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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에이 아포스트로피)

다시 쓰기

문서희

218호

2022.05.12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시 쓰기’는 기존 작품을 동시대의 시선에서 바라봄으로써 지금 여기와 그때 그곳을 가로지르고자 합니다. 하나의 장르와 또 다른 장르를 넘나들고자 합니다. 때로는 원전의 전형적인 코드들을 드러내고 비틀며 고쳐 쓰거나 다시 씀으로써, 글쓰기의 평행 우주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었을 또 하나의 작품을 발굴하고자 합니다.

* A’(에이 아포스트로피)가 다시 쓴 작품은 영화 <악마를 보았다>입니다.

등장인물
여자A
2002년에 만들어진 20대 중반 여성 캐릭터
여자B
2022년에 만들어진 30대 초반 여성 캐릭터

무대설명
무대 중앙에는 문으로 추측되는 구조물이 하나 놓여 있다.
구조물 주변에는 여성들의 옷이 쌓여있다.
암전된 무대.
동시에 문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B가 무대 중앙에 내던져지듯 넘어진다.
무대 밝아진다.
여자B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애쓰며) 야! 이거 열어! 야! 너 이거 범죄야! 알어?! 주거침입이랑! (생각이 잘 안 나는 듯) 납치! 감금! (늦게 생각난 듯) 계약위반!!!
문에 거의 매달리지만 절대 열리지 않는 문.
분에 못 이긴 듯 대자로 뻗어서 이리저리 주먹과 발차기를 날리는데,
뒤에 옷더미가 작게 들썩인다.
여자B
(괴성을 한 번 지르고 울먹이며) 아 진짜 짜증나…
B,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A, 옷더미에서 나와 천천히 B에게 다가가는데
여자B
(낮게 읊조리며)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여자A
(B의 어깨를 잡으며) 이봐요!
B,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리저리 주먹을 뻗는다.
여자B
누구세요?
여자A
(주먹을 밀며) 이거부터 원상복구하면 안될까요?
여자B
아! (주먹을 펴며)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여자A
괜찮아요. 처음엔 다들 긴장해서 예민하거든요. 일단 옷부터 줄까요?
A, 옷더미로 가서 니트를 한 장 건넨다.
여자B
(니트를 받으며) 감사합니다만 이걸 입기엔 아직 더워서…
여자A
반팔로 여기서 오래 못 있어요.
멀리서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여자A
여기 적정 온도는 10도에서 12도 사이거든요. 그 위로 올라가면 바로 팬이 돌아요. 사람이 하나에서 둘이 됐으니까… 그 쪽 온도만큼 올라갔겠네요.
A의 말이 끝나자마자 팬 돌아가는 소리가 아주 시끄럽게 들려온다.
여자B
(귀를 막고 크게) 여기 오래 계셨나 봐요?!
여자A
(눈을 감고 크게) 그게 중요한가요?!
여자B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니요!
짧은 사이.
팬 돌아가는 소리가 점차 작아지다가 멈춘다.
여자A
적정 온도 사이로 들어갔나 봐요. (손 내밀며) 반가워요.
여자B
(악수를 하며) 아까 처음엔 다들 긴장한다고 하셨죠?
여자A
네.
여자B
긴장했던 다들은 다 어디에 있나요?
여자A
어디로 간 것 같긴 한데, 어디로 간지는 몰라요.
여자B
네?
여자A
하루에 열 명이 들어올 때도 있었고, 한 달 동안 두 명이 들어올 때도 있었죠. 근래에는 아무도 안 들어왔고요. 다들 올 때는 시끄러운데 갈 때는 홀연해요.
여자B
아니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어디로 나갔냐고요.
여자A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사라졌어요.
여자B
연기처럼 후루룩 사라지기라도 했습니까?
여자A
(빙그레 웃으며) 잘 아시네요?
B, A의 멱살을 잡는다.
여자B
이봐요.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거든요?
여자A
진짠데… 승화처럼 사라져요.
여자B
그게 누군데요?
여자A
사람 이름 말고. 고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거요. 승화.
여기는 편집되지 않는 공간이라 한 번에 휘리릭 변하지 않아요. 서서히 사라지죠. 정말 잊을 수 없는 캐릭터라면 모를까… 나중에는 누가 사라졌는지도 기억 안 나요.
여자B
그럼 그 사람들이 여기서 다 사라졌다? 다시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여자A
내가 들어온 이후로 따지면… 네.
여자B
당신은 여기 언제 들어왔는데요?
여자A
이천이년…
여자B
뭐?
여자A
날짜까지 말해요?
B, A의 멱살을 놓는다.
A,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여자A
무슨 역할이었는데 이렇게까지 흥분해요?
여자B
그딴 거 없어요. 그냥 회사원이었지.
여자A
