀 더 일찍 망할 것이다) 내 깜냥을 아는 것도 어쩌면 다행인 셈이다.

본문사진3
유발 하라리의 원작을 더욱 실감나게 그린 그래픽 노블 『사피엔스: 그래픽 히스토리』 위대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로서 사피엔스를 그렸다. 휴머니즘이 과다할 때, 인류애가 넘쳐흐를 때, 이 책을 보면 재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사진출처_인터넷 교보문고)

현재

당대의 극작가들은 그 존재 자체로 역사에 기여해 왔다. 다만 그 편향적 공헌이 지나치고 과도해서, 지금의 극작가들은 앞선 선배들의 몫까지 성찰하는 중이다. 물론 나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유체이탈하는 습관이 있다. 반성 대신 비판을 우선한다. 애초에 계보가 다르고, 또 업계에 빚진 거 없다는 변명을 하면서. 한편으로 슬그머니 탈(脫)연극을 꿈꾸면서… (이런 비겁함이 다른 동료 극작가들에게도 조금씩 있기를 바란다.)

구제역 이후의 연극, 세월호 이후의 연극, 블랙리스트 이후의 연극, 미투 이후의 연극, 코로나 이후의 연극 등등 ‘2년’의 간격을 두고 역사의 도미노가 차례로 쓰러진다. 그러한 시기를 겨우 버텨내고 있다. ‘이후’에는 뭔가 새로워질 것 같고, 달라질 것 같지만 딱히 낙관적 전망은 없다. 지금처럼 불확정성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극작가들이 다 불쌍한 존재들일 뿐.

최근 나를 비롯한 극작가들은 그간의 역사에 대한 사죄라도 하듯이, 여성과 장애인과 비인간과 동물들을 마구 희곡에 쏟아 붓고 있다. 하지만, 얼추 알 것이다. 이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이토록 어렵고, 못하고, 틀리고, 하다보면 좋은 희곡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기대는 접자.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장르가 글러 먹었으니까.

드라마는 인간의 행동(Act)이라고 익혔다. 허나 지금의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은 행동하지 않는다. 지켜볼(Watch) 뿐이다. 인간이 벌여온 행위의 끝이 파국임을 증언할 뿐이다. 그것은 계몽의 여지도 없다. 재건될 인간이 그다지 많지 않기에. 그리하여 인류가 기획했던 ‘연극’ 프로젝트도 그 효력을 다하고, ‘근대 연극의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망상에 가까운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연극하는 낭만 혹은 자기도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진정성 있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인간적이라는 말에 피식 웃으면서.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정진새

정진새
극단문 드라마 작가, 연출가. SF 연극쓰기를 시도합니다.
의뢰 받은 작품은 평타이상, 스스로 쓰는 작품은 평타이하를 오갑니다.
2020년대에 「외로운 개, 힘든 사람, 슬픈 고양이」와 「피, 땀, 눈물」 그리고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을 썼습니다.
lilytulips@nate.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