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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 있는 사람들

다른 손(hands/guests)

윤소희

제227호

2022.12.08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등장인물
반려동물을 두고 갈 수 없어 남겨진 사람
휠체어를 타고 있어 남겨진 사람


장소
버려진 땅


시간
지구 멸망을 앞두고


지구의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는 지진.
반은 휠의 휠체어 손잡이를 꼭 잡고 있으며
휠의 무릎에는 반의 반려동물 이동장이 놓여 있다.
거센 바람에 쓰레기가 날아온다.
봉투에서 뜯어져 날아다니는 일반 쓰레기들.
이곳저곳 부딪히며 소리를 내는 폐플라스틱들.
두 사람은 몸을 웅크리고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여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곧,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우주선이 이륙한다.
우주선이 쏟아내는 굉음이 더해진다.
반려동물 이동장이 들썩들썩거린다.
반은 엉엉 운다. 한참 울다가 의연하게 눈물을 닦는다.
이제 끝이야.
여기가 땅끝이군요. (사이) 저는 여기쯤에서 죽을까 하는데.
(한참 생각하다) 저 앞에까지는 가 보면 어때요.
그것도 좋고요.
반과 휠, 조금 더 이동해본다.
힘들죠. 미안합니다.
아녜요.
이제 진짜 끝인가 봐요.
네, 진짜 좆 같네요.
예? 예…
그렇잖아요. 잘난 놈들은 다 떠났어요. 씨발.
다시 생각하니까 화나네. 안 그래요?
아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잘나진 않았죠.
얘기하는 꼬라지 좀 봐요. 뭐 양보하라고? 존나 웃기고 있네.
휠과 반, 하늘을 올려다본다.
반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작동시켜 본다.
터질 리가 없지.
배터리 남았어요?
네. 근데 이제 뭐 쓸모없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음질의 확성기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
곧… 이륙…합니다. 곧… 곧… 곧…
반, 다시 휠체어를 멈추고 바닥에 털썩 앉는다.
진짜 우주에 나가면, 수술 상처가 터질까요?
글쎄요. 가 보질 않아서.
하긴. 거기서 터져 죽나, 여기서 죽나.
아까 그 새끼들 다 터져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어린 학생도 있었는데. 잘 탔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미안해요.
됐어요.
사이.
미안합니다.
뭐가요.
그래도 제가 없었으면 더 가 보셨을 텐데.
어차피 다롱이 때문에 못 타요.
그래도 그쪽이라도 탔을 수도 있잖아요.
아뇨. 다롱이 두곤 안 가요.
네에.
갑자기 하늘에서 모래가 쏟아진다.
으악! 미쳤나봐. 우박인가?
(살펴보더니) 모래인 것 같은데요.
모래가 왜 하늘에서 쏟아져요? 진짜 멸망하나 보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글쎄요. 하루? 아니 12시간? 6시간? 1시간?
차라리 10분 뒤면 좋겠다.
왜요?
끝이 뻔한데, 길면 길수록 나만 고통스럽잖아요.
저는 기다리는 건 익숙한데.
그래도 저도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냥 눈 깜짝할 사이에 죽으면 좋겠어요.
저어…… 제가, 다롱이랑 함께 있을 테니까
그쪽이라도 정말 가는 게 어때요.
뭐라고요? 안 간다니까요. 이리 주세요.
반이 반려동물 이동장을 휠의 무릎에서 도로 가져온다.
미안합니다.
인생의 절반을 같이 살았어요.
그쪽이 보기에 그냥 말 못 하는 동물일지 몰라도 저한테는 아니라고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 우리 둘이 싸워서 뭐해요. 차라리 웃긴 얘기나 해요.
네.
두 사람, 말이 없다.
(횡설수설하며) 그…… 여러 번 이 땅에 위기가 있었대요.
25억 년 전부터 5억 년 전 사이에 산소가 갑자기 급증해서.
지구가 얼음으로 뒤덮이고. 지구 전체가 얼어붙었대요.
그 뒤에도 다섯 번이나 대멸종이 있었대요.
화산이 폭발하거나 운석이 떨어지거나.
…… 얼어 죽거나 타 죽는 것보다, 운석에 맞아 죽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러네요.
그래도 이렇게 어떤 변곡점마다 기록에 남는 거잖아요.
우리도 기록에 남을까요?
설마요. 말씀하신 건 멸종이고, 지금은 멸망이잖아요.
그러네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고 저는 저 사람들이 살아남을 것 같지도 않아요.
왜요?
저 어릴 때 잠깐 교회 다녔거든요?
노아의 방주 얘기 알죠. 모든 종을 한 쌍씩 넣은 배.
네에.
나머지는 전멸했잖아요. 근데 이게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이란 말이죠.
생각해보세요.
음.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배 흉내를 낸다)
