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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초급반의 극작 체험기

쓰는 동안

장영

217호

2022.04.28

2022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모집이 진행되는 사이, 다양한 창작자들이 각자의 희곡 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쓰는 동안]에서는 쓰기와 읽기의 내밀한 습관, 생활에서도 작가로 있는 방법, 쓰기를 위한 습관과 리추얼, 자칫 낭만적으로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진정성을 다루는 법,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극작가라는 직업과 희곡을 쓰는 일에 대해, 아직 극작가 초급반에 속하는 내가 도대체 어떤 말을 하면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지 오래 생각했다. 초급반의 체험담이 필요한 독자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알게 되고 배운 것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적는다.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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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첫 장막 희곡을 최종 탈고했다

습작과 더는 습작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2018년 데뷔 이후, 장막을 5편 정도 완성했다. 단막을 합치면 열 작품이 조금 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는 보통 보관해둔 메모에서 시작된다. 직관적으로 붙잡고 싶어지는 삶의 풍경들은 ―때때로 꿈의 풍경들은― 개인적인 기준에서 아름답고 애틋하거나, 상처를 주고받았거나, 고통스럽고 불가해하거나, 은근한 배울 점들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직관적으로 또 감정적/신체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삶의 순간들인데, 이 순간들이 찾아오고 또 지나가면, 품을 들여 일기장을 겸하는 노트에 옮겨 적는다. 거의 팬더처럼 지내며 되도록 크게 움직이지 않는 내가, 특정 상황을 선택해 언어로 번역하고 옮겨 적는 노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꿈과 날씨와 음악과 타인의 말들이 귀한 메시지처럼 의미 있게 다가온다. 품을 들여 옮겨 적어놓은 과거의 순간들을, 현재 시점에서 조합하고 연결 지으면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세계관을 붕괴시킬 만큼 엄청난 책을 읽었다거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거나, 신비한 사랑의 순간이 찾아와 그동안의 생이 조금 아득해지는 큰 이벤트들을 제외하면 인생의 장면들은 그저 곁에 잠시 머물고서 또 흘러간다. 내가 ‘나’라고 믿는 것들 역시도 사실 매 순간 풍경과 함께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평소 생활에서의 나는 관찰자 및 수집가 모드에 가까운 것 같다. 조금은 <어바웃 타임> 같은 소리인데, 적혀 있는 기록을 기반으로 어떤 순간들을 곱씹고 비디오처럼 되감아 보면 당시와는 다른 감각으로 다른 사유를 할 수 있을 때가 있다. 이때 삶을 구성하는 중층적인 요소들을 조금 더 신비롭고 경이롭게 감각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글쓰기는 외롭고 마감은 고통스럽다(당연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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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하고 나면 앓아 누워서 한의원에 간다

물론 글쓰기가 언제나 재미있는 작가들도 있을 것이다. (계신가요?) 글쓰기가 재미있던 적이 언제였나 생각해보면, 아마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점점 글쓰기가 생존과 인정에 대한 욕구와 깊이 관련되기 시작하면서, 글쓰기는 내게 가장 버거운 일이 됐다. 누구도 읽어주지 않고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아도 내가 좋아서 상상하고 계속 쓸 수 있는 작가만이 구원을 얻는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물론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 같다. (초급반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초고급반 작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자기가 좋아서 계속 쓰는 순간 작가들의 오아시스가 펼쳐진다고 하니, 그 오아시스가 있다고 믿고 그곳을 향해서 계속 가려고 노력은 한다. 혼자서 희곡 속 세계에 들어가 있고, 그 세계를 언어로 번역하고 출력해내는 시간은 지루하고, 엄청나게 외롭다. 아직은 ‘내가 뭐라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싶을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글이 잘 써지는 아주 드문 날에는, 인정 욕망이나 글의 쓸모에 대한 걱정까지 잊고 푹 빠지게 된다. 작가로서의 ‘나’는 잊히고, 오로지 ‘그’에게 몰입하는 순간에는 없는 세계를 감각 하는 듯 근육이 혼자 움직이기도 한다. (이미지 트레이닝 같은 원리일까?) 습작을 하면서, 작가들의 인터뷰를 엄청 많이 읽었는데, 몇몇 작가들이 가끔 ‘내가 모르는 말들을 캐릭터들이 할 때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연히 안 믿었고, 그것도 본인이 아는 말이었겠지 했지만) 그런데 계속 쓰다 보니, 캐릭터들이 옹졸한 나보다 더 크고 지혜로운 말을 하는 순간이 가끔 찾아온다. (아주 가끔!) 나를 더는 생각하지 않는 순간, 나를 넘어 잠시 확장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는 선물 같은 연결이나 자유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로서의 ‘나’를, ‘그’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보통 거의 내가 만든 완벽주의와 부담감이었다. 결국 (미래에 있을) 외부의 평가나 인정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이제는 내가 쓴 글을 나와 동일시해서, 평가의 말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은 좀 덜 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글이 잘 써질 리도 없고, 건강에도 좋지 않은 것 같아서다. 언젠가는 내 글을 점점 내가 만든 두부조림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물론 두부조림을 만들 때는 언제나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서 만들 것이다. 다만 이번 두부조림이 좀 짜다고 하면, ‘다음에 두부조림 할 때는 간장을 덜 넣지 뭐’ 하고, 툭 털고서 낮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다. 마감이 닥쳐와 숨이 막힐 때는, ‘시 안 써지면 / 그냥 논다. 논다는 걱정도 없이 / 논다’ (정현종, 「시를 기다리며」 中) 라는 시의 구절을 억지로 떠올린다. 엄청난 생존 불안에 시달리고 자책하면서 놀기 때문에, 논다는 걱정이 없이 노는 작가의 경지는 정말 엄청난 경지겠구나 싶다. ‘이렇게 미루고, 이렇게 못 쓰고, 차갑게 버려지고, 굶어 죽을 거야’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무언가가 익어서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놀기. 지루한 작가가 되어 차갑게 버려지더라도, 나름대로 또 살아갈 수 있음을 알기. 계속 툭툭 털고, 걱정 없이 기다릴 때 몰입이라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 같다. 쓰고 있을 때만 쓸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무섭고 재밌다.

