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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읽기의 실패와 경로

서울연극센터 재개관 기획프로그램 <희곡제: 침묵과 말대꾸> 연계 전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

이여로

제234호

2023.05.25

문자와 희곡

어느 교수가 문학을 “어디에 쓰여도 똑같은 것”으로 정의했다던 기억이 난다. 그림책 작가에게 건네 들었던 말인데, 이를 문자 텍스트에 대한 순수주의적 태도, 근본주의적 태도라고 부를법하다. 나는 반대로 ‘그것은 다르다’고 느껴왔다. 문자는 어디에 쓰이고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불리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그 다름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단위가 마련되고, 미련해도 좋으니 이어가면 각자의 언어가 발생한다고 말해왔다.1) 내가 느낀 그 다름 역시 매체이론이나 기호학 따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안/잘 읽히냐’는 소박한 감상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니까. 내가 전통적인 문학 평론에서 확산되었던 길이다.

그 길에서 문자는 다른 매체를 만난다. 타이포그라피와 함께 시각적 몸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성대의 떨림을 거쳐 청각 이미지로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희곡은 어떠한 경험의 경로들을 갖는가? 이 글은 내가 희곡 읽기에 빈번히 실패했던 개인적 기억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나의 실패를 나의 취향에도, 개별 작품의 품질에도 귀속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실패를 곰곰이 살피고 싶다.

전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 전경. 나무 바닥에 검은 벽면과 검은 천장이 보이는 공간이다. 공간 중앙에 회색빛 정사각형 카펫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색깔과 모양이 다른 여러 의자와 테이블, 선반, 브라운관 텔레비전, 행거와 스탠드 등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테이블과 선반 위에는 초록 잎의 화분이 놓여 있다. 카펫 바깥쪽으로 공간을 둘러싸고 하얀색과 녹색의 종이테이프가 발라져 있는 크고 작은 종이 상자들이 쌓여 있다.

실패한 자는 환호하지 못해도 성찰할 수 있다. 어떤 경로들이 중첩되어 희곡 읽기에 성공하는가? 내게는 ‘좋은 희곡’이 아니라 요소의 분류와 경로의 조립이 필요하다. 이건 결국 희곡이 자신의 관심을 다루는 방식을 살피겠다는 말인데, 희곡과 연극의 아마추어인 나는 그 관심이 무엇인지 모른다. 따라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의 다매체 작업들을 이러한 경로의 안내로 상정하고, 내가 희곡을 학습할 모델로 삼아볼 것이다. 한편으로 이 전시는 관객의 접근성 향상, 흥미 유발, 다원 예술, 관객 참여형 등의 문화행정 언어로 설명될 여지가 크다. 실제로 그렇게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전시를 희곡 읽기 안팎의 겹들을 분리하여 꺼내놓는 실험으로 볼 것이다. 그 전에 간략한 모델링.2)

전시가 전하고 싶은 내용: 동시대 희곡의 생성·쓰임·소멸3)

전시에서 얘기된 내용: <47개의 희곡 카드>, <내가 넙치였을 때>, <지구를 떠나서>, <다른 손들의 응답>, <6편의 희곡 책자>와 <텍스트 플레이>, <더 그레이트 챕북>, <발생되는 이야기들을 위한 BGM>, 익명의 낭독자들

실제 대화 내용: 앞뒤로 이어지는 이여로의 글

서울연극센터 유리벽에 희곡제 <침묵과 말대꾸>, 전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의 개요가 흰색 텍스트로 세로쓰기 되어 있다. 행사 일정과 참여 작가의 이름들이 쓰여 있고, 유리에 반사된 공간 내외부와 유리 너머에 있는 공간 계단 등이 겹쳐 보인다.