그러니까 배가 도착할 땅이 있어야 하고, 배가 홍수를 견뎌야 하고,
그 배 안에서 모든 종이 한 쌍씩 건강하게, 기능에 하자가 없게,
정상적으로, 다 뭐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식량이 부족하면?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거나 헤치면?
극한 상황인데. 평화롭겠어요?
하나라도 틀어져 봐요. 그러면 거기서 끝이죠.
…… 목사님한테 안 혼났어요?
일주일 만에 그만뒀어요.
그렇게 위험을 거치고 살아남으면, 종이 한 단계 발전하려나요?
그렇게 발전하는 능력이라면, 그건 이기심일 거예요.
사이.
…… 노래나 들을까요?
좋아요.
반, 휴대폰으로 노래를 튼다.
노래가 얼마간 재생되다가 끊긴다.
띠리링- 반의 핸드폰 배터리가 소진되어 전원이 꺼진다.
다시 바람에 쓰레기가 날아와 반의 얼굴에 부딪힌다.
아오, 진짜.
쓰레기를 살펴보면 버려진 상품 포장지다.
아, 배고파.
얼마 전에 우리 마을에 눈이 내렸거든요.
이렇게 문명이 발전한 뒤로는 처음 내리는 눈이었어요.
TV나 인터넷에서 눈을 본 적은 있었는데, 실제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와. 우리 동네엔 눈 진짜 많이 오는데.
저는 그게 경고라는 걸 눈치챘어요. 먼저 온 미래.
먼저 온 미래?
네. 지구가 이렇게 멸망하는 미래에서, 한 조각 미래를 잘라내서
과거로 경고를 보내는 거죠. 진짜 그렇게 살다간 이렇게 될 수 있어. 알겠어?
이러나저러나 바꿀 수 없는 거 아니에요? 미래가 이미 왔으니까.
뭐, 적어도 경고를 눈치챈 사람들은 우주선에 먼저 탔을 수도 있겠죠?
나는 눈치를 챘는데도, 이번에도 느려서 여기에 멈췄네요. 남겨졌어요.
…… 어떻게. 좀 더 가 봐요?
역시 더 가 보고 싶으신 거죠.
그쪽은요?
전 괜찮아요. 정말로.
제가 직접 가는 거면 몰라도.
반이 잠시 반려동물 이동장을 보며 고민한다.
그때, 사방에서 물벼락이 내리친다.
두 사람, 흠뻑 젖는다.
아!!
역시 가셨어야 했나 봐요.
하…… 됐어요. 여기나 저기나. 제가 가봤자 얼마나 가겠어요.
저보단 많이 가시겠죠.
저 어릴 때 여기 손가락 찢어져서 다섯 바늘 꿰맸거든요.
이것도 수술 상처니까 터지겠죠?
아까 그 학생은 배 전체를 갈랐다던데. 그것보단 낫겠죠.
하긴. 손가락에 내장은 없으니까.
우리 말고도 여기저기에 남겨진 사람이 많겠죠?
그렇겠죠. 어쩌면, 우리 정도면 많이 온 걸지도 몰라요.
흉 있는 사람들만 남겨졌겠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흉터 하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 사람이 더 적지 않을까요? 생각해보세요.
우주선에 남는 자리 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퍼트린 거 아닐까요?
(민망한 듯) 지금 너무 자기합리화 같았어요?
저랑 여기서 죽으시는 것보다,
좀 더 사람 많은 곳으로 가보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됐어요. 가다가 혼자 죽는 것보다 이게 낫죠.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을지도 모르고.
네에.
혹시… 혼자 있고 싶으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다 끝난 마당에 뭐,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아니에요. 같이 있어서 좋습니다.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 않아서요.
네에.
뿌연 연기가 서서히 두 사람 주위에 깔린다.
(이동장을 감싸며) 어어, 뭐지. 유독 가스 같은 건 아니겠죠?
아, 좀 편하게 가고 싶은데.
(기침한다) 저, 감사해서 그러는데요.
네?
제가 약을 가지고 있어요.
약?
잠 드는 약. 제가 잘 못 자거든요.
아, 네에…… 그런데요?
원래는 저 혼자 남으면 쓰려고 했는데. 감사해서.
원하시면 드릴게요.
네?
잠들다 가면 편하잖아요.
그럼 그쪽은요.
저야 뭐. 기다리는 건 잘해서.
됐어요.
생각해보세요. 저는 괜찮아요.
어……
반, 반려동물 이동장을 내려다본다.
갑자기 강렬한 바람이 불어온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늦기 전에. 생각해보세요.
반,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바람이 너무 거세다.
반려동물 이동장이 날아가지 않게 꼭 붙잡는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방금 전 떠났던 우주선이 곤두박질쳐 떨어진다.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암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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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희

윤소희
느릿느릿 공부하고, 글을 쓰고, 연극을 만들고 있다. ysohee0621@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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