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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눈

다른 손(hands/guests)

신윤주

제227호

2022.12.08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등장인물
제희
다움


장소
썰매장


약속이라도 한 듯 다움과 제희, 썰매장에 왔다. 마지막일지 모를 눈썰매를 타기 위해.
제희
올라가고,
다움
내려간다.
제희
내려가고,
다움
올라간다.
그렇게 한참 엇갈리며 탄다. 분명 서로를 의식하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 뗀다.
제희
나도 익히 사계절을 보내왔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메아리친다) 너랑 겨울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글쎄.
사이.
제희
나는 아주 잘 미끄러질 줄 알아. 오랜 반복 끝에 더 수월하게 미끄러지는 방법을 터득했거든.
다움
(경사 오르며 스스로에게) 넘어지지 않게 조심.
제희
사실 그다음이 정말 쉽지 않은 거야.

다치지 않고 일어나기.

눈이 잦아든다.
제희, 썰매 타고 발을 구른다. 제법 나아가는 듯싶더니 멈추고 만다.
꼭대기의 다움, 아랑곳하지 않고 끄트머리로 간다. 거리를 두어 부딪치지 않게끔 내려올 준비한다.
잠시 후 다움의 썰매도 제희와 비슷한 지점에서 멈춘다.
제희
저기.
나 좀 밀어주라. 응?
다움
내가 왜.
제희
딱 한 번이면 되는데.
다움
나도 내려가야 해.
다움, 외면하고 발을 구른다.
제희, 아쉬움에 더 가까운 꼭대기로 가려 한다. 그러나 서너 걸음 만에 미끄러져 내려온다.
제희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이 정도면 겨울을 거뜬하게 날 수 있지.
일렬로 경사를 오르는 그들. 앞서가는 다움의 다리가 점차 느려진다. 이내 넓은 보폭으로 가까이 온 제희. 다움 옆에 슬쩍 붙어 선다.
제희
그냥 밀어주기 싫은 거면 내기라도 할까.
다움
아니.
제희
음, 눈 종류 이어 말하기 하자. 지는 사람이 밀어주는 걸로.
다움
됐어.
제희
더 신나게 타면 좋잖아.
다움
충분히 재밌는데.
제희
자신 없구나.
다움
(고개 돌린다) 너, 진짜.
기가 차는 다움, 다시 앞을 보고 묵묵히 올라가는데
제희
함박눈.

진눈깨비.

(손가락 내밀며) 2대 0이야. 벌써.
다움
한다고 한 적 없거든.
제희
그럼 내가 이긴 거네.
아직 할 거 많은데. 소낙눈도 있고,
다움
눈보라.
제희
오. 싸라기눈.
다움
얼음눈.
제희
가루눈.
다움
눈송이.
제희
태풍의 눈.
다움
그건 내리는 눈이 아니잖아.
제희
말만 되면 되는 거지.
다움
무슨 룰이 이래.
제희
난 두 개나 더 얘기했잖아. 계속 안 하면 네가 지는,
다움
풋눈.
제희
딴눈.
다움
(째려본다) 눈비.
제희
세모눈.
다움
(한숨) 눈뭉치.
제희
끝눈.
꼭대기에 다다른 다움과 제희. 말없이 잠깐 하늘을 본다.

눈이 드문드문 나리고 있다.
제희
안녕.
다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희를 쳐다본다.
제희
말 걸어보는 거야. 대답할지도 모르니까.
다움
눈이 어떻게 말을 한다고.
제희
있지. 처음 말하는 건데, 나 어릴 때 눈이랑 얘기한 적 있어.
다움
거짓말.
사이
제희
네가 모른다고 해서 거짓말이 될 순 없어.
제희, 썰매 줄을 꼭 잡고 앉아 두 다리를 방방거린다.
제희
자, 밀어줘. 힘껏.
다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썰매를 내려두고 뒤에서 제희를 밀어준다.

내려가는 제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다움, 혼자 발을 굴러 내려온다.
제희, 다움이 내려올 때까지 그대로 썰매에 앉아 기다린다.
제희
역시 밀어주니까 다르다. 봤지, 엄청 빠르잖아.
다움
그러네.
제희
이제야 진짜 눈썰매 타는 기분이야.
다움
내가 제대로 밀어주긴 했지.
제희
올라가자. 이번엔 내가 너 밀어줄게.
다움
(고개 젓는다) 난 좀 쉴래.
앉아서 한숨 돌리는 다움.
제희, 어지러이 발자국 남기며 썰매장을 둘러본다.
제희
뭐든 많아야 재밌는데. 눈도, 사람도.
다움
…….
제희
둘밖에 없어서 좀 썰렁하다. 저기 매점도 닫혀 있고.
다움
오히려 불편할걸.
제희
뭐가?
다움
붐비면 줄도 길 테고.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제희
다 같이 즐거울 수도 있지 않나.
사이.
제희
오늘 내리는 눈이 마지막이라고들 하더라.
다움
응.
제희
근데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영영 사라지는 거.
다움
그렇다기엔 아무도 아니라고 하지 않잖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뉴스에서도, 세계 어디서든.
제희
…….
다움
…….
제희
…… 아니야.
다움
어?
제희
나라도 하려고. 아니라는 말.
다움
넌 왜 오늘 여기 온 거야?
제희
놀고 싶으니까.
다움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잖아. 썰매타기 말고 다른 거 할 수도 있고.
너도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제희
나는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
소멸되지 않을 거라는 걸.
다움
본다 해도 어떻게 알겠어.
제희
얼추 알아차릴 순 있겠지. 감으로.
다움
(뜸 들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제희
뭐야. 그 반응은.
다움
아까 그랬잖아. 눈이랑 대화했었다고.
사이.
제희
나는 한국에 와서 처음, 눈을 봤어.

