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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족충만

김영화

제226호

2022.11.24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자기만족충만’은 작가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유 방식, 세계관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충만하다고 느낄 때까지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와 형식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는 작가중심적 작품들을 만납니다.

인물
지영
영화
감독


작업실.
조명 밝아지면, 혼자 앉아 유튜브를 보고 있는 남감독. 간간이 키득거린다.
곧 지영이 문을 삐걱 열고 들어온다.
지영
감독님, 안녕하세요.
감독
…… 어? 지영 씨.
지영
오랜만입니다.
감독
어어?
지영
예?
감독
왜 지영 씨가 왔지?
지영
제가 오면 안 되나요?
감독
지영 씨라는 얘긴 못 들었는데.
지영
그럼 무슨 얘길 들으셨는데요?
감독
아, 일단 앉아요.
지영
네.
감독은 부산하게 짐을 옮겨 자리를 마련해준다.
지영
어후, 향수 냄새.
감독
그, 지영 씨 오늘 뭐 때문에 온 거죠?
지영
캐스팅 때문에 미팅…… 근데 감독님 왜 갑자기 저한테 존댓말 하세요?
감독
아. (사이) 내가 습관이 돼서. 편하게 할게?
지영
네.
감독
캐스팅. 그럼 재호 소개로 온 건가, 혹시?
지영
네, 맞습니다.
감독
아…… 정말?
지영
네. 왜 그러세요?
감독
아니, 내가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지영 씨를 만나니까 당황스러워 가지고 좀.
지영
재호 선배가 제 얘기 안 하던가요?
감독
누구라고 얘긴 안 했고 그냥…….
지영
그냥?
감독
그냥 뭐 자기 후배라고 했지. 나는 지영 씨가 올 줄은 진짜 몰랐지. 하하.
지영
그러셨구나.
감독
지영 씨 잘 지냈어? 그때 그 친구랑 아직 만나나?
지영
누구요?
감독
이름이 뭐였더라. 왜 사진 한다던.
지영
아. 아뇨, 헤어졌어요.
감독
아이고, 미안.
지영
감독님 기억력 엄청 좋으시네요.
감독
그럼 뭐하고 지내나, 요즘은?
지영
저 졸업하고 나서는 그냥 계속 프로필 돌리고요, 오디션도 보러 다니고, 가끔씩 보조출연하고, 단역 몇 번 했고요.
감독
어떻게, 잘돼 가?
지영
글쎄요. 저 찾아주는 데가 잘 없어서. 그래서 감독님 작품 얘기 들었을 때 너무 좋았어요. 저한테까지 제안해주셔서 감사해요.
감독
내가 제안한 건 아니고, 재호가 자기 후배들 많다길래.
지영
시나리오도 얼른 읽어보고 싶고, 어떤 역할인지도 너무 궁금하고요. 대충 줄거리는 들었는데.
감독
아, 역할이…… 아직 시나리오는 최종본이 안 나와서 보여주긴 좀 그렇고. 근데 역할이 이제 변동이 좀 있을 것 같긴 한데.
지영
여자 역할은 한 명이라면서요?
감독
그렇지. 그게 원래는 그랬는데. 그리고 아직 결정된 건 아니고 이제 오늘 미팅해보고. 알지?
지영
네, 알죠. 근데 감독님, 저 진짜 열심히 할 자신 있고요, 학부 때 저 연기하는 거 본 적 있으시죠. 현장 뛰면서 그때보다 훨씬 많이 배웠고 발전했어요.
감독
음, 그래?
지영
오늘은 뭐 하면 되나요?
감독
그러니까 이제……
감독, 고민하다가,
감독
대사를 한번 읽어보면 되는데.
지영
네. 그럼 대사를 주시면…….
감독
그, 시나리오가.
감독은 어지러운 책상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찾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감독
내가 그걸 어디 놔뒀더라.
지영
시나리오 쓰고 계시던 거 아니었어요?
감독은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 하나를 집어내더니 내민다.
감독
우선 이거 읽어볼래?
