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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을 사랑하는 일

2022 희곡 쓰기 총평

양근애

제228호

2022.12.22

희곡을 읽는다. 먼 계절의 이야기부터 차례차례. 몇 개의 이야기가 뒤섞인다.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구한다. 자세히 들어보면 이런 말이 아닐까. 아무도 슬프지 않은 밤은 없다. 페이지를 그만 덮고 창을 연다. 길을 잃고 사람을 부수고 기어코 시간을 만들어내는 증언들, 거기서 꺼낸 소란의 허처(虛處). 2022 [희곡]의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에는 사라지는 것을 사랑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안간힘이 있다.

단호한 미련, 수동의 능동

‘달아나다’는 수동으로 보이지만 능동일 수밖에 없는 동사다. 도망쳐야 살 수 있다면 속박을 벗고 내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지수의 <달아나다>에는 그럴 수 없는 존재들의 곤경이 있다. ‘셀라’는 압착기에 손이 찍히는 사고를 당하고 손가락을 절단한 채 양계장에 돌아왔다. 돌아온 집에는 닭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심지어 관객에게도 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지만 이십 년을 여기서 일한 ‘미우’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셀라는 그 소리를 ‘비명’으로 듣는다. 셀라 자신이 그런 비명을 질렀기에 알 수 있다. 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뒤엉켜 매일 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한,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일하다 다쳤지만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일할 능력을 잃어버린 쓸모없는 존재 취급받는 것도 똑같다. 그러므로 ‘닭은 알 낳는 기계가 아니라 그냥 닭’이라고 항변하는 셀라의 말은 물러설 수 없는 직설이다. 이 올곧은 말을 살아 있게 하는 건 케이지를 나간 닭들이 뛰는 소리와 그것을 본 셀라의 웃음이다. 이 순간, ‘달아나다’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변형 가능한 원형의 동사가 된다. 이번에는 닭들이 도망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마치 그것이 정말 가능이라도 한 것처럼”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무대 위에서도 생생할 것 같다.

구지수 작가의 희곡 「달아나다」의 대사 일부가 발췌되어 있다. “셀라: 가둬둔 닭들 밥 먹이는 거나 닭이 낳은 알을 뺏거나, 닭 죽이는 거 말고. 다른 일이 있을 거 아냐.”

신윤주의 <끝눈>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를 눈썰매를 타기 위해 썰매장에 온 ‘제희’와 ‘다움’은 땅에 묻어준 병아리 콩이를 기억한다. 아무도 없는 하얀 눈밭, 더는 아무 발자국도 남지 않을 마지막에 이들이 도착한 이유는 “두 눈으로 직접” “소멸되지 않을 거라는 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구 멸망을 앞두고, 버려진 땅에서, 남겨진 두 사람’을 다룬 윤소희의 <흉 있는 사람들>에서도 비슷한 마음을 본다. 끝을 앞둔 자들, 그러니까 더는 선택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자들의 마지막 선택은 기다림이다. 우주선에 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마음. 멀리 있는 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찾는 마음이라면, 그것을 그리움이라 불러도 좋겠다. 그리움 속에서, 끝까지 연연하는 단호한 미련이 지체시키는 시간이 있다.

전이되는 이야기

박초원의 <이웃의 개>에서 ‘문숙’은 2009년 2월에 죽은 개가 오기를 기다린다. ‘보라’는 무당인 엄마에게 동물에겐 영혼이 없다고 들었지만 문숙의 말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기억이 있는 한 “죽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숙’은 죽음이 멀지 않은 아픈 개를 자기 삶에 들이게 된 내력을 말한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 온 개를 바라본다.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를 진실을 말하려는 충동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이곳을 떠나는 자에게 옮겨가 다른 세계로 전이된다. 곧 이사를 가는 보라에게 던져진 문숙의 이야기는 이제 그의 것만이 아니다.
최서율의 <어느 날 가슴속에 이끼가 생겼다>에는 마치 어떤 이야기를 받아낸 듯한 돌멩이와 꽃잎과 이끼가 있다. 이방인을 모르는 척하는 조용한 마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직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돌멩이와 꽃 그리고 보라색 이끼가 보인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거리만큼이나 언어는 낯설지만 아이들은 지금 가장 나쁜 욕이 ‘책상’이든 ‘의자’든 중요하지 않은 시절을 지나는 중이다. ‘장보’는 자유로운 이름을 가진 자신이 하나도 자유롭지 않다고, “나는 한국 아이예요, 인도네시아 아이예요?”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낼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텅 빈, 아무것도’의 세계에서 온 친절한 이웃과 환한 태양이 아닐까.

