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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퐁핑, 퐁

자기만족충만

김호야

제223호

2022.10.13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자기만족충만’은 작가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유 방식, 세계관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충만하다고 느낄 때까지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와 형식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는 작가중심적 작품들을 만납니다.

등장인물
한민아 (20대 후반)
홍성열 (20대 후반)


종교시설 지하 휴게실

무대
구석에 상자들이 쌓였고, 무대 가운데엔 탁구대만 덩그마니 놓여 있다.


민아, 탁구대를 손 걸레질한다.
상판에 난 자국을 공들여 닦는다.
탁구대 위에 놓인 탁구채 한 짝을 본다.
나머지 탁구채를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벨 소리가 들린다.
민아
(문으로 다가가) 탁구대 때문에 오셨나요? 아이디가……
목소리
핑퐁러브
민아
잠시만요.
민아, 걸쇠와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어준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성열이 등장한다.
민아
다른 분은요? 이건 혼자 옮기기엔 좀…
성열, 탁구대로 다가간다.
민아, 탁구채를 찾으려고 분주히 움직인다..
성열, 탁구대로 다가간다. .
추억을 더듬듯, 이리저리 살핀다. .
상판 한구석에 난 자국을 문지른다.
민아
그거, 사진으로 확인하셨죠. 살짝, 생활기스.
거 빼곤, 완전 새 거예요.
성열
(낙서를 가만히 읽는다) 민아, 성열 포에버
민아
(멈칫) … 2만 원 빼 드릴 수 있어요. 아, 잠깐만, 탁구채 한 짝이 어디 있을 텐데.
성열
민아야.
민아, 돌아본다.
성열, 허리춤에서 탁구채를 꺼낸다. 가만히 탁구대 위에 올려둔다.
민아, 성열을 멀뚱히 바라본다.
성열
(마스크를 벗고는) 한민아.
민아
니가 여길 어떻게 (다가가며) 미쳤어? 어쩌려고 그래. 너, 여기 나타난 거 알면
성열
(끊고) 다들, 저기 산자락에 있는 컨테이너, 글로리홀인가? 거기서 점심 먹지?
내 전화, 왜 안 받았어? 너랑 연락하려고
민아
핑퐁러브……
성열
(민아의 손목을 잡아끌며) 얼른, 여기서 나가자.
민아
어딜 가자고! (성열의 손, 털어낸다) 혼자 달아날 땐 언제고
성열
미안해, 하지만
민아
(끊고) 싫어, 싫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성열이 다가가자, 민아는 몸을 피한다.
둘은 탁구대를 가운데 두고 잠시 추격전을 벌인다.
성열에게 팔뚝을 잡히자, 민아는 탁구대 위에 놓인 탁구채를 집어 든다.
민아
이거 놔. 싸대기 맞기 전에.
성열, 민아의 팔뚝을 놓는다.
민아, 성열이 있는 반대편으로 간다.
둘은 탁구대를 가운데 두고 대치한다.
성열
내가 얼마나 널 찾았는데. 교단 사무실은 사라지고
민아
누가 신고했는데. 이단 박멸단? 그 유튜버는 누가 끌어들였는데?
누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핍박을 받고 광야를 떠돌았는데!
성열
(당구대를 손바닥으로 쓸며) 연근마켓에서 이 탁구댈 봤을 때, 계시를 받은 것 같았어.
(여자가 문지르던 곳, 어루만지며) 이 하트, 기억나? 그날 밤에 너랑 나…꽃무늬
민아
…… 다 지난 일이야.
성열
니 생각, 정말 많이 했어.
민아
(끊고) 탁구댄 살 생각은 없는 거지? 얼른 사라져.
성열
너만 이 지옥에 혼자 두고 어떻게 가.
민아
지옥? 지옥이랬니? 등 돌리면 여기가 지옥이 되는 거니?
성열
사이비, 광신도 집단이야. 너도 알잖아.