소리와 간극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平田オリザ)는 희곡이 인간의 구어를 문자화하는 특권을 누려온 매체라고 말한다.4) 요 근래 연극치료에 관한 책5)을 편집하면서 저자의 인용으로 접한 이 책은 내게 희곡의 한 경로가 되었다. 히라타의 연극론이 연극의 4요소(가 있다는 건 이 글6)에서 알았다) 관객, 배우, 희곡, 무대처럼 모든 희곡에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닐 것이다. 구어를 문자로 주고받는 디지털 네이티브는 더 이상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느끼지 못하고, 극작가는 구어의 특수성을 지향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47개의 희곡 카드〉 역시 각자의 이유에서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실록과 같은 역사서나 구술생애사도 구어를 기록한다. 희곡은 구어의 기록에서 또 다시 특정성을 요구한다. 그건 ‘읽히고 만다’는 것이다. 쓰고 숨겨두지 않는 이상, 희곡은 배우나 연출 등의 사람들에게 읽혀버리고 만다(혹은 예상된다). 그들 각자에 의해 문자는 발성되고, 무대 미술로 보여지고, 빛으로 감싸지고, 근육과 숨으로 움틀거린다. 그런 것들이 희곡이라는 문자에 스며들어 이내 암시되고 상상하게 된다. 나는 그것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체화할 만큼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런 겹들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희곡을 순수하게 읽기만 한다. 정말로?

‘뇌에는 읽기를 담당하는 중추가 없다. 분명 읽기에는 시각이 관여하지만 청각 처리가 더 크게 관여하며, 음성언어를 말하고 알아듣는 등의 소리 마음을 끌어들여서 우리는 ‘읽기’라는 행위를 해낸다.’7)

내가 묵독을 할 때조차 어떤 표준적인 음성을 상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읽기는 소리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리를 숨김으로써 성립된다. 한편 희곡이 상이한 목소리로 읽힌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것은 ‘책상 위에 컵이 놓여 있다’는 사실만큼 당연하다. 그 컵에 피가 묻었다거나, 기묘하게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거나, 있지 않을 법한 장소에 있을 때 우리의 상상력은 방향을 잡기 시작한다.8)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희곡 카드 옆에서 배우 김문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김문희가 읽는 희곡에는 “조심한다고 다 돼?”9)와 같은 극히 일상적인 구어체 대사도 있다. 문법적 오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이할 것도 없는 대사인데, 내가 살면서 정확히 이런 말을 했었는지 생각해보면 불확실하다. 즉 그저 읽으면 될 것 같은 대사조차도 ‘읽는다’를 시작하는 순간 내가 살아온 세계를 꺼내 비교할 수밖에 없다. 목소리에 의한 비교 가능성이 문자 위로 겹쳐 들릴 때, 문자로서 희곡은 분열을 맞는다.

전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 중 노상호 작가의 <더 그레이트 챕북>. 직사각형 철제 프레임의 행거에 같은 소재의 옷걸이 20여 개가 걸려 있다. 각각의 옷걸이에는 노상호 작가의 드로잉 작품이 투명한 필름 속에 들어 있다. 언뜻 보면 길이가 다른 직물이 여러 장 걸려 있는 모습이다.

연결은 분열을 마중한다. ‘다른 손’이라는 이름 아래 쓰인 희곡들이 노상호의 드로잉과 겹쳐 보일 때, 혹은 아무 준비 없이 보았던 김허앵의 회화가 다시 떠오를 때, 문자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병렬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요소들이 꺼지고 켜지는 조합 속에서 희곡이 읽히거나 읽히지 않는 경험은, 이러한 연결의 총체가 희곡의 존재 방식이지 자신을 부연하라고 문자로서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내게 일러준다.

이러한 보여주기의 방식은 관객의 행위에 의지한다. 즉 이미지들은 서로를 설명할 만큼 직접적이지 않고 병렬될 뿐이며, 이것을 연결하는 것은 관객의 지각이다. 이는 희곡이 독자의 상상력에 의지하는 표현 구조, 즉 “먼 이미지로부터 가까운 이미지로, 혹은 어느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것과 같은 형태로 회화를 연결해 나가는”10) 일과도 형식적으로 상응한다.

