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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기억상실증

자기만족충만

김민지

제226호

2022.11.23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자기만족충만’은 작가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유 방식, 세계관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충만하다고 느낄 때까지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와 형식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는 작가중심적 작품들을 만납니다.

등장인물
임은수, 31세
이영훈, 35세


시간
겨울. 직장인들의 점심(點心)*시간.


공간
서울 종로구. 어느 고층 빌딩 1층에 있는 카페.


무대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 안.
전시실의 화이트 큐브처럼 온통 화이트로 도배되어 깔끔한 인상을 주는 공간이다.
화이트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벽 한 편은 통 창으로 되어 도로와 길가의 사람들 모습도 보인다.


끊임없이 커피 머신이 작동하는 소리.
제빙기에서 얼음을 푸는 소리 등의 일상 소음.
조명 들어오면,
은수 앞에는 따듯한 카모마일 차 한 잔,
영훈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다.
테이블에는 잘 마른 드라이플라워가 유리병에 꽂혀있다.
영훈
먼저 시켰는데 괜찮아?
은수
어… 카모마일이네?
영훈
응, 몸에 좋다더라고.
어색한 사이
영훈
(분위기를 살피고) 아,
영훈, 작은 쇼핑백을 은수에게 건넨다.
영훈
이거
은수
… 뭐야?
영훈
전시 축하 선물. … 그리고 곧 있으면 생일이잖아.
은수
… 내가 선물까지 받긴 좀 그렇지 않나?
영훈
(웃으며) 별거 아니야.
은수
그럼 지금 열어 본다?
영훈, 고개만 끄덕인다.
은수, 쇼핑백 속에서 비타민과 약통을 꺼내 든다.
영훈
진짜 별거 아니지? 비타민 D. 맨날 작업실 아니면 학원에 있을 거 아냐.
햇빛 많이 못 보니까.
은수
이제 정말 늙었나 보다.
영훈
?
은수
생일 선물이 하나 같이 다 비타민이야.
영훈
… 다른 걸 준비할 걸 그랬네.
은수
아니. 다른 거면 불편하지. 고마워. 잘 먹을게.
영훈
어. 하루에 한 알씩 챙겨 먹으면 된대. 시간 정해두고 먹으면 더 좋고, 또…
은수
알았어. 잘 챙겨 먹을게.
은수, 비타민을 다시 쇼핑백 안에 넣어 테이블에 정리해둔다.
영훈
‘사라지는 서울’에서 안 사라지려면 건강이 제일 중요해.
은수
?
영훈
좋더라, 확실히 공간이 넓으니까…
은수
봤어? 언제?
영훈
점심에, 잠깐. (양손을 들어 가림막처럼 세우며) 네 말대로 스크린이 양쪽에
있으니까 진짜 골목길 같더라. 그 사이로 걸으면서 직접 보잖아. 하나하나.
그 길이, 골목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하나…… 맞다,
아저씨들이 길냥이들 밥 주는 모습 찍힌 거, 나 그거 보고 한참 웃었다?
사이
은수
왜 말을 안 했어?
영훈
지금 하잖아.
은수
아니.
영훈
당연히 가야지. 너 오래 준비한 거, 고생한 거 아는데.
은수
… 고마워, 어쨌든.
영훈
그동안 해보고 싶다고 했던 거, 아니야?
은수, 영훈의 말에 고개를 들고 잠시 영훈을 바라본다. 빤히.
은수
맞아. … 놀자랑 먹자도 잘 있지?
영훈
똑같지. 아, 먹자는 과체중이야.
은수
그래? 귀엽겠네.
창밖으로 가로수를 가지치기하는 전기톱 소리가 들린다. 빠르게 잘리는 나무들.
은수, 소리에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영훈, 은수의 시선을 따라간다.
은수
신기하다.
영훈
뭐가?
은수
잠깐이잖아.
마른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하나, 혹은 큰 덩어리로 한 뭉텅이씩,
쉴 새 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닥에 쌓여가는 나뭇가지와 마른 나뭇잎 더미.
그것들을 응시한 채로
은수
길냥이들 밥 먹는 모습은 찰나잖아. 온통 재개발에, 다 부서지고,
사라지는 모습이 더 길게 나오는데 전시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길냥이
얘기부터 해서. 결국… 그런 사소한 풍경이 끝까지 남는 건가 봐, 기억엔.
떨어진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피해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은수
서울은 문화재만 간신히 버티는 땅이라는데, 그렇게 매일 흔들리는 곳에서
나 같은 사람 한 명이 흔들리는 건……
은수,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옮기고 영훈과 눈이 마주친다.
사이
은수
난 다 내 문제라고 생각했었거든, 일도, 작업도, 관계도…
영훈
왜 그게 다 네 문제야.
은수
응. 나도 이젠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어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나이었겠다, 싶어.