지영
어, 이거 감독님 첫 장편 아니에요?
감독
맞아. <갈림길에 선 여자>. 거기 씬 넘버 삼십칠인가, 팔인가, 좀 긴 대사 있거든. 정복이 대사.
지영은 대사를 찾는다. 눈으로 빠르게 훑는다.
감독
준비되면 바로 시작……
지영
그날, 내가 현우 씨랑 통화하는 거 듣고 당신이 나 때렸던 날. 그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알아?
감독
어어…….
지영
당신은 모를 거야. 내 심정이 어땠는지. 그날은 이 넓은 집에 나 혼자뿐이었어. 베란다에 낡은 의자 있잖아. 당신이 왜 당장 안 버리느냐고 했던 의자. 깊은 새벽에 눈을 떠서 그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곧 버스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려. 윗집 남자가 씻는 소리도 들리고,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 나는 그 긴 시간 동안 당신만 기다렸어. 혼자 쓸쓸하게.
한숨 푹.
지영
그래. 나 현우 씨 사랑해. 당신보다 더. 이해 못 할 거라는 거 알아. 미친년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근데 있잖아, 당신한테 그럴 자격이 있어? 당신이 한 번이라도 나 먼저 생각해준 적 있었어? 나는 늘 당신 등만 바라봤어. 당신이 돌아봐 줄 때까지. (사이) 현우 씨는, 나한테 달려왔어. 그 새벽에.
희미하게 웃는다.
지영
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달렸어.
지영이 대본을 내려놓으면, 감독은 박수친다.
감독
오우, 잘하네, 지영 씨. 확실히 늘었네.
지영
감사합니다.
감독
흠. 근데 이번 작품에는 아무래도……
감독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딘가 상투적인 행동이다.
감독
내가 찾던 역할의 이미지랑 지영 씨의 마스크를 봤을 때는…… 미스매치? 그런 느낌이 약간 들어서.
지영
그 역할이 어떤 이미지인데요? 저한테 알려주시면 그런 이미지에 맞는 연기 보여드릴 수 있어요.
감독
아냐, 아냐. 이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지영은 뚫어져라 감독을 보고, 감독은 지영의 눈을 피한다.
감독
아, 이것 참. 지영 씨랑 꼭 작품 한번 하고 싶은데 말이야. 곤란하게 됐네.
지영
하시면 되는데, 하고 싶으시면.
감독
나는 너무 하고 싶은데, 이게, 지영 씨 이미지가 아무래도.
지영
제 이미지가 어떤데요?
감독
지영 씨한테는 반항심이 좀 있지. 어떤, 세상의 이면을 알고 있는 소녀의 느낌? 그게 참 좋은데, 이번 작품에서는 살짝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네.
지영
순종적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미지 찾으세요?
감독
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말하자면 그렇지.
지영
…… 저 그런 것도 잘해요.
감독
말했잖아.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고.
감독은 단호하다.
감독
이 작품은 아쉽게 됐는데, 내가 이제 지영 씨를 위해서 역할 하나 마련해볼게. 좀 작은 거라도. 괜찮지? 지영 씨는 비중 가려가면서 시나리오 받는 그런 배우 아니잖아. 내 후배 중에 이번에 졸작 찍는 애들 많거든.
지영
감독님.
감독
이게 참 야속하단 말이야. 지영 씨랑 작업을 하고 싶어도, 내 작품의 바이브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지영 씨가 들어오면 희한하게 뭔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거야. 왜 그럴까?
지영
결론은 저 안 쓰신다는 거네요. 앞으로도 쭉.
수습할 수 없는 정적.
지영
가보겠습니다.
감독
아니, 지영 씨.
감독, 급하게 지영을 붙잡지만 막상 할 말은 없다.
감독
…… 맥주나 한잔하고 가.
지영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요.
감독
아이,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앉아 봐. 그렇게 가버리면 내가 뭐가 돼.