추운 것도 잊고 계속 바깥에 서 있을 만큼 정말 아름다웠지. 내리는 눈을 보고, 내리는 눈을 맞고 있는데 누가 자연스레 인사했어. 안녕, 하고.

실은 대화는 아니야.

몇 번이나 말 걸어줬는데 대답을 못 했거든. 제대로 할 줄 아는 한국말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도 그 이후로 내가 눈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 비록 내가 태어난 나라에는 겨울이 없지만.
사이.
제희
만약에 말이야. 눈이 오지 않는다면 썰매장은 어떻게 되는 걸까.
당연히 문 닫으려나.
다움
…….
제희
있는 거랑 없는 건 완전 다르잖아. 그래도 우리 같이 놀 때 자주 왔던 곳인데.
다움
그럴 리 없어.
제희
어?
다움
폐장하지 않을 거라고.
제희
들은 거라도 있어?
다움
그건 아니지만… 눈을 대신할 수 있는 건 많아. 털, 물, 거품, 얼음, 인공눈.
지금 썰매장에 쌓인 눈도 대부분 인공적으로 만든 거야.
제희
앞으로 전부 인공눈이어도 많이들 올까.
다움
올 사람은 오겠지.
제희
모든 게 달라지잖아. 진짜 눈이 없으면.
다움
…….
제희
인공눈 위에선 넘어지기도 쉽고 다치기도 쉽대. 얼음처럼 쉽게 딱딱해져서. 기억나? 예전에 우리 반에 인공눈으로 눈싸움하다가 눈덩이에 맞아서 이빨 빠졌던 친구도 있었던 거.
다움
다행히도 유치였어. 다들 한 번씩은 빠지는 이.
제희
위험하다는 건 변하지 않아. 걔는 그때 울면서 빠진 이빨을 땅에다 묻었대.
사이.
다움
잘 지내고 있을까.
제희
누구.
다움
콩이. 내가 키웠던 병아리.
제희
그럴 거야. 아주 깊이 묻어뒀잖아.
다움
그랬지.
제희
흙도 여러 번 다졌고. 우리가 묻어주는 걸 본 사람도 없지.
다움
다시 가 본 적 있어?
제희
…… 글쎄.
다움
나는 얼마 전에 갔었어.
제희
어?
다움
그냥 잘 있나 궁금해서. 상자라도 한번 확인하고 싶었는데 없더라고. 이쯤이겠지 싶은 곳을 몇 번이나 파고 또 팠는데도.
제희
어딘지는 너랑 나밖에 모르잖아.
다움
누가 알아차린 거 아닐까.
제희
난 아니야.
다움
그래.
제희
아니라니까.
다움
알아. 내가 위치를 기억 못 하는 걸 수도 있고.
사이.
다움
눈 올 때까지는 키우고 싶었는데.

그냥 좀 아쉬워. 걔는 겨울이 있는지도 모르고 떠났으니까.
눈발이 서서히 굵어지더니 마침내 펑펑 내린다.
다움
함박눈.
제희
눈이다.
다움
눈이네.
제희
진짜 마지막인가 봐.
다움
느껴져?
제희
응.
다움
눈 내릴 땐 이상하게 춥지 않더라.
제희
우산 없어도 이따 집에 갈 수 있겠지.
다움
주머니에 손 넣지 말고 다녀.
제희
도착할 즈음엔 내가 눈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다움, 소리 내어 웃는다.

제희, 타던 썰매를 내버려 두고 외투 안쪽 주머니를 뒤적인다. 무언가를 꺼내 펼친다. 다름 아닌 포대.
다움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제희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지. 마지막이면 한 번 타 볼까 하고.
다움
엉덩이 안 아프겠어?
제희
괜찮아.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어.
너도 줄까? 하나 더 챙겨왔는데.
다움
응.
펄럭이는 포대를 손에 쥐고 경사를 오르는 제희와 다움.
제희
저 밑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두 사람, 마지막 눈썰매를 탄다.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서둘러 일어나는데,
제희
방금 뭐 떨어졌어.
다움
아무 느낌도 안 났는데.
제희
네 옷 단추인가 봐.
다움
하필 지금.
제희
게다가 하얀색이야.
다움
일단 썰매나 더 타러 가자.
제희
이것도 꽤 재밌는데. 보물찾기하는 거 같잖아.
어느새 흰 눈 위로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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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주

신윤주
끝을 맞이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온갖 종류의) 여유를 지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냅니다. sywr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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