영훈
앞으로도 계속 좋은 작업 해줘. 건강 잘 챙기면서.
은수
내가 너한테 건강 챙기라는 말을 다 듣네.
영훈
넌 건강검진 잘 받고 있지?
은수
갑자기?
영훈
그냥… 꼭 받으라고.
은수
뭐야? … 무슨 일 있어?
영훈
별 거 아니야.
은수
별 게 아니야?
영훈
아니야. 괜히 말했다.
은수
뭔데.
은수, 영훈의 표정을 살핀다.
은수
왜. 말해봐. 어디 아파?
영훈
… 심각한 거 아냐.
은수
말해. 심각한 거 아닌데 왜 말을 못 하고 뜸을 들여?
사이
영훈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은수
영훈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고,
은수
… 엉덩이, 뭐?
영훈
엉덩이 기억상실증. 말 그대로, 그러니까 기억상실 같은 건데…
은수
뭐야? 지금?
영훈
은수
잠깐만. 아니, 그러니까, 일은 해도 괜찮은 상탠 거야?
영훈
그 정도까지는 아냐. 그냥… 근육들이 좀… 내가 이렇게 둔해.
은수
아프진 않고?
영훈
아프다기보단… 좀… 불편해. 왜, 가끔 앉아 있다가 일어날 때
엉덩이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 들 때 있잖아. 그게 진짜 근육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잊어서 드는 거래. 몸은 나름 신호를 보냈던 거야.
아, 심각한 건 아니야. 직장인 중에 나 같은 사람들 많다고 하더라고.
내가 괜한 말 했다.
은수
그럼… 뭐… 약 먹으면 되는 거야?
영훈
운동 잘하면 된대. 다시 근육들이 제힘을 쓸 수 있게.
은수
그러니까 내가 같이 운동하자고 했었잖아. 건강 신경 좀 쓰라고.
서른 넘으면 근육이 빠지기만 한댔어.
영훈
그러게. 미안.
은수
나한테 미안할 건 없지. 네 엉덩이한테 미안해야지.
영훈, 웃는다.
은수
지금 웃음이 나와?
영훈
(웃음기 뺀 얼굴로) 괜찮아진대, 운동하면. 다행이지, 처음엔 뭔가 싶더라.
모르는 사이에 근육들이 기억을 잃었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하고. 아무튼, 넌 건강검진 잘 받고, 비타민도 잘 챙겨 먹고. 앉아 있을 때, 설 때, 걸을 때, 거의 전부 몸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게 엉덩이라고 하더라.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 게 사실 몸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이래.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은수
선생님?
영훈
나 피티 끊었어
은수
피티?
영훈
응.
은수
… 역시 백번 말해봤자 경험이 빨라. 그치? 내가 그렇게 같이 다니자고 할 때는 들은 체도 안 하더니.
영훈
그러게… 아니, 엉덩이는 잘 신경 안 쓰잖아. 그냥 있나 보다… 하는 거지.
사이
영훈
…… 생각 많이 했어.
은수
?
영훈
은수야,
은수
영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은수
영훈
그러니까, 네가…
은수
영훈
네가, 내 엉덩이였던 것 같아.
은수
?
영훈
네가 내 엉덩이였던 거…
은수
뭐?
영훈
네가 내 엉덩이…
은수
장난해?
영훈
아니.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은수
진짜.
영훈
나, 예전처럼 일도 거의… 아니, 못 했어. 안 되더라. 하나도.
그냥 생활이 안 되더라. 그러니까… 알겠더라.
…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닌 거 아는데,
은수, 영훈의 말을 멍하게 흘려듣는다.
영훈
잘못 인정해.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넌데,
잊은 거야. 계속 후회해. 네 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 들을걸…
은수
영훈
이제 알아. 그거… 최선 아니었는데.
은수
영훈
그땐 정말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짬 내서라도 너를 만나려고 했던 게…
은수, 영훈을 흘겨본다.
영훈
아니, 짬을 낸다는 말이, 그런 말이 아니라…
은수
너,
영훈
은수
넌 진짜 내가 쉽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말들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은수, 카모마일 차를 빤히 쳐다보며
은수
있지, 나 아까부터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영훈
은수
왜 이거야?
영훈
뭐?
은수
왜 카모마일이냐고.
영훈
… 무슨 말이야.
은수
몰라?
영훈
몸에…
은수
난 이거 보고 무슨 생각 했냐면… 나 한창 피곤할 때,
일 끝나고 집 오면 다리 붓고, 잠도 잘 못 자서 고생할 때마다 찾던 거.
영훈
은수
그거 이름이 카모마일이라는 거, 아직 기억하는 줄 알았어.
몸에 좋지, 그래, 몸에 좋은 거 맞지. 근데, 몸에 좋은 게 다야?
영훈
… 미안해.
은수
미안해?
영훈
미안해.
은수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 말 좀 그만해.
은수, 앞에 놓인 드라이플라워를 바라본다. 꽤 오랫동안.