반면 읽기의 실제 작동 방식을 시각화한 것은 윤충근의 디자인이다. “영화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있다”11)는 어느 영화작가의 말처럼, 4분할 된 2개의 스크린 위에서 점등하는 배경과 문자의 운동은 읽기가 시공간의 간극에서 작동한다는 것, 즉 순수한 관념적 표상이 아니라 그 간극을 조정하는 안구의 움직임을 따라 발생함을 일러준다. 오로민경의 <발생되는 이야기들을 위한 BGM>이 ‘이야기 입자들의 소리 풍경’으로 비유적으로 설명되듯, 이것들은 보이는 것이 아닐지라도 보기를 구성하는 입자들이다.

전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에서 윤충근 작가의 <텍스트 플레이>를 경험하고 있는 관객의 뒷모습이 보인다. 세로로 긴 스크린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중 왼쪽 스크린의 2사분면에는 흰 바탕 위에 검은색 텍스트가 세로쓰기로 플레이되고 있다. 텍스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국 또다시 만났네그려. 우리 축하해야 하지 않겠나.” 관객은 스크린 앞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착용한 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희곡의 소멸…?

나는 이 글에서 희곡이 무엇을 활성화시키는지 보려고 했다. 가령 노상호의 <더 그레이트 챕북> 작품 설명에는 “우리가 겪는 일상이 극작가와 시각예술가에게서 이야기/이미지가” 된다고 언급된다. 이처럼 보이는 것 이상을 본다거나, 단어가 아니라 행간을 읽는다는 식의 언술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신비한 기예처럼 간주되지만, 사실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식별되지 않는 누군가의 몸짓 하나에서 친구를 읽어낼 수 있고, 내거는 정책만으로 어떤 정당인지 알 수 있다.12) 예술 창작의 차이가 있다면 그 방향에 있다. 일상의 지각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좁혀가며 확인하는 일이라면, 극작은 아는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이행한다. 이는 무지를 무작위로 확대하는 일이 아니라 지각과 상상과 실험이 끝없이 순환하는 과정이며 나는 이것을 희곡이라 읽는다.

책상 위에 흩놓인 작가들의 창작 노트를 보자. 작가의 메모로부터 결과물인 희곡의 관계를 관객이 정확히 유추하기는 어렵다. 상관없다. 작가 역시 그것을 몰랐다. 창작 일반의 생각, 인물이나 배경의 아이디어, 일방적인 상상과 투사, 제작에 관한 지시사항… 연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이한 종류의 기록들은 극작이 아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앎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일러줄 뿐이다.

전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 공간 사진. 나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여러 메모들이 흩어져 있다. 테이블 한쪽에는 골판지 상자 속에 들어 있는 푸른 잎의 식물 화분이 놓여 있다. 반대쪽에는 탁상용 스탠드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푸른 잎의 식물이 스탠드의 몸통을 감고 있다. 스탠드 조명 아래에는 오로민경 작가의 <발생되는 이야기들을 위한 BGM>이 설치되어 있는데, 나무판 위에 스테인리스 그릇이 놓여 있고, 그릇 안쪽으로 자극에 진동하는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사진상으로 확인이 되진 않지만, 이 케이블은 그릇 속에 있는 소라 껍데기에 부착되어 있으며, 자극이 발생하면 소라 껍데기가 스테인리스 그릇과 부딪혀 소리를 만든다.

극작가 김연재가 수집한 <47개의 희곡 카드>도 그러하다. 오늘날 쇼츠와 릴스에 절여진 우리에게 파편화의 형식은 익숙하지만, 후자가 요약된 경험의 제공이라면 전자는 경험화를 요구한다. 히라타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순간과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가 너무 신경이 쓰여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극작가가 된다”13)고 말하듯, 내가 극작을 할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이런 말은 언제 하는 걸까’라는 작은 호기심이 희곡의 경로들을 통과하며 결국 ‘리얼하다’거나 ‘실재적’인 감각으로 성립될 때, 희곡을 읽는다는 행위는 부분적 대상에서 상상적 전체로 이행하는 훈련이며, 빈 공간을 채우고 싶은 원초적 욕구처럼 하나의 파편조차 ‘신경 쓰여 어쩔 줄 모르도록’ 자극한다.

