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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인 글

쓰는 동안

조제인

제232호

2023.04.27

[쓰는 동안]에서는 읽고 쓸 때의 습관, 글쓰기의 원동력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 생활 속에서도 작가로 살아가는 방법 등을 주제로 극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잘 쓰는 사람이 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지만, 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그런 것 같다. 글을 잘 쓰려면 비장한 사명이나 무언가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근성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게 없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심하게 낯을 가렸고 무언갈 숨기고 싶어 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말을 빙빙 돌리고, 에둘러 말하고, 거짓말하는 법을 위주로 배웠다. 그러다 보니 난잡하고 더러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환상을 끌어다 쓰고, 불결한 배경을 끌어다 쓰고, 카메라를 끌어다 썼다. 어릴 때 만났던 친구들은 이딴 식으로 쓰다가는 너 아무것도 못될 거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말해주기도 했다. 이건 뭐 영화도 아니고 희곡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아름답다가 더러웠다가…. 제발 하나만 하라고 덕담을 해줬다. 그럴 때마다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이 새끼들아….

자줏빛과 짙은 보랏빛의 체리 한 송이. 몇몇 체리알에 초록색 꼭지가 달려 있다.
윗 문단과 같은 이유로 척박할 때 먹던 체리

최대한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엉겁결에, 또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되게 되었고 이 필연적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진지한 성찰을 하려고만 하면 삶에 있어 긴급히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터졌기 때문에, 글에 대한 고민은 항상 이 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그럴 때면 울면서 솔직한 내 얘기를 썼다. 조언받은 대로, 거짓 한 톨 포함되지 않은 내 이야기를 쓸 때면 글이 쉽게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있어 지나간 것,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을 위주로 다뤘다. 매 순간 생각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한 시간만 앉아있어도 대충 뭔갈 써서 낼 수 있었다. 정말이지, 가성비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울적해졌다. 나와 비슷한 사고방식과 경험을 가진 인물들이 잘 정돈된 형태로, 동시다발적으로 생산되어, 무대 위에 오르고, 이즈음에 뭔가를 깨닫고(나는 아닌데)… 내가 망가질수록 내 방식대로 모두가 망가졌다.

그래서 난 다시 도망가 버렸다. 아주 태초에, 내가 욕을 처먹던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쓰는 동안, 원래라면 delete 키를 눌러 글에서 지워 버렸어야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감정들을 생각한다. 그것들을 최대한 내 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쓰려고 노력한다.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대로, 헤진 것은 헤진 것대로, 극복을 좀 덜 한 것은 덜한 것대로, 분노해야 할 것은 분노할 수 있도록 둔다. 깔끔하게 쓰지 않으려 한다. 내 멋대로 정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비장한 사명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조금 못 쓰고 난잡하더라도 다양한 방식이 허용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구와 마젠타>와 <점으로 사라지는 세계>를 쓸 때는, 감정에 맥락이 없다는 이유로 노트북 휴지통에 넣어버렸던- 새카맣게 소각될 뻔했던 인물들을 데려와 썼다. 대신 이 맥락 없음을 어떻게 하면 더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사랑스런 신을 위한 DIY 안내서>와 <언니 소개>를 쓸 때는, 사회가 (내가 휴지통에 버렸던 인물들도 겪었을) 소거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해, 또 은폐에 도가 튼 세계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커다란 이미지와, 팽창 직전의 어지러운 감정들, 맥락을 알 수 없는 이 세상의 거대한 기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봉합할 수 있는 어이없는 봉합술들도….

*

나는 이제 참으로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아마. 지긋지긋한 것들이 있었지만 이를 꽉 깨물고(건치라 다행이었다) 있다 보니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졌다. 조금씩 쓸 수 있는, 쓰는 동안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면서. 정확하게는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고 누군가 고심하여 쓴 것 같은 문장들을 잘 읽어 보고 일이 들어오거든 조금씩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부족한 연극 연습을 할 때도 있다. 드문드문 공허하고 숨이 막히지만, 그럴 때면 다시 앞 문장부터 반복하여 생각한다. 나는 이제 정말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사랑해 마지않는 친구와 함께, 코에 얼룩 반점이 있는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아! 행복하다 진심이다.

하얀색과 갈색빛이 섞인 고양이의 옆얼굴. 조금 흔들린 사진이다.
따뜻한 것을 좋아하고, 코에 얼룩 반점이 있는 고양이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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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인

조제인
다매체 예술 창작 집단 ‘팀 새’에 소속되어 쓰고 만들기도 하지만, 혼자 쓸 때도 많습니다.
<구와 마젠타>, <점으로 사라지는 세계>, <사랑스런 신을 위한 DIY 안내서>, <언니 소개> 등을 썼습니다.
gondry_4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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