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발송인만 있는 편지를 쓰는 동안

쓰는 동안

최현비

제230호

2023.02.23

[쓰는 동안]에서는 읽고 쓸 때의 습관, 글쓰기의 원동력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 생활 속에서도 작가로 살아가는 방법 등을 주제로 극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연말이건 연초이건 날짜가 지나가고 해가 바뀌는 것에 큰 관심이 없던지라, 하자마자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새해의 마음가짐이나 다짐은 그동안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올해 제 삶에 큰 변화1)가 생겨 새해의 안부 인사를 묻습니다.
1월에는 혼자 한 달 동안 파주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오랜만에 여행을 간다던 엄마의 부탁으로 올해 14살이 된 개와 100종이 넘는 식물들, 길고양이들에게 밥과 물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그동안 써놓았던 희곡들을 무대에 올리느라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고, 마음 놓고 혼자 제대로 휴식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때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높고 멋진 건물들과 온갖 종류의 자극들을 뒤로하고 내가 혼자, 차를 타고 나가야 겨우 편의점 하나가 나오는 시골에, 말도 안 통하는 존재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지, 혹시라도 너무 외롭거나, 우울해진다거나,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모든 걱정은 하루도 안 되어서 사라졌습니다. 그 삶은, 서울의 삶보다 더 정신없고, 더 바쁘고, 더 따뜻하고, 조금은 슬프고 많이 웃긴, 그런 삶이었거든요.

회색 점이 격자로 박혀 있는 하얀 종이 위에 개, 고양이, 새, 식물, 인간이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이곳저곳에 그려진 이 존재들을 황토색 노끈이 둥글게 말려 이어주고 있는데, 노끈은 노란색 종이테이프를 찢어 붙여 고정시켰다.
개, 고양이, 식물, 새, 내가 각각의 위치에서 연결되어 있다.

올해 14살이 된 개는 여전히 대소변을 가리지 못합니다. 허리가 길고 다리가 짧게 태어나, 활동할 때마다 하반신에 무리가 가고 그 때문에 몇 년 동안 뒷다리를 아예 쓰지 못했던 적도 있었기에, 엄마와 저는 그 개가 더 이상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밥과 물을 마시러 오는 길고양이들은 5~6마리 정도로, 인간이나 다른 종에 대한 경계가 매우 강했지만, 영역 다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도중 날이 추워지자 검은 점이 있는 어린이 고양이 한 마리2)가 다른 모든 고양이를 쫓아내고 마당을 차지하였습니다.3) 그 고양이는 인간에게 매우 친밀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인간이라고 해봤자 저한테, 이긴 하지만, 소위 간택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처음 당해보았습니다.
100종이 넘는 식물들은 엄마가 마음이 아팠을 때 모두 모아둔 것들입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이제 생명을 돌보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마음이 아플 때면 생명을 돌보는 일로 스스로를 치유합니다. 100종이 넘는 식물들을 이틀에 한 번씩 물을 줘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사실, 제가 많이 죽였습니다.4)
그리고 1년 만에 쓰는 희곡은, 조금은 의식적으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희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가끔씩 어떤 내림(?)처럼 꿈을 꾸게 될 때가 있는데, 내용은 보잘것없고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이미지들과 정서가 너무나 강렬하여 그것을 토대로 희곡의 틀을 구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파편적인 이미지가 겹치는 장면들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비약적인 이미지를 토대로 사건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보통 희곡을 쓸 때는 길고 괴로운 구상 기간을 거쳐 하루에 2시간씩, 2주일 안에 완성합니다. 이렇게 단기간에 희곡을 쓰다 보니 그때 꿨던 꿈의 강렬한 정서가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내 지속되어서 글을 쓰는 기간에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고, 그런 느낌은 대체로 슬픕니다. 한 번쯤은 기존의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 모든 정서가 휘발된 상태로, 실패하기를 작정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의 습관 같은 건 조금 무섭습니다. 비인간과 동물에 발언권을 부여하는 글을 써보기로 했는데, 그들의 대사가 자꾸자꾸 슬퍼집니다. 조금은 유쾌하고, 조금은 시니컬한 그런 대사를 쓰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저 개.
저 개가 하루에 싸는 오줌의 양과 횟수가 진심으로, 장난이 아닙니다. 노견이라 냄새는 또 어떤지요. 싸자마자 바로 닦지 않으면, 코에 오줌 냄새가 밸 지경입니다. 오줌 방울들을 쫓아 닦고 뿌리고 치우면 이번에는 고양이가 창밖에서 울부짖습니다. 그냥 귀엽게 야옹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울부짖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나가면 점프해 달려들고, 얼굴을 물고 빨고, 만져달라고 부비고, 만져주면 놀랍게도 가만히, 조용히, 얌전히 있습니다.5) 고양이를 만져주는 동안에는 또 개가 코앞에서 온 동네가 떠나가라 짖습니다.6) 식물은 또 어떤가요. 이틀에 한 번씩 세 시간을 잡고 물을 줘도 끝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한 달이 지나가나 했는데,
그 압도적인 실체들. 그 압도적인 실체들이 꽤 만족스럽게 잘 실패한 희곡을 완성하게 했습니다. 몰입이 되려 하면 울부짖는 고양이와, 슬퍼지려 하면 나는 오줌 냄새, 냄새도 안 나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존재감을 뽐내는 그 식물들 때문에, 희곡이 조금은 덜 슬퍼지고, 조금은 덜 몰입되고, 조금은 덜 인간 중심적으로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 예상컨대, 비인간과 동물들은 인간의 상상에 비해 그렇게 쉽게 슬퍼지거나, 그렇게 쉽게 다치지는 않는가 봅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가감도 없이, 증명할 필요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실체들. 그 물성들.