민아, 주머니에서 탁구공을 꺼낸다.
민아
(탁구공을 만지작거리며) 난 여기가 좋아. 편해, 집보다
성열
제발 눈 좀 떠. 넌 속고 있는 거라고.
민아
그래서, 구출하시겠다고?
성열
일단 나가면
민아
(탁구채로 공을 튀긴다) 어때? 바깥 세상에 나가보니까, 천국 같아?
성열
천국이 어디 있어. 그냥 사람 사는 세상이지.
민아
(성열을 흉내 내며) 상처받고 상처 주며 인간이 서로를 밟고 경쟁하고 혐오하는 그런 세상. 결국 이러려고 태어난 걸까, 이러다 죽는 걸까, 이 시간은 다 뭐지? 여기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어. 민아야, 여기가 우리 은신처이자 안식처야.
성열
(다급하게) 밖에 나가서도 내내, 니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
너만 여기 두고 간 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
민아
그럼 끝까지 함께 있었으면 되잖아.
됐어. 이제 와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야.
성열
그런 넌, 휴대폰 번호는 왜 안 바꿨는데?
민아
…… 넌 혼자 도망쳤잖아.
성열
난 정말 어떻게든
민아
싸우다 넌, 바닥까지 드러냈지.
성열
……그 땐 정말, 어떻게든 널 여기서 끌어내려고, 정말 널 위해서
성열, 고개를 숙인다.
민아
(탁구채로 탁구대를 찍어대며) 그래, 너야 진심이었겠지.
나는 불쌍하고 너는 옳고. 너야 눈이 먼 나를 구해주려고.
다를 바 없지, 다들.
탁구공, 바닥에 떨어진다.
성열
환상이고, 도피야.
민아
사랑? 아니, 넌 날 구원해서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 거야.
기억나? 그때 인형 뽑기 기계.
성열
그래! 그 토끼 인형. 널 닮은
민아
다람쥐. 유리 상자에 갇힌 채 구원을 기다리는 멍청한 봉제 인형들.
지폐를 밀어 넣고 기계 팔을 조작하지만, 미끄러지고 엇나가고. 욕하고 발로 차고, 지폐를 바꾸고. 다시, 다시.
성열
그때 우린 보통 커플 같았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인생네컷, 코인 노래방도 가고, 이자카야에서 타코랑 사케 마시고
민아
가라아게였어. 바싹 튀긴 닭 날개.
성열
그때였을 거야, 내가 다른 어떤 걸 꿈꾸게 된 건…… 민아야,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나랑 함께 그냥 평범하게
민아
평범하게. 그냥 평범하게…… 그게 쉽나?
(짧은 사이)
그 다람쥔, 지금 어디 있지? 잠시만 품에 안았지. 시간이 지나면 때가 타고 몸은 뜯어지고 솜은 튀어나오고 버려져 비를 맞지.
어디서 어디로 옮긴 거지? 차라리 유리 상자 안이 환하고 비도 안 오고 아늑하지.
성열, 다가가 민아의 손을 잡는다. 민아, 성열의 손을 내려다본다.
성열
민아야, 너, 겁나서 그러는 거잖아.
민아
……
성열
밖에 나가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니까. 청춘을 사이비 집단에 헌신한 등신들밖에 안 되니까. 하지만, 아닌 건 아니잖아.
민아, 바닥에 떨어진 탁구공을 줍는다.
민아
난 늘 피구가 무서웠어. 야구공, 배구공, 농구공, 모든 공은 맞으면 아파. 하지만 탁구공은 달라. 환하고 가벼워. (공 쥐며) 이렇게 손에 쥘 수 있어. 목표가 있고 단계도 명확해. 여기선 기다리라고 해. 희망이란 게 보여. 뭘 어떻게야 하나, 그런 막막함이 채워져. 뭘 어째야 했나, 자책하지 않아도 돼. 내가 별거 아니라는, 병신 같다는 생각과 싸우지 않아도 돼. 하루하루 살면서 그날을 기다리는 거야. 언젠가는 빛이
성열
(끊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믿어? 그 종말의 날은 늘 다음 날로 넘어갔잖아. 아침은 여전하고, 밤 새서 종말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굳은 떡을 나눠 먹고. 오 년 동안 몇 번이나.