감독은 냉장고를 연다. 값이 꽤 나가는 것 같은 와인 한 병과 그냥 맥주 세 캔이 있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맥주 두 캔을 들고 돌아온다. 캔을 따서 지영에게 내민다.
지영
안주는 없어요?
감독
없는데. 사 올래?
지영
아뇨.
지영, 맥주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벌컥벌컥 들이켠다. 크게 숨을 내쉰다. 감독도 자기 몫의 맥주를 딴다.
감독
짠도 안 하고……
지영
오디션 갈 때마다 들은 말이 애매하다는 거였어요. 뭔지 아시죠?
감독
원래 애매한 게 좋은 법이지. 너무 튀어도 손해예요, 영화에서는.
지영
배우는 튀어야 한다면서요.
감독
아이, 그니까 튀는 배우가 있고, 보편적 정서랄까, 그런 게 이제 딱 자기 옷인 배우가 있다는 거지.
지영
보편적 정서요.
감독
그래. 여기저기 잘 묻어갈 수 있는. 그게 오히려 길게 보면 좋은 거야.
지영
저 잘 묻어요?
감독
잘 묻지, 지영 씨는.
지영
마지막으로 본 장편 오디션에서 코 수술할 생각은 없냐길래 아, 좆 같아 가지고 수술비 주실 거냐고 하고 그냥 나왔어요.
감독
잘했어. 야, 누가 그러든? 하여간 요즘 무례한 감독들이 많아서 큰일이야.
지영
감독님 이 년 전에 술자리에서 저한테, 지영 씨는 쌍꺼풀만 하면 이쁘겠다고……
감독
아니, 그거는 쌍꺼풀 있는 눈이 유행일 때 얘기고, 요즘은 또 무쌍이 대세 아니야.
지영
휴.
감독
미안, 지영 씨.
지영
감독님, 높은 코로 사는 기분은 어때요? 키스할 때 안 불편해요?
감독
그건…… 괜찮던데.
지영
짜증 나네.
지영,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켠다.
지영
아니, 씨발, 영화는 삶을 담는 거라면서요. 살다 보면 예쁜 사람도 있고 좀 못난 사람도 있는데 왜 영화에는 예쁜 사람만 쓰냐고. 기만 아니에요, 그거?
감독
지영 씨, 알다시피 요즘은 또 안 그래요. 시대가 변했잖아. 개성파 연기파 배우들 얼마나 많아.
지영
시대는 그쪽에서만 변했나 봐요.
감독
어?
지영
아뇨. (사이) 감독님, 저 사실 그거예요. 잘생김을 연기하는 배우, 뭐 그런 거. 남배우들 중에는 많잖아요.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연기하는 거 보고 나면 갑자기 잘생겨 보이는 거. 여배우는 거의 없으니까 제가 도전해보고 싶은데.
감독
좋지. 지영 씨 충분히 예쁘고 매력 있어.
지영
그럼 저 쓰시든가요. 아니, 쓴다는 말도 졸라 웃겨. 쓰긴 뭘 써, 내가 연필이야?
지영, 빈 맥주 캔을 구긴다. 볼품없는 맥주 캔. 감독은 지영의 눈치를 보다가,
감독
지영 씨, 좋아하는 배우는 있나?
지영
임청하요.
감독
누구?
지영
임청하.
감독
내가 가수 청하는 아는데.
지영
임청하 모르세요? 홍콩배우.
감독
홍콩배우는 장국영밖에 몰라서.
지영
임청하를 왜 모르지. 영화 한다면서요. 중경삼림 안 봤어요?
감독
봤지.
지영
거기 킬러요. 금발에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
감독
글쎄. 그 경찰은 기억나는데.
지영
어이없어.
생각에 잠기는 지영.
지영
대학 때 짝사랑하던 언니가 있었는데요, 그 언니 처음 봤을 때 딱 금발에 트렌치코트 입고 있었어요. 나 참, 나는 임청하가 강의실 문 열고 들어오는 줄 알았잖아. 봄에, 딱 봐도 새 학기라고 뿌염 야무지게 하고 새로 산 트렌치코트 차려입은 느낌이었는데 그게 너무 귀여운 거 있죠. 사랑에 빠졌어요. 총에 맞듯이.