게임 <스트레이>의 화면.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검은 고양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게임 <스트레이>. 고양이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해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와 비존재들에 있어 권력을 조금이라도 덜 가질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좋은 인간, 나쁜 인간에 대해 구별하지 않으려고도 노력합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는, 그렇게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지나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다소 상투적인 표현인 것처럼 보이는, 새해의 안부 인사7) 를 묻고 싶었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저는 시답지 않은 일에 자주 웃고, 갑작스레 찾아오는 무력감에 종종 분노하고, 아직은 예측할 수 있는 숫자의 사람들과 가끔 싸우고, 그리고 여전히 내 것이었을지도 모를 죽음들을 의식적으로 떠올립니다.
올해에는 많은 걸 처음 겪지만, 모든 걸 처음 겪는 것처럼 연극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가끔 연극이 발송인만 있는 편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익명의 수신인에게, 잘 전달되길.

[사진: 필자 제공]

  1. 올해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학교생활을 모두 끝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과연 학생인가, 작가인가, 연출인가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을 느꼈습니다. 이제 막 학교를 졸업했으니 혼란스럽기만 하던 제 정체성도 어느 정도는 안정이 될 것 같은데, 바라던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너무 일방적인 일인 것 같아, 따로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편의상 부르긴 해야겠길래, 처음에는 “애기”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너무 일방적인 일인 것 같아, “에기”라고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고양이에게 공식적인 이름은 없습니다.
  3. 쫓겨난 길고양이들에게 줄 밥과 물을 집 근처에 마련해놓았습니다.
  4. 미안합니다.
  5. 보통 밖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분리불안이 없지 않나요?
  6. 고양이는 결코 도망가지 않고, 개는 고양이의 코앞에서 온 동네가 떠나가라 짖을 뿐 결코 물지 않습니다. 제 예상컨대, 그 둘은 “고양이와 개는 서로 앙숙이다”라는 전제를 이미 알고 있고, 그 전제로 어느 정도는 서로를 대상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7. 조금 늦긴 했습니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최현비

최현비
‘임시극장’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합니다. 2rum07@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