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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문제

다른 손(hands/guests)⁺

이혜령

제240호

2023.08.24

[희곡]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읽고 써야 할 희곡들을 싣습니다. 올해는 ‘+’가 더해진 ‘다른 손⁺의 희곡 쓰기’를 선보입니다. ‘다른 손’의 주제적 카테고리 안과 밖에서 쓰여진 새로운 작품들을 만납니다.

등장인물
여자 아이와 성인 여자

시공간
대형 미술관의 복도. 평일 오전.

대형 미술관인 만큼 복도도 넓다.
평일 오전인 만큼 사람이 없다.
큰 창문이 하나 있다.
오른편으로 미술관 복도 벽과 맞닿은,
등받이나 팔걸이가 없는 긴 의자가 놓여있다.

한쪽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인 여자 어린이가,
다른 한쪽에서는 30대 초반의 성인 여자가 걸어 들어온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지만,
엄마는 무대 밖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성인 여자는 동료와 함께 있지만,
동료는 무대 밖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전시 준비 중’이라는 팻말을 무대 끄트머리에 세운다.

여자아이가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걷다가 예측할 수 없는 순간 멈춰서서 노래한다.
뮤지컬 <마틸다>의 수록곡으로 신나는 노래인데, 가사를 잘 몰라 흥얼거리는 수준이다.
관객은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다.

여자 아이
(배우를 위한 대사) Even if you’re little you can do a lot, you
Mustn’t let a little thing like ‘little’ stop you
If you sit around and let them get on top, you
Might as well be saying you think that it’s OK
And that’s not right

한참 노래하다가 객석을 의식하며 목소리가 작아진다.
엄마를 살펴보다가, 바닥에 앉는다.

성인 여자는 긴 의자에 앉아서 반복적으로 뭔가를 한다. 옆쪽 전시실의 설치를 준비 중이다. 아이를 힐끗거리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을 하다가 어둠 속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료에게 말한다. 앞서 하던 말을 이어가는 것처럼 들린다.

성인 여자
저주파성 난청이래.
그래.
피곤해서 그런 거래.
웅- 웅- 웅-
귓가에 맴도는 소리.
귀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놀랐는데
...
아니.
문제가 생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웃으며) 이게 병이라고?
앓는 병을 말하는 거야?
병은 아니잖아
난청이 질병은 아니지.
그냥 좀 안 들리는 거지.

창문 밖으로 시위대가 지나간다.

펄럭이는 대형 붉은색 깃발,
대낮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번뜩이는 조명,
음향기기에서 발생한 파열음.

성인 여자는 살짝 시선을 돌렸지만
이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성인 여자
내 말이 그거야.
아예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많이 들렸던 거니까.
… 그런 것도 병이 될까?
어때? 그런 것 같아?
질병… 뭔지는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냥… 잡음인 거지,
병이라기보다는.
잡음이 병은 아니지
그건 소리잖아
소리가 병은 아니지
웅-웅-웅

웅-웅-우웅-우우웅-웅-우웅-우우웅-우우웅

여자가 잡음의 재현을 노래도 입소리도 아니게, 이어간다.
여자아이가 성인 여자가 내는 우웅-소리에 결을 맞추며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창밖에서 탁,탁,탁,탁,탁.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짧고 빠르게 연달아 나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온다.
마치 그만 좀 하라는 듯
층간 소음에 화난 사람이 벽을 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아이가 노래를 멈추고
성인 여자가 웅웅거림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본다.

탁탁 소리는 멈춘다.
여자 아이와 성인 여자 모두 입을 다물었으나,
웅웅거리는 잡음은 계속된다.

여자아이가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 후,
엄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여자 아이

알았어요.
알았어요.
어제는 노래 좀 불러보라고 하더니
지금 여기 무대 같은데
여기는 안 된다니
춤이라도 출까? 안돼?
네.
노래하면 안 돼요.
식당에서는,
미술관에서는,
버스에서는,
노래하는 시간이 아닌 때의 학교에서는,
노래하면 안 돼요.

노래하면 안 되는데…
왜 노래하면 안 돼요?
성인 여자
괜찮다니까.

성인 여자는 자신의 동료를 향해 대꾸하다가
여자아이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본다.

여자 아이
안 되잖아요.

성인 여자가 여자아이를 쳐다본다.
여자아이가 성인 여자에게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인다.

여자 아이
노래말이에요, 여기서 부르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해도 돼요?
성인 여자
아. 아니요?

여자아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꺼낸다.