의심을 그만두지 않는 마음

이경헌의 <래빗 헌팅>은 미술 교사와 수학 교사가 숙직실에서 포커를 치면서 대화를 나누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안윤주’라는 학생의 죽음이 있었고 미술 교사는 학생이 죽기 전, 그 학생과 수학 교사가 교무실에 있는 걸 보았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미술 교사가 수학 교사를 의심하는 이유가 합당해 보인다. 박 선생은 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지도 않고(“사람은 원래 죽습니다. 애들도 사람이고요”)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 것처럼(“자살하는 애들은 대부분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습니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어려운 이 선생과 달리 이 판의 흐름을 쥐고 있는 건 박 선생 쪽이다. 급기야 박 선생은 임용과정을 들먹이며 이 선생을 몰아붙인다. “이 선생이 비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단지 무능했기 때문이라고요”. 진실을 꺼내 보일 생각 없이 긴장만으로 지속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희곡은 포커를 닮았다. ‘래빗 헌팅’을 제안하는 박 선생의 말과 그가 내민 봉투는 이 선생이 아닌 독자/관객의 시선에 닿는다. 이제 의심은 무대 밖으로 넘어왔다. 독자/관객은 이 게임에 베팅하지 않았지만 이 게임의 결과에는 연루되었다. 극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확률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우연은 계산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말은 수학 교사의 첫 대사였다.
김호야의 <핑, 퐁핑, 퐁>에는 의심하면서, 그러나 의심받는 세계를 떠나지 않으려는 인물이 등장한다. ‘한민아’와 ‘홍성열’은 종교시설 지하 휴게실에서 재회한다. 둘이서 즐겨 쳤던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대화가 이어진다. 핑퐁처럼, 그러나 규칙적이지도 리드미컬하지도 않게 원망과 애원과 오해와 해명과 체념이 오간다. 어쩐지 대화가 계속되어도 성열은 사이비종교 시설에서 민아를 데리고 나가지 못할 것 같다. “제발, 날 설득해줘”로 시작되는 민아의 말들로부터 민아를 구해낼 힘이 성열에게 있을까. 때가 타고 몸이 뜯기고 버려지는 곳이 아니라 차라리 비를 맞지 않는 유리 상자 안에 있겠다는 민아 앞에, 성열은 자물쇠 없는 열쇠를 쥐고 선 것 같다.
박예지의 <한여름 밤의 히치하이커>에서 ‘유월’이 만난 ‘미정’, 아니 유월에게 온 미정은 누구일까. 한여름 밤, 비가 쏟아지는 도로 위, 히치하이킹하는 70대 여성이라는 조합이 심상치 않다. 미정은 죽지 못해 사는 유월에게 쳇 베이커의 음악을 틀어달라고 한 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정이 ‘난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어요. 근데 갑자기 당신에게 빠져 버렸어요’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춤을 추는, 그 거짓말 같은 장면에 눈길이 한참 머문다. 미정이 집을 나와 바다를 보러 간 이야기에서 “빗소리, 점차 파도 소리로 바뀐다”는 지문을 내려가는 데도 꽤 시간이 필요했다. 미정의 노래와 춤, 그리고 그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진짜로 믿게 만드는 파도 소리가 없었더라면, “내 맘대로 안 된다 뿐이지, 사실 뭐든지 다 어떻게든 되어가고는 있으니까요”하는 대사에 유월도 나도 끝내 설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예지 작가의 희곡 「한여름 밤의 히치하이커」의 대사 일부가 발췌되어 있다. “유월: 여분 동아줄이요? 미정: 내 목숨줄은 아닌데 붙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거요.”

여기 스물다섯 개의 희곡. 스물다섯 개 이상의 이야기는 어쩌면 ‘다시 쓰는’ ‘사랑의 발명’이 아닐까. 그 사랑은 사라질 것이 분명한 세계를 향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이상하다. 이제 현실에 답하려면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물어야 한다는 듯, 죽은 언어와 죽은 동물, 아니 사라졌으나 없어지지 않은 존재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이 희곡들에 있다. 놓아버린 꿈들이 뒷덜미를 잡거나 고단한 하루가 발목에 걸려도, 길을 잃고 한참 돌아가더라도 기어이 뒷모습을 보겠다는 마음. 어쩌면 그것은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보겠다는 의지, 곧 무너지는 세계를 구경하며 서로를 빈틈없이 꽉 껴안는 마음(하수진, <사랑의 발명>)의 여러 얼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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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

양근애
물음표를 그만 놓아주고 싶은 계절에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극장에 간다.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2020)를 썼다. rootsfl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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