금발에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 임청하 등장한다. 지영은 그에게 다가간다.
지영
언니. 난 사람들이 금성무에 환장할 때 일편단심 임청하였어요. 금성무 걔는…… 좀 뭐랄까, 무례해. 무드가 없어. 나 언니가 쏜 총에 맞으면 하나도 안 아프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니는 하이힐 신고도 어떻게 그렇게 잘 뛰어요? 근데 편한 운동화 하나 사드리고 싶어요. 연골 챙겨야죠. 오래 일하려면.
임청하는 무심하다.
지영
우리 그때 우연히 마주친 적 있는데, 알아요? 학교 앞에 인형 뽑기 가게에서. 언니는 가게 앞에서 담배 피우고 있었고, 인형 하나 뽑아서 언니 드리고 싶었는데 다 망해 가지고 돈만 꼴아 박고……. 제가 가게 나와서 언니 앞으로 이렇게 슥 지나갔는데. 기억 안 나요? 근데 너무 잠깐이라 언니 무슨 담배 피우는지는 못 알아냈어요. 언니는 뭐, 기억 안 날 수도 있겠다.
임청하, 담배 물고 거침없이 퇴장.
지영
언니.
지영은 쓸쓸하다.
지영
눈물 나네……. 세상은 왜 늘 마음 같지가 않죠.
감독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적응해.
지영
가혹해, 원래 그렇다는 건 너무 가혹해.
감독
지영 씨는 참 열정이 넘치네. 요즘 배우들 같지 않게.
지영
열정이 넘치면 뭐 해요. 연기도 못 하는데.
감독
야, 열정이 중요하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배우한텐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지영
근데 왜 저 캐스팅 안 하냐고요, 씨발.
감독
내가 말했잖아. 지영 씨가 별로라서 안 쓰는 게 아니라 이번 작품에 지영 씨 이미지랑 어울리는 캐릭터가 없어서……
지영
그놈의 이미지. 감독들은 고상한 단어로 포장하는 게 취미예요?
사이.
지영
근데 저도요, 감독님 영화 좋아서 하고 싶은 거 아니거든요? 사실 별로예요. 그 뭐더라. <아버지의 카메라>? 그거 보다가 잤어요. 제목부터 아버지의 카메라가 뭐예요. 여자는 나오지도 않고, 꼴랑 한 명 나오는 게 아버지랑 묘한 분위기 조성하는 아들 여자친구? 구려요, 진짜.
감독
지영 씨, 실수하지 마. 내가 지금 지영 씨 마음 심란한 거 알아서 가만있는데……
요란한 휴대폰 벨소리. 감독은 잡동사니 사이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간신히 찾는다.
감독
아 이 새끼……. 지영 씨, 잠깐만.
감독은 지영과 멀찍이 떨어져서 전화를 받는다.
감독
야 인마, 서재호. 넌 새끼야 왜 일을 그딴 식으로 하냐?
지영
저는 진짜 잘해보고 싶었거든요, 기회만 주어지면.
감독
아니, 지영 씨를 보낼 거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너 그냥 여배우라고만 했잖아.
지영
근데 그 프레임에 얼굴 들이미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죠.
감독
맞긴 맞지. 누가 아니래? 근데 알잖아, 내가 찾는 건 지영 씨 같은 스타일이 아니고…… 아, 너는 몇 년을 같이 일하고도 그거 하나를 파악을 못 하냐. 너를 믿은 내가 등신이지.
지영
몇 년을 일을 해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가 감독이라면 당장 나 캐스팅할 것 같은데? 왜 안 하지? 나 잘하는데? 매력 있는데?
감독
지영 씨는…… 아니잖아. 아무리 요즘 배우가 궁해도 그렇지.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새끼야.
지영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예술인데.
감독
어, 쌍방울? 갈게. 한 십오 분. 알았다, 끊어.
지영
나 좀 붙잡아 봐…… 씨발.