영훈, 어떤 말도 찾지 못한 채
은수의 표정만 살핀다.

긴 정적이 마주 앉은 둘 사이를 벌려 놓는다.

은수, 드라이플라워를 응시하며
은수
처음엔 얼마나 더 예뻤을까. … 처음엔 더 예뻤겠지. 생기 있고, 화려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말리는 거잖아. 색감은 다 빠져도, 그래도…
이렇게 형태는 남으니까.
은수, 드라이플라워를 만진다. 꽃이 바스러진다.
영훈
뭐 하는 거야?
은수
말랐을 때도 예뻤는데. 예쁜 건 그냥 그대로 두면 됐는데. 모르고 만졌네.
내가.
영훈
은수
엉덩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난 널 정말 많이 좋아했어. 사랑, 했어.
난 처음부터 네가 엉덩이 근육이 없었어도, 널 사랑했을 거야.
영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영훈
목소리 좀 낮춰.
은수
… 뭐?
은수, 영훈를 바라보고 웃는다.
은수
왜? 겁나? 사람들이 들을까 봐? 넌 잘도 말했으면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겁나니? 나야말로 오늘, 여기서, 네 엉덩이 얘기만 듣게 될 줄은
몰랐어. 엉덩이 기억상실증? 잃고 나서, 그래서, 내 생각을 했다고?
넌 진짜, 끝까지 네 생각만 하는구나.
영훈
네가 나한테 그만큼 중요하다고 말한 거잖아. 말뜻을…
은수
고마워.
영훈
… 어?
은수
가끔 내가 술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듣긴 하는데, 차라리 그랬으면 몰라.
우린 술도 안 마셨잖아. 맨정신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진짜 미친 거 같다.
너 말고 내가. 조금이라도 기대하고 이 자리에 나온 내가.
고마워, 다 정리할 수 있게 해줘서.
은수,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
영훈
(은수의 팔을 잡으며) 잠깐만.
은수, 잠시 영훈의 손을 쳐다본다.
영훈
(은수에게 쇼핑백을 쥐여주며) 알았어. 알겠으니까… 이건 가져가. 너 주려고 산 거잖아.
은수
(다시 영훈에게 쇼핑백을 건네며) 영훈아, 난 네 엉덩이가 아니야.
이걸로 너 단백질 쉐이크나 사 먹고, 네 엉덩이 건강부터 잘 챙겨. 응?
은수,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영훈, 은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잡지도 못한다.
영훈, 덩그러니 서서 자리에 남은 다 식은 음료 두 잔, 바스러진 꽃잎들, 쇼핑백을 바라본다.
막.
  1. * 점심(點心) 불교 선원에서, 배고플 때에 조금 먹는 음식을 이르는 말. 마음을 점검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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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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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라는 건 없지만,
어떤 시간은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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