장난감 기차의 한 부분,
기찻길을 이루는 블록 서너 조각,
바람이 조금 빠진 파란색 풍선,
거기에 묶인 두꺼운 보라색 리본,
바나나와 귤,
물이 새는 물통,
젖은 동화책.

아이는 동화책을 발견하고 옷으로 닦아낸다.
젖은 것을 말리기 위해 한 장 한 장을 펼쳐본다.

성인 여자
약을 먹으면 완전히 다 나은 것 같아
괜찮아져.
물론 약을 안 먹으면 다시 웅웅거려…
그래도 약을 먹으면 괜찮으니까, 괜찮아.
지금?
지금은 안 먹었어.
먹을 건데, 지금은 안 먹었어.
듣느라고.
응? 응, 그 소리.
언젠가 한 번은 그 소리를 들어봤어.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 건지 확인하려고.

너,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는 어떻게 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면 되잖아
그런 거야.
이 소리는 여기서 들려

여자가 손가락으로 귀를,
잇따라 머리를,
목덜미를,
가슴을,
배를
순서대로 가리킨다.

성인 여자
이건 여기서, 여기서 나기 시작해서, 여기로 흘러가기도 하고,
이렇게 넘어가기도 해.
달팽이관의 어딘가가 손상되어서, 바람이 통하는 소리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어.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 묵직해.
피가 흐르는 소리일까?
뜨거운 게 흐를 때 나는 소리처럼 뭉근한 게 있거든
심장 뛰는 소리랑은 달라
심장이 뜀으로써 발생하는 다른 소리들 가운데 하나야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어도
내 몸이 죽도록 일하고 있어서 나는 소리
살아 있어서 나는 소리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이 몸이 한 번도 멈춘 적 없다는 뜻이잖아
몸이 멈춘다는 건 죽음이니까
나는 지금 살아 있고
이 몸은 내내 작동 중이고…
아, 아.
그러니까 내 몸이 내는 이 소리가,
그냥 내가 작동하는 소리구나.
그래서 약은 안 먹어
소리가 멈추면 마치 죽는 것 같을까 봐

여자는 동료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어간다.

성인 여자
그리고 민희 씨, 사실 그게 또 그래.
원래가 세상이 온통 소란한데
언제부터 그렇게나 고요하길 바랐다고 약까지 먹나 싶어
조용……하다는 거
평화가 아니야
조용한 거 좀 무섭지 않아?
조용……

성인 여자, 동료로부터 몸을 돌려
객석 쪽 어딘가를 응시한다.

젖은 동화책을 물기에 의지해 미술관 벽에 붙이고 있던 아이가 벽에 붙은 서너 장의 종이를 바라보며 두 손을 지휘자처럼 들고, 양발을 넓게 벌리고 지그재그로 걷는다. 고개로 박자를 맞춘다. 원래 바닥에 늘어 둔 물건들로 돌아와서는,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만의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래는 하지 않고, 다만 속으로 노래한다. 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엄마 쪽을 향해 말한다.

여자 아이
엄마, 근데 왜 노래 금지라고 쓰여 있지 않아요?
그니까 주차 금지, 촬영 금지, 담배 금지
그런 것처럼 써놓으면 금지인 줄 내가 알았지
나도 노래 안 하지, 금지라고 하면.

그때 화장실에 ‘셀카금지’ 스티커 보고
이모한테 사진 찍는 거 불법이라고 알려준 것도 나잖아.
(셀카 흉내를 낸다)
아아, 맞아, 그 ‘불법촬영금지’
화장실에서 사진 찍으면 벌금 내고 경찰한테 잡혀간대
왜 그게 불법인지는 나도 몰라
이모도 모르는 것 같아
물어봤던 거 같은데, 대답을 안 하던데?

아무튼 노래 금지 써있으면
나도 딱 안 하지

(엄마의 말을 듣다가 혼잣말로)

노래 시간에만 노래해야 하다니 정말 이상해
엄마?
오늘은 노래 시간이 언제야?
아니… 엄마?
집에 가서는 저녁에 시끄럽게 하는 거 아니라고 할 거면서.
이건 다 누가 정한 거야.

여자아이는 엄마의 무관심에 어깨를 으쓱하더니,
성인 여자를 바라본다.

잠시 후 아이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작은 낡은 휴대전화기를 꺼낸다. 주변을 살피는 것처럼 보더니 버튼을 누른다. 곧 소리가 흘러나온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하우스 오픈부터 어린이의 웅얼거리는 노랫말, 성인 여자의 난청에 관한 대화다. 실제 현장에서 녹음된 소리.