감독
(다가온다) 어? 지영 씨, 뭐라고?
지영
아니에요.
감독
어쩌지, 내가 저녁에 미팅이 있어서. 이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지영
그러세요.
감독
지영 씨는 안 가?
지영
저 여기 좀만 있다가 가면 안 될까요. 생각 정리 좀 하게요. 아무것도 안 건드려요.
감독
(시계 본다) 좀 있으면 내 후배 한 명 올 거거든? 그럼 그때 가. 혹시 더 일찍 나갈 거면 문만 잘 닫고 가고.
지영
네.
감독
지영 씨, 담에 제대로 술 한잔하자. 내가 살게. 오늘 와줘서 고맙고, 잘 들어가요.
감독, 지영의 어깨를 두드리고 퇴장. 도어락 소리.
지영은 엎드린다.
얼마간의 정적. 지영,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지영
오늘 같은 날에는 비가 오면 좋겠어요. 다 씻겨 내려가게. 더러운 거 치사한 거 끔찍한 거, 내일 되면 다 하수구로 흘러가게. (사이) 현우 씨. 그때 나한테 왜 이런 일 하고 다니냐고 물어봤었죠. 나한테는 이게 숨 쉬는 거랑 똑같아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으려면 무조건 이걸 해야 해요. 살려고 하는 거예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사이.
지영
이해할 수 있겠냐고요. 현우 씨.
사이.
지영
니가 날 이해할 수 있어?
다시 정적.
잠시 후, 발랄한 도어락 소리. 지영은 그제야 일어서 짐을 챙긴다.
바삐 들어오는 영화. 지영을 보고 놀란다.
영화
아, 깜짝이야. 누구세요?
지영
저 현우 감독 보러 왔는데 안 계셔서요. 이제 가려고요.
영화
어? 선배님 방금까지 작업실이라고 하셨는데.
지영
그래요? 길이 엇갈렸나. 하여튼 저는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지영 서둘러 나가려는데,
영화
잠시만요. 혹시 <우리한테 왜 이러세요> 출연하신 배우님 아니세요?
지영
헉.
영화
맞구나. 긴가민가했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김영화라고 합니다. <우리한테 왜 이러세요> 너무 재밌게 봤어요.
지영
감사합니다. 저는 정지영이에요.
영화
이런 데서 만나니까 반갑네요.
지영
저도요. 누가 저 알아봐 준 거 처음이에요.
영화
배우님 연기가 너무 좋았는데 짧아서 아쉬웠어요.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거든요.
지영
대사 한 줄밖에 없었는데.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영화
아뇨, 진심이에요.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지영
당연하죠. 아, 잠시만요…….
지영은 가방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뭉치를 꺼내 내민다.
지영
이거 좀 구겨졌긴 한데 제 프로필이에요.
영화
어머, 감사합니다. (넘겨본다) 경력이 엄청 많으시네요.
지영
전부 단역이거나 보조출연이고요, 별건 없어요.
영화
아니에요. 대단하세요.
지영
영화 씨는 어떤 작업 하세요?
영화
저 시나리오 쓰고요, 조연출도 하고. 아직 구상 단계긴 한데 내년에는 저도 연출작 하나 들어갈 것 같아요. 단편이요.
지영
와, 멋져요.
영화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아, 선배님한테 전화해볼까요?
지영
아뇨, 괜찮아요.
영화
그럼 나중에 선배님 오시면 전해드릴게요.
지영
아뇨!
산뜻한 정적.
지영
이제 안 만나도 돼서.
영화
아, 그래요?
지영
저 가볼게요. 또 봬요.
둘 지나치려는데,
지영
근데 밖에 비 와요?
영화
아뇨.
지영
우산 들고 오셨길래.
영화
비가 올 것 같아서요.
지영
아…….
어디서 들은 대사 같은데, 지영은 생각한다. 영화는 지영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할 일을 한다. 얼마간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영, 가벼운 걸음으로 퇴장.
마침.
지영의 진짜 영화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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