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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셋 팔 여섯

다른 손(hands/guests)⁺

권정훈

제243호

2023.10.12

[희곡]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읽고 써야 할 희곡들을 싣습니다. 올해는 ‘+’가 더해진 ‘다른 손⁺의 희곡 쓰기’를 선보입니다. ‘다른 손’의 주제적 카테고리 안과 밖에서 쓰여진 새로운 작품들을 만납니다.

때/장소
조금 미래의 서울
등장인물
1
2
3
4
손오공
악마
다를 것이 없는 모양

# 24°19'01.6"N 75°27'25.8"W

3
아름다운 도시. 네온사인이 고개를 들자 세상이 환했다. 나는 고양이 섬의 언덕에 앉아 수도 없는 간판들을 읽어나간다. 다를 것 없는 느슨한 이름들. 누군가의 꿈과 희망과 증오로 가득한 이름들을 소리 내서 읽는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온다. 손톱을 앞니 사이에 넣고 간다. 슥슥 손톱 갈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뒤섞여버린 세상 속에서 이런 저녁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작아지는 내 손톱이 귀여워 계속 이렇게 앉아 있다.
이곳의 좌표를 기록해두고 기억한다.
<24°19'01.6"N 75°27'25.8"W>

# 고양이 언덕 1

3
어느 날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천둥이 치고 고양이들이 울자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소리쳤다.
1
(뛰어오며) 비다. 비가 내린다.
2
(소리치며) 큰일이다. 가방만 챙겨서 언덕으로 올라가자.
1
(주저앉으며) 그래. 그곳에서 좀 기다리면 잠잠해질 거야. 기다려보자고.
3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고양이들은 언젠가부터 한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고양이 언덕이 바로 그곳이다. 이름 모를 바다 한 가운데 빼꼼 제 머리만 내놓고 있는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거대한 도시의 주인이었지만 40일간의 폭우로 그 일부만이 고양이들을 바다 위로 떠받치고 있는 지금의 섬이 된 것이다. 민머리였던 이곳은 고양이들의 단체 꾹꾹이 덕에 파릇파릇 새순이 돋고 나무가 자라기 시작해 이제는 제법 까끌까끌한 모습이다.
1
비도 그치고 고양이들이 꾹꾹 밭고랑을 갈아주니 고구마 심기가 한결 편하네. 하지만 도시가 바다에 잠겼으니… 기다려보자고.
4
(고구마 줄기를 다듬으며) 고양이들이 우릴 잡아먹지 않고 찐 고구마를 먹어주니 고마운 일이야. 언제나 고구마를 맛있게 찌는 법을 연구허세.
2
고양이 섬은 손오공이 살던 화과산처럼 평온해. 쇠를 녹여 커다란 찜통을 만드세. 몇 단이고 올려서 뽕뽕 구멍을 