설치 준비를 하는 듯 오가던 성인 여자는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조금은 당황스럽고 또는 놀라워하며 묻는다.

성인 여자
지금 뭘 한 거야?
여자 아이
네?
성인 여자
방금 내 목소리가 나오던데?
여자 아이
아…
죄송해요, 지울게요
성인 여자
아니, 그게 아니라 물어보는 거예요. 궁금해서.
방금 그거 뭐예요?

여자아이가 두려워하고, 의아해한다.

여자 아이
녹음했어요.
그냥 하는 거예요.
휴대폰에 있는 녹음 어플이요.
저는 아직 한글을 읽긴 하는데 쓰는 건 어려워서
쓰고 싶은 걸 녹음하는 거예요.
성인 여자
아.
뭘 쓰고 싶었는데?
여자 아이
오늘에 대해?
성인 여자
오늘?
여자 아이
지금 여기에 대해서?
성인 여자
여기?
여자 아이
성인 여자
… 뭐, 잡음만 있고 뭐가
녹음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은데

둘이 각자 생각한다.

성인 여자
… 뭐지, 그, 일기 쓰듯이 말을 하고 그걸 녹음하는 편이 낫지 않아요?
한글을 알면 쓰고 싶었던 그 생각을요
지금 어린이가 하고 있는 생각이요
일기 쓸 때, 나는 오늘 무얼 했다. 어떤 기분이었다. 그렇게 쓰는 것처럼.
여자 아이
성인 여자
?
여자 아이
노래를 할라고 했어요.
여기가 좋아서
그게 안 된다고 해서 노래하던 중이에요,
그냥 마음속으로.
속으로 노래하는 법 아세요?
저는 잘 몰라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건 안된대요.
노래 금지도 없는데.
아무튼 소리가 없는 노래라서…
말로도 안 되고, 노래로도 안 돼요.
여긴 ‘노래금지’잖아요.
그러니까 노래는 녹음이 안 된 거죠
… 그래서 그냥 뭐가 빠진 거 같죠

여자아이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한다.

여자 아이
이런 거라도 읽는 게 나아요?

손에 들고 있던, 젖어서 찢긴 동화책을 읽는다.

여자 아이
“정성껏 심은 꽃은 피지 않았지만,
무심코 심은 버드나무가 그늘을 만들었어.”
흠… 보보는 슬펐을까요?
성인 여자
보보가 누구야?
그 꽃을 심은 친구야?
여자 아이
네. 여기, 버드나무 그늘에 앉은 친구예요.
성인 여자
그늘이 있으니까 슬프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기대도 안 한 게 생긴 거니까
서프라이즈 같잖아.
여자 아이
저는 슬퍼요,
여기는 그늘이에요.
노래는 꽃이고요
서프라이즈는 별로예요.
성인 여자
그늘 같은 녹음.
...
그럼 왜 방금 녹음을 튼 거예요?
여자 아이
아까 무섭다고 하시길래…
성인 여자
네?
여자 아이
조용하면 무섭다고 했잖아요
여긴 조용했나 궁금해서 그 생각이 나서 틀었어요
성인 여자
아… (조금 놀라며)
… 되게 어른 같다
여자 아이
언니가요?
성인 여자
아니죠. 어른 같다는 건 어른이 아닌 사람한테 쓰는 말입니다.
저는 어른 같은 게 아니라 어른이고요.
여자 아이
아. 강아지말고 강아지 인형한테 강아지 같다고 하는 것처럼.
성인 여자
오. 맞아요. 딱 그거.
이거 봐, 정말 어른스럽다.
이름이 뭐예요?
여자 아이
왜요?
성인 여자
아니… 그냥.
말하는 거랑, 행동하는 게 어린이 같지 않아요.
다 큰 어른 같아요.
여자 아이
저는 어린이죠.
저는 언니처럼 조용한 걸 무서워하지도 않는 걸요.

성인 여자가 이해를 하지 못하다가, 문득 수긍하며 조금 웃는다.
창문 밖으로 소리들이 들려온다.

성인 여자
잘 됐나요, 녹음?
여자 아이
아 그거 정말 죄송해요.
몰래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거 보내드릴까요? 그냥 지울까요?
성인 여자
아니요.
들려주세요.

여자가 일어나서 조금 열려 있던 창문을 닫는다.
여자아이 옆으로 와서 앉는다.

여자 아이
좋아요.

여자아이가 기뻐하며 녹음한 것을 튼다.
녹음된 것이 끝날 때까지 함께 듣는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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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령

이혜령
제너럴쿤스트에서 글을 쓰고 공연을 만든다.
@generalku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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