관찰자 모드: 나를 알고 나를 넘어서기

연극이 갈등의 예술이라는 걸 배웠을 때, 그래서 도대체 그 갈등을 어떻게 쓰는 것이냐고, 만나는 선생님마다 묻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회피형 애착으로서, 언제나 갈등을 회피해 도망쳤던 나에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을 쓴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결국 ‘내가 아는 갈등은 무엇인가?’ 혹은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갈등은 무엇인가?’ 에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결국 작법서를 떠나, 희곡을 쓰려면 우선 작가가 자기 자신을 정말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됐다. 내가 삶에서 유독 어떤 인물만은 사랑할 수 없는 이유, 두려움과 수치심, ‘이건 안 된다’고 믿는 각종 기준을 살피고, 계속 파 내려가다 보면 나를 구성하는 핵심 관념에 닿게 될 때가 있다. 그 관념의 원천이 되는 기억들도 유령처럼 살아 돌아오고는 한다. 나를 이루는 관념들을 알기 위해, 삶에서 격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관찰자 모드를 켜 ‘나’를 지켜보는 것도 작가로서 좋은 훈련이 되는 것 같다. 이것은 머릿속의 목소리들을 지켜보는, 명상의 원리에서 도움을 받았다. 명상 과정에서 적어도 ‘내면을 관찰하는 나’는 ‘격렬하게 날뛰고 있는 나’를 지켜볼 수 있는 보다 큰 존재이다. 지켜봄을 통해, 나를 포함해 모든 이들이 이미 형성된 관념에 의해 ‘각자 그럴 만해서 그러고 있다’는 것, ‘그래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내 나름대로의 갈등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로부터 태어난 인물들을 되도록 공평히 사랑하면서, 그들이 그들로서 갈등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해보고는 한다. 블랑쇼가 글쓰기를 통한 탈존에 대해 말하듯, 몰입한 채로 글을 쓰며 다른 목소리들을 불러들이다 보면, 나의 좁은 몸과 마음의 바깥으로 나가 확장되는 짧은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나는 연극 사랑단이다

희곡을 쓸 때, 나는 연극을 믿는다. 글을 쓰지 않는 순간의 나는 언제나 방법적 회의를 거듭하고,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의심하는 것 같다. 그런데 글을 쓸 때조차 믿지 않고 냉소하면, 쓸 힘이 나지 않는다. 글을 쓸 때는, 좋은 연극은 사람들의 억압된 감정을 밖으로 꺼낼 수 있다고 믿는다. 연극은 나에게, 오래 가둬놓은 지하실의 괴물을 무대 위의 모습으로 마주하는 순간들이었고. 특히 극작가로서 희곡을 쓰면서, 내게 억압된 괴물이 피카츄 크기이든, 갸라도스 크기이든 때마다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워하고 무섭게 욕망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그들이, 모두 나의 일부임을 수용하게 됐다. 수용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수용할 때, 조금씩 자아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확장된 자아는, 보다 넓게 사유하고 공감하며, 현실에서도 사랑에 가까운 (정치적) 행동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고 믿는다.
연극 속 배우들은 대신 울고, 수치스러운 욕망을 발화하고, 대신 비난받고, 대신 죽는다. 기꺼이 괴물의 얼굴을 하고, 관객의 감정을 불러내는 메신저들. 나는 종종 무대 위의 배우들이 천사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무대 뒤의 사람들, 또 기꺼이 이 환(幻)을 믿고 울어주는 관객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게 된다. 잠들어 있던 덕후의 심장이 다시 뛰는 이런 순간,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릴 힘이 생겨난다. 다음, 그다음. 계속 마르지 않는 덕후의 사랑으로 쓰고 싶다. 훗날 더 씩씩한 중급반 극작 체험기를 쓰게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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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응원을 받으면 심장에서 눈물이 난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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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

장영
극단 프로젝트 414 연출부, 독립연극잡지 이화연극의 필진으로 활동했다. 2018년 국립극단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 희곡공모에서 『G의 영역』이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다. playplaygho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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