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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쓰는 동안

구자혜

제231호

2023.03.23

[쓰는 동안]에서는 읽고 쓸 때의 습관, 글쓰기의 원동력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 생활 속에서도 작가로 살아가는 방법 등을 주제로 극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배부른 소리 하나. 주로 어디에서 희곡을 썼느냐, 바다 안에서 썼다. 권나무의 ‘자전거를 타면 너무 좋아’라는 곡을 듣는다. 자전거를 타면 참말로 좋다는 가사이다. 저 좋은 것을 나는 못 하고 산다. 자전거를 타는 게 평생의 꿈이라 연습을 많이도 했다. 500명이 넘는 사람을 자전거를 타게 만들었다는 자전거 마에스트로를 찾아간 적도 있다. 전화 상담도 길게 했다. 일생을 자전거로부터 열패감을 느껴온 사람들의 구원자, 자전거 계의 오은영. 나는 그의 경력을 망치러 온 자. 얼굴이 벌게진 그와 내가 마주 보고 서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혜 씨, 페달은 누가 밟죠? 그렇죠. 자혜 씨가 밟아야 하는 거예요. 누구도 자혜 씨 대신 페달을 밟아주진 못해요. 페달을 밟아야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죠”. 내 속마음은 이랬다. ‘저도 알아요. 쓰러질까 봐 못 밟는 거예요’. 아, 아까 나는 바다 안에서라고 했지, 바다 위에서라고 하지 않았다. 드넓은 바다 위에 등을 대고 나른하게 누워 있는 그림이 아닌 거다. 발이 닿는 정도의 깊이에서 튜브를 끼고 있다. 튜브에 의지한 채 바다에 몇 시간이고 떠 있으면 기가 막힌 다음 장면이 생각나고, 보통 그건 정말로 특출나게 독보적이다, 진짜다. 작년에 처음으로 바다에 누울 수 있었다. 구명조끼는 벗지 못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누울 수 있게 된 것, 뜰 수 있게 된 것만으로 행복했다. 동갑내기 친구가 몇 년 동안 “잘한다! 잘한다!” 하며 바다에서, 수영장에서, 수영을 알려줬고 결국 구명조끼를 입고 뜰 수 있게 되었다. 이딴 식으로 맥락 없이 쓴 원고가 실릴 수 있을까? 울면서 e나라도움 정산을 하고 있을 때, 연극센터 김상민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안녕하세요. 내일 모레 원고 마감 때문에 전화 주셨죠?”라고 해버렸다. 글쓰기에 가장 큰 방해물은 e나라도움 정산이고, 계속 뭘 먹고 싶은 마음이다. 연출이자 팀의 대표이기 때문에 프로덕션 진행 중이 아니어도 할 일은 늘 있다. 정산, 정리, 지원서, 각종 진행 등. 얼마 전에는 성인 ADHD라는 말을 들었다.

‘언제 쓰나’라며 늘 꿍시렁 거리다, 방법이 없으니, 결국 ‘어떻게 쓰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장 먼저 휘발될 글을 쓰고자 한다. 내일이면 의미 없어질 글을 쓰려고 한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침잠해 우물을 길어 올리듯 긴 시간을 틀어박혀 고통스럽게 글을 쓰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시대는 없었다. 거센 바다 위 서핑보드에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며, 쓰지 않고는 안 될 것들에 대해 쫓기듯 써온 것 같다. 나의 고민, 자아, 나 자체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자아 좇는 탐정도 아니고 언제까지 나에 대해 쓸 순 없고 나라는 존재는 늘 지긋지긋하니까. 역인지 공항인지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어제까지 쓴 글, 버려야 하는 거구나’. 노트북을 열어 그 희곡을 삭제하고 휴지통도 비웠다. 3일 후 첫 리허설이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여기에 붙지 않는 희곡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3일 동안 새 희곡을 썼다. <타즈매니아 타이거>라는 희곡이다. 리허설 내내 가져가던 희곡을 버리고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눠 2주 동안 만들어 공연한 적도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라는 공연이다. 공연 일주일 전에, 시간성을 완전히 바꿔 버리기도 했다. <7번 국도>라는 공연이다. ‘상업극’이라는 키워드를 받고 일주일 동안 낮에 3시간씩 <commercial, definitely>라는 희곡을 썼다. 시간에 쫓기는 것이, 아닌 것을 갖고 시간을 버티는 것보다 낫다.