결국 이 글은 희곡의 생성-쓰임-소멸에서 관객의 몫으로 남는 소멸을 다시 생성으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 희곡이나 연극에서 관찰 가능한 형식과 희열이 그 바깥에서도 공유될 수 있다는 기대가 없다면, 비전문 영역에 대한 글쓰기 따위는 할 수 없다. 자신의 앎을 자신이 확장해나가는 프로그램으로서 희곡, 그것의 방향을 잡는 희곡 고유의 경로들, 그것은 창작자만의 특권이 아니라 관객과 독자의 몫이기도 하며, 이 전시가 희곡의 해체를 통해 도우려고 했던 무엇이다.

[사진: 서울문화재단 아카이브]

서울연극센터 재개관 기획프로그램 <희곡제: 침묵과 말대꾸>
연계 전시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
  • 일자 2023.4.13 ~ 5.31
  • 장소 서울연극센터
  • 참여 극작가 윤미희, 김연재, 김은한, 양은실, 강세진, 곽시원, 이휘웅, 김서현, 박한결, 이은용, 이한솔, 강한나, 배해률, 신해연, 허선혜, 류연웅, 박찬규, 서동민, 윤노아, 이철용, 김지우, 홍기황, 장정아, 김옥미, 장지혜, 이남주, 김동국, 김지현, 홍경진, 구지수, 전서아, 김영빛, 김주희, 강동훈, 박아영, 신지원, 최세리, 곽지현, 박예지, 송재원, 송천영, 나수민, 윤소희, 조소민, 김도담, 하채린 참여 시각예술가 김허앵, 노상호, 오로민경, 윤충근 주최・주관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 희곡운영단 (김연재, 이홍도, 허선혜) 전시기획・글 더블데크웍스 (강재영, 김솔지) 텍스트 큐레이션 김연재 협력 이홍도 허선혜 그래픽 디자인 김문희 사운드 이펙트 고경임 공간 연출 근면스튜디오 미디어 장비 명성미디어 시트 심애드 운송 다솜아트, 임성수 설치 협력 장시재, 정채현
  • 관련정보 https://www.sfac.or.kr/site/theater/ex/bbs/View.do?pageIndex=1&cbIdx=1017&bcIdx=134144&tgtTypeCd=&searchKey=
  1. 이동휘와 이여로 공저, 인현진 디자인,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 미디어버스, 2022.
  2. 이는 히라타 오리자가 희곡의 플롯, 에피소드, 대사를 구분한 모델이다. 문헌 정보는 다음과 같다. 히라타 오리자, 고정은 옮김, 『연극 입문 - 희곡, 어떻게 쓸 것인가』, 동문선, 2005, 99쪽.
  3.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의 인스타그램 공지문에서 인용.
  4. 히라타 오리자, 위의 책, 29쪽.
  5. 유민수, 이여로 편집, 『문제를 바꾸는 방법:연극, 치료, 움직임』, 기획:1과 미디어버스, 근간.
  6. 고주영, 김진주 대담, 「여러 프로듀서 중 하나, 그리고 소셜 마이너리티와 예술 리서치」, 세마코랄,
    http://semacoral.org/features/jooyoungkoh-one-of-many-producers-social-minority-and-arts.
  7. 니나 크라우스, 장호연 옮김, 『소리의 마음들』, 위즈덤하우스, 2023, 173-174쪽. 트위터 @dasistnacht에서 재인용 및 간접인용 수정.
  8. 히라타 오리자, 위의 책, 64-67쪽.
  9. 김지현, 「넥스트 타로 - 다른 손(hands/ quests)의 희곡 쓰기」, 웹진 연극in, 2021.7.15.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468.
  10. 히라타 오리자, 위의 책, 104쪽.
  11.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 <월든(일기, 노트, 스케치)>(1969)에 등장하는 나레이션 대사.
  12. 아우구스또 보알, 이효원 옮김, 『배우와 일반인을 위한 연기 훈련』, 울력, 2003, 16-17쪽.
  13. 히라타 오리자, 위의 책,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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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아티스트북, 1인출판을 통해 2019년 창작과 평론을 시작했다. 아마추어리즘, 언어화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 출판,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을 만들고 『영화작가들과의 대화』(요나스 메카스)를 번역했다.
인스타그램 @ee_ye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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