민아
우리 믿음이 종말을 막아낸 거야.
성열
그런 농간에 언제까지 붙들려 있게? 민아야, 나, 경찰공무원 준비해.
민아
이번엔 경찰이야?
성열
(암기하듯) 경찰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위법 방지를 위해
민아
성열아, 나 이제 구역장이야, 추종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어. 사명감도 생겼어. 여기가 내 집이고, 이 사람들이 내 식구야.
성열
나는? 나는 어쩌고.
민아
넌, 네 자리로 돌아가. 뒤돌아보지 말고.
성열
민아야, 나는 지금도
민아
(성열의 손을 잡으며) 그럼 돌아와. 부처도 예수도 마호메트도, 우리 한빛님도 고통 받고 방황하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셨어. (광기에 어린 듯) 신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누구보다 아끼신대. (무릎 꿇고) 오오, 빛의 그 날이 멀지 않았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지상엔 천국이 도래할 거야. (잡아끌며) 성열아, 우리 기도하자.
성열, 민아의 손을 뿌리치고 물러선다.
성열
제발, 이런 병신 같은 짓 그만 둬. 없어, 그런 거 없다고.
민아, 천천히 일어선다.
민아
(일어서며) 그럼 증명해 봐. 신이 없고, 구원도 사기라고, 내 시간들은 모조리 먼지처럼 사라졌다고. 빛의 날 같은 건, 영영 오지 않는다고.
민아는 다가가고, 성열은 물러선다.
민아
제발, 날 설득해줘. 오랫동안 바보처럼 살았고, 앞으로도 영영 등신처럼 살 거라고.
그 시절 너와 내가 나눴던 꿈, 미래 같은 건 헛소리였다고! 난 그냥 버려진 미친년이라고. (바짝 다가서서)
희망 같은 건 없다고, 그 시간들이 모두 의미 없었다고. 난 바보고, 노예라고.
날 보고 똑똑히 말해 봐.
성열, 고개를 돌린다.
민아, 성열의 손에 성열의 탁구채를 쥐여준다.
민아
가, 점심 메뉴 국수야.
성열
(손에 쥐어진 탁구채를 본다) 우리 마지막 게임, 중간에 끝냈지?
(탁구대를 쓸며) 탁구대 없애면 이젠 칠 일도 없잖아.
성열, 민아의 손에 탁구채를 쥐어준다.
성열
혼자 칠 순 없잖아. 이번엔 끝장을 보자.
민아, 주머니에서 공을 꺼낸다. 작고 노랗고 단단한 탁구공.
민아, 탁구공을 쳐서 넘긴다. 성열이 받아친다.
민아
탁구댄 안 가져갈 거지?
성열
기스가 너무 많이 났어.
민아
2만 원 빼줘도 안 돼?
탁구공, 바닥에 떨어진다.
성열
그새 실력이 늘었구나.
민아
기다리는 사람에게, 밤은 참 기니까.
성열
민아야, 우리……
민아
받아치지 못한 공은, 그냥 놓친 공이야.
민아, 성열에게 공을 넘긴다.
민아
우리 필리핀으로 가. 거기서 새 출발 할 거래.
성열
거긴 너무 덥잖아.
민아
비가 많이 온대.
성열
벌레도 많고
민아
물가는 싸대.
탁구공, 바닥으로 떨어진다. 성열, 공을 집어 든다.
성열
(노란 공을 보며) 필리핀 바나나가 진짜 맛있다던데.
민아
끝장을 보자며
성열
…… 정말, 마지막이야?
민아
(탁구채를 탁탁 치며) 뭐해, 서브 안 해?
조명은 어두워지고, 탁구공이 오가는 소리가 이어진다.
핑퐁핑퐁, 핑, 퐁핑, 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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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야

김호야
연극과 짐승을 좋아합니다.
마법소녀를 꿈꾼지라 책상에 들러붙은 이끼로 변신.
무대를 목소리와 침묵으로 채우고 싶습니다. 숨결과 몸짓 추가!
알파 겐타우리 이주 10주년 기념공연 대본을 쓰고 있싶습니다. 손가락으로 주문을, 타다닥, 투드덕…
iocea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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