멀티탭과 허브가 있고, 수많은 검은색 케이블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다. 흰색, 회색의 케이블도 보인다. 각각의 케이블에는 노란색, 연두색, 빨간색의 레이블이 붙여져 있다.

아 참, 세상에는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다. 노모도 만나야 하고, 데이트도 해야 하고, 월세집의 하수구도 뚫어야 하고, 이사 갈 집도 알아봐야 하는데 알아보지는 않는다. 보고서도 쓰고 정산이라는 것도 해야 한다. 아, 게다가 영문 인보이스 발급은 아직도 안 하고 있다. 인보이스도 모르겠는데 그걸 영문으로 쓰라니. 극단 일로 세무사랑 통화도 해야 한다. 해촉증명서는 간신히 발급받았다. 하지만 공단에 팩스로 제출하는 것은 포기한다. 마음을 써줘야 할 사람들이 늘 있고, 내 삶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누군가 모멸감을 주면 싸워야 한다.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 시절을 고시원에서 보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정착하지 못할 삶이라는 예감이, 옆방에서 생생하게 들리는 섹스 소리와 함께 문득 찾아왔다. 불안정한 삶이어도, 낡았지만 기품 있는 캐리어와 미감이 좋은 빈티지 카펫과 러그 몇 장이 깔려 있는 작은 서재가 있는 풍경이 있었다. 좁은 방에서 증식되는 책이 흉물스러워져서 어느 날 책을 팔기 시작하다가, 책을 더 이상 사지 않기로 결심한 날 그 풍경은 사라졌다. 그러다 몇 개월 후 약속이 깨진다. 지금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빌려오거나 산 책들이 머리맡에 늘 있다. 그 책을 읽는다. 허구의 세계로 도망치는 것도, 고난을 극복한 인간의 위대한 정신에 힘을 받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혼자 책상에 앉아 썼을 그 노동의 시간에 잠시 같이 앉아 있는 느낌이다. 경미한 고통의 시간에 나의 노동은 멈춰지거나 지연된다. 그럼 고통스러워진다.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있으면, 누군가의 밀도 있는 노동의 시간에 같이 있는 감각이 온다. 나의 기꺼운 유일한 노동은 글쓰기인데, 그 노동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억울할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누군가의 노동의 시간이었던 글자들을 읽는다. 남의 글을 읽는다는 말이다.

언제 글을 쓰냐는 질문을 받으면, 마감과 입금이라며 작가 행세하는 유머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기도 한다. 아니, 진짜로 글을 언제 쓰느냔 말이다. 진짜로 언제 쓰냐고? 비어 있는 시간에 쓴다.

쓰지 못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는다는 것. 누군가가 쌓아올린 노동의 그림자에 슬쩍 내 몸을 기대고 있는 것 같아 좋다. 그 글자들을 썼을 사람의 마음과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노려보며 폭식하며, 자책하며, 한숨 쉬며, 슬핏 웃으며 글을 쓰고 있을 사람들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 시간들이 모여 있는 세계를 생각한다. 14번의 글을 연재한 S가, 밤에 홀로 앉아 있던 시간들이 쌓여, 모여 있는 하나의 단단한 공간을 생각한다.

