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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처음입니다만

쓰는 동안

박해성

217호

2022.04.28

2022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모집이 진행되는 사이, 다양한 창작자들이 각자의 희곡 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쓰는 동안]에서는 쓰기와 읽기의 내밀한 습관, 생활에서도 작가로 있는 방법, 쓰기를 위한 습관과 리추얼, 자칫 낭만적으로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진정성을 다루는 법,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거실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남산타워를 바라봅니다 아니 바라보는 척합니다. 작년 이맘때인가요. 어두컴컴한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몇 달 째 써지지 않는 글을 쓰면서 아니 쓰는 척 하면서,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은 내 책상에 충분한 햇빛이 들지 않아 전두엽이 활성화되지 않고 먼 시선을 둘 창밖 풍경이 없어 집중된 사색을 할 만한 창의력이 생기지 않아서 라고 울부짖습니다. 불끈 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다짐합니다. 이번엔 기어코 먼 산 보이는 볕 잘 드는 집으로 이사하고, 앞으로 다시는 글 쓴다고 허풍떨고 다니지 않을 거야. 오늘 남산타워는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에 가려 보이지 않고, 간혹 길 잃은 새가 한 마리씩 괜찮아 자연스러워 하며 날아갑니다. 허풍금지는 실패했으나 이사는 했으니, 괜찮아 자연스러워.

괜찮고 자연스러운 새를 따라 시선을 돌리다 보면 석 달 전까지 살던 집이 저만치 내려다보입니다. 내 책상 옆 창문은 보이지 않지만, 그 창문에 해를 가리던 이웃 건물들은 보입니다. 전에는 탁 트인 창문이었는데 저 건물이 올라서 몇 년 동안 그 건물 벽만 보인 거구나. 지붕에서 삼색이 고양이가 볕 쬐던 옆집 한옥은 저렇게 새로 올라온 건물들에 홀로 둘러싸여 있구나. 골목에 새로 짓던 뜬금없던 건물은 여기서 보니 이렇게 요상하게 생겼구나. 동물병원 있는 초록색 건물 옥상은 저렇게 생겼구나. 저기서 저기까지가 알고 보니 저렇게 가까웠구나. 주먹 쥐고 엉엉 울고 허풍 떨던 어지러운 책상, 심란했던 책장, 창밖에 보이던 벽, 그 사이로 보이던 삼색이, 골목 구석구석, 십수 년 동안 내 세상의 전부였던 공간은 이만큼만 떨어져서 봐도 전혀 다른 모습에, 전혀 다른 맥락으로 보입니다. 그사이 멀리 자연스럽게 날아간 저 새는 또 다르게 보겠네요.

삼색이는 이사 오기 전 우리집 주차장에서 밥을 주던 고양이입니다. 책상 앞에서 주먹 쥐고 울부짖던 작년 이맘때 삼색이가 크게 아파서 사경을 헤맸는데, 얼굴도 모르는 1층 청년이 약을 구해오고 내가 매일 사료와 물을 갈아줘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어느 날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포획을 해서 병원에 데려갔어야 되나 하는 마음이 한두 달이 지나 덜 괴로워질 무렵, 건강해진 삼색이가 시치미 뚝 떼고 나타났습니다. 전처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제가 들고 나오는 사료와 물을 기다리는 삼색이를 보며 아침마다 잠깐 마음의 평화를 얻는 몇 달이 또 지납니다. 이사가 결정되고 이제 밥을 누가 주나 또 걱정이 시작되는데, 막상 이사를 한 달 정도 앞두고 또 삼색이가 안보이기 시작합니다. 다행이야 다른 데 밥 자리 잡았구나. 그리고 다가온 이사 날, 집을 비우고 창밖을 보자 옆집 한옥 지붕에 삼색이가 누워 이쪽을 쳐다봅니다. 그 한옥 지붕은 지금 집 거실 창문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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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삼색이 ⓒ박해성

요새 쓰고 있다고 허풍치고 다니는 희곡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몇 년 됐는데, 제목까지 지은 본격적인 허풍은 두 해 정도 됐습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의 설계도를 만들어야 되는데, 그 세계가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에 가려서 영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척합니다. 거기 어디에 있기야 하겠지요. 결국 뭔가가 만들어진다면 원인이 존재하긴 할 테니까요. 양자역학에서는 이런 비슷한 얘기를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다지요. 어떤 현상이 있고 그건 양자가 분명히 존재하니까 일어나는 결과인데, 그 양자가 어디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무리 바라봐도 확정할 수가 없다는 얘기인데, 무언가를 본다는 건 관찰자와 대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시점(時點) 등이 작용하여 맥락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결정되므로 존재/부존재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뭐 그런 슈뢰딩거가 츄르 짜먹는 소리지요.

어찌 됐건 그렇게 만들어진 극장의 세계는 어떤가요. 어두운 극장 속 연극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는 삼색이만 알 테고, 아마 관객 각자의 시점(視點)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겠지요. 그렇게 확정되지도 않은 세계의 설계도를 만들겠다니, 양자 컴퓨터 앞에서 윈도 부팅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뚜껑을 열었을 때 모두에게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하나쯤 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정도 아닐까요. 성경 어딘가에 이런 장면 있지 않나요. 재판정에서 심판을 앞두고 누가 예수를 심문하면서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냐”라고 묻자, 예수가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답하는 뭐 그런. 연극이 무슨 말을 하건 관객의 경험은 그 말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연극’을 목격하는 것일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연극의 설계는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에 대한 설계가 아니라, 이 연극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 연극을 관객에게 목격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슨 행동인지에 대한 규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극이 모든 맥락과 세계를 파악할 수도 없고 파악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으며 설령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양자 컴퓨터처럼 모든 것을 파악하고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모든 관객이 똑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연극이 어느 골목 어느 어두운 책상에서 어떤 한계를 품고 바라본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그 태도를 관객에게 드러내는 이유, 그러니까 ‘이 연극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명확해야만 그 행동의 형식, 곧 설계도를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당연히 모든 작품은 새로운 행동일 것이고, 새로운 존재 이유와 그에 맞는 형식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고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처음 쓰는 것이고, 처음이라 아직 이유를 못 찾고 있으며, 그러니까 당연히 쓰는 방법도 모르겠고, 먼산 보이는 볕 잘 드는 집으로 아무리 이사했어도 여전히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는 제목의 희곡을 준비하고 있다’는 허풍만 떨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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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박해성 상상만발극장에서 극작/연출
[믿음의 기원] 연작: <도덕의 계보학>, <스푸트니크>, <믿음의 기원 2: 후쿠시마의 바람>, <믿음의 기원 1> instagram.com/imagin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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