사원? 대리? 아니면 팀장이나 과장?
여자B
장난칠 기분 아니거든요?
(지쳐서) 저 좀…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요.
여자A
그럼 더 우울해질걸요…
B, 최대한 A로부터 멀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A, 짧은 사이를 견디지 못하고 B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여자A
저는 108분짜리 영화 조연이었어요.
여자B
(고개를 쳐들고) 아 진짜…
여자A
통상적인 길이잖아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죽는 장면은 3분 즈음에 처음 나와요. 빗길을 걸어가던 취객이 가로등 하나를 붙잡고 바지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싸요. 한 쪽 눈만 간신히 뜨면서 비틀비틀. 가로등이 막 깜빡거리니까 취객이 가로등을 한 대 툭 치고… 바지 지퍼를 올리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잘못 봤나? 머리를 털고는 몸을 굽혀요. 그리고 발견하는 거지. 내 눈을.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정확히 죽는 건 1시간 15분에 나와요. 그때 범인이 밝혀지는 거지. (오버스럽게) 뭐야? 범인이 주인공 친구라고?! 하면서.
여자B
억울하지도 않아요?
여자A
그땐 억울했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여자B
저기 옷더미는 주인 없는 옷인 거죠?
여자A
네, 뭐, 일단은?
B, 자리에서 일어나 옷더미로 가 앉는다.
A, 따라가 B의 옆에 앉는다.
여자A
뭐 찾아요?
여자B
등산화, 바람막이 뭐 그런 거요. 등산스틱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크게 상관없고.
A, 반대편 옷더미로 가 옷들을 뒤적인다.
여자A
(옷을 건네며) 바람막이는 이해하는데 등산화는 왜요?
여자B
구하러 가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여자A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자B
내가… (떨떠름해 하며) 죽은 시점은 20분 즈음이었고, 그 영화 길이가 1시간 51분이니까 지금이면 돌아갈 수 있어요.
A, B를 저지한다.
여자B
뭐해요?
여자A
안돼요.
여자B
난 해요.
여자A
작품을 망칠 셈이에요?
여자B
그럼 작품은 날 망쳐도 돼요?
여자A
우리가 망가졌어요?
여자B
우리 말고 나요.
여자A
그러니까 우리요.
B, 옷더미 속에서 등산화를 찾아내어 신는다.
여자B
미안하지만 저한테 우리는 밖에 있어요.
여자A
지금 함께 있는 건 나잖아요.
A, B가 묶고 있는 등산화 끈을 다 풀어버린다.
여자A
나가지 마요.
여자B
이봐요.
여자A
어차피 못 나가요.
여자B
방해하지 마요.
여자A
(천천히 일어나면서) 문이 열리면, 발끝이 얼어버려요.
모두가 그랬어요. 다 함께 손을 잡고 뛰어나가려고 했었는데
다들 그 자리에 멈춰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만 바라봤죠.
문이 닫히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고…
그 다음날 모두 사라졌어요.
다시 팬 돌아가는 소리가 울린다.
팬 소리가 울리는 동안 두 사람,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본다.
이내 팬 소리 멈추면,
여자B
(자신의 팔을 천천히 쓰다듬다가) … 추워.
여자A
말했잖아요. 곧 추워질 거라고.
A, 턱짓으로 B에게 건넸던 니트를 가리킨다.
여자B
(니트를 가져와 입으며) 저도 사라질까요?
여자A
… 그건 저도 모르죠.
A, 어깨를 으쓱한다.
긴 사이.
여자B
그날은 주말이었고… 원래는 도시락을 싸서 야외로 나갈 계획이었는데 비가 왔고, 기억은 나는데 남한테 말할 수 없는 사소한 걸로 크게 다투고 애인 집을 뛰쳐나왔어요. 생각해보니까 그 집에 제 휴대폰을 두고 나와서 다시 찾아 갔는데 애인은 저를 찾으러 밖에 나간 건지 없었고, 그사이에 들어온 누군가에 의해 맞아 죽었어요.
여자A
범인 얼굴은 봤어요?
여자B
뒤에서 갈겨서 얼굴은 못 봤어요.
여자A
애인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여자B
제 애인은 저보다 키가 작아서 그렇게 못 때려요.
A, 놀랐지만 놀란 기색을 감추려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B
그렇게 남은 가능성은… 첫 번째, 사실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살인마다. 두 번째, 내 애인이 주인공은 맞지만 서브가 이 사건을 더 적극적으로 해결한다. 세 번째, 내 애인을 우울한 여자로 만들어서 몇 년 썩히기 위해 나를 초장에 죽였다.
여자A
에이 설마…
여자B
설마 그렇게 잡혀 들어온 사람이 여기 둘 있네요.
B, 어깨를 으쓱한다.
여자B
그러니까 작품이 망가지든 말든 난 돌아가야겠어요. 솔직히 망가진다니까 더 돌아가야겠고.
여자A
(조심스레) 혹시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예요?
여자B
제가 아까 말했죠. 작품은 날 망쳐도 되냐고. 그 무엇도 마음대로 저를 망칠 수 없어요. 설사 내 애인이라고 해도 나를 함부로 하려고 하면, 그 사람 더 못 만나요. 근데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떤 놈이 자기가 필요하니까 아무 말 말고 죽으라고 한다? 그 사람을 죽였으면 죽였지, 죽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요.
여자A
사람은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사람이 변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충격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면… 아내의 죽음 같은 거요.
B,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는다,
여자B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무시하기로 한 거예요?
여자A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죠.
여자B
그게 누구한테 좋은데요?
여자A
모두요.
여자B
당신도 포함해서요?
짧은 사이.
여자A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당신처럼 있는 대로 화내다가 연기처럼 사라져야 해요?
여자B
내가 계속 묻고 싶었어요. 그 쪽은 화도 안 나요?
여자A
제가 왜 화를 내요.
여자B
(큰소리로) 죽었잖아요!
여자A
그만해요. 이러다 사라지겠어요.
여자B
왜 화를 안 내요? 왜 억울해하지도 않고. 하다못해… 그리워하지도 않느냐고요. 왜…… 죽는 걸 당연하게 받아 들이냐고요.
여자A
그건…
A, 처음으로 문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긴 사이.
여자A
… 추워요.
여자B
여기보다 추운 곳은 없어요.
여자A
아무도… 나한테 알려준 적 없어요.
A,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간다.
여자A
당연하게… 궁금한 적도 없었어요. 그냥 나는… 그런 나를 당연하게 여겼어요, 그래도 되는 그런…
B, A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그를 안는다.
여자B
당신은 그 12분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에요.
A, B를 꽉 끌어안는다.
긴 사이.
여자B
같이 갈래요? 우리.
B, A에게 손을 내민다.
A, 천천히 B의 손을 잡는다.
여자A
이제야 우리가 됐네요.
두 사람, 서로를 향해 웃는데,
팬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나면서 조명이 반쯤 어두워진다.
여자A
우리 둘이 문을 열 수 있을까요?
여자B
한 번 날아보죠.
여자A
네?
여자B
(위를 가리키며) 저 위에 보여요?
여자A
저건… 상단이 좀 깨진 것 같은데요?
여자B
저기에 천을 거는 거예요. 그네처럼 천을 타고… 느낌 오죠?
여자A
천은…
두 사람, 동시에 옷더미를 바라본다.
여자A
괜찮을까요?
여자B
어쩌면 제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죠.
두 사람, 옷더미 뒤에 앉아 옷들을 엮기 시작한다.
무던히 옷들을 잇는 B에 비해 손이 조금 느린 듯 보인다.
옷을 하나 이을 때마다 정성스레 옷을 쓰다듬고 품에 꽉 끌어안기를 반복한다.
여자B
도와줘요?
여자A
아니요. 제가 할게요.
B, 이은 옷들을 들고 일어선다. 이리저리 던지는 시늉을 하면
A, 다 이어진 옷들을 조심히 들고 일어선다.
B, A에 손에 들린 천을 찾아 더듬거리며 손을 내미는데
A,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여자B
왜 그래요? 무서워요?
A, 숨을 고른다.
여자A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여자B
어떤 거요?
여자A
이름… 있어요?
팬 돌아가는 소리 점점 커진다.
두 사람의 목소리 역시 점점 커진다.
여자B
제 이름은 B에요. 여자B.
여자A
(환하게 웃으며) 제 이름은 A에요. 여자A.
B, 두 사람을 묶고 있는 매듭을 더 세게 조인다.
여자B
그럼 이제 나가볼까요?
A, 고개 끄덕인다.
두 사람, 자신들을 묶고 있는 천에 반동을 준다.

암전.
멀리서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다 이내 멈춘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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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런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인스타그램 @midnightformoon / msh9806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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