사는 건 지긋지긋하고, 뭣같다. 하지만 쓰는 동안은 딱히 그렇지 않다. 쓰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도피한 세계에서 마주하는 건 때로는 더 지옥같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은 최소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생각이라는 걸 하고, 글이라는 걸 쓴다. 먹을 갈아 붓으로 쓰면 쓰레기가 내 눈앞에서 생성되고 있는 걸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나에겐 세상에서 제일 매력적인 백스페이스가 있는, 이리 배우가 사라고 해서 산 7년 된 레노버 노트북이 있다. 나는 길을 못 찾는다. 지도를 봐도 못 찾는다. 물론 찾을 수 있다. 시간을 주고 누가 눈치를 주지 않는다면. 글을 쓸 때는 쫓기지 않고, 지도를 그릴 수 있다. <로드킬 인 더 씨어터>를 쓸 때는 달려가는 자동차가 달리는 길을 축으로, 여러 비인간존재들이 있는 지도를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쓰는 동안은, 지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아, 단 하나 쫓기는 것이 있다. 생각이 타이핑의 속도를 넘어가버릴 때. 그때 나는 유일하게 집중한다. 타이핑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았을 때, 느려터진 글자가 제멋대로 멀리 달려 나가는 생각을 만났을 때, 그 둘은 잠시 서로를 겨누는 듯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속도를 내 달린다. 나는 그때 내가 유용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노동을 하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마음과 시간을 내어준 것처럼, 나 역시 그래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게 될 때, 그들이 나에게 혼자 있으라며 내어준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들을 잊지 않고 잠시 옆에 두고 글을 쓴다. 권나무의 ‘자전거를 타면 너무 좋아’의 가사처럼 밤의 풍경과 공기를 즐기며 자전거 페달을 밟진 못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겁나게 페달을 밟는다. 이 자전거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니까, 쓰러질 걱정 없이 페달을 마음껏 밟을 수 있다.

노란색과 갈색의 낙엽이 쌓인 바닥, 그 위에 유아용 세발자전거가 놓여있다. 자전거의 프레임은 파란색이고, 바퀴와 핸들 부분은 노란색이다. 그 뒤로 검은색 철제 울타리가 있고, 초록색 잎의 담쟁이 식물이 바닥까지 닿아 있다. (아마도 이 풍경을 찍고 있을) 검은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2년 동안 희곡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달에 짧은 희곡을 썼다. <멈춘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이 그 제목이다. 특정 사람들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그 사람에 대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을 생각하며 그 사람이 읽는 것을 기대하며 글을 써왔다. 내가 있는 ‘여기는 당연히, 극장’에서는 매일 아침 아홉 시에 구글미트에 접속해서 책을 읽는다. 아홉 시 땡 하면 누군가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고, 또 그걸 누군가가 받는다. 함께 읽는다. 그 시간이 끝나고 한 시간 반 동안 그 희곡을 썼다. 글을 쓰는 시간 동안에도 휴대폰은 꺼놓지 않는다. 그 사람의 전화를 놓치고 싶지 않다. 불행은 이른 새벽에도 오지만 낮에도 찾아오니까.

오로지 글만 쓸 수 있는 내 서재는 영원히 없을 것이며, 전화기는 영원히 꺼놓지는 못할 것이다. 일상과 번잡함과 제작을 위한 돈의 마련, 내 삶의 비용, 누군가의 삶의 비용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하며 그 남는 시간, 누군가가 나에게 내어준 시간에 글을 쓰는 것을 받아들인다.

수영을 못하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그저 할 수 있는 건 바다에 튜브를 끼고 몇 시간이고 떠 있는 거다. 그때 글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건 내 거다. 나는 단상 같은 것을 적어놓는 노트가 없다. 떠올리기 위해 떠올려질 단상은 나에겐 그닥 의미 없는 것이니까. 지금 포착할 수 있는 것을, 주어진 시간 동안 쓰는 것. 그 시간 동안은 중요한 타자들로부터 유리된 시간이 아니라, 중요한 타자들이 나에게 내어 준 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하루 두 시간 허락된 나만의 노동을 해나가는 것이 이 원고를 ‘쓰는 동안’ 생각한 것이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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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혜

구자혜
‘여기는 당연히, 극장’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드랙X남장신사>, <로드킬 인 더 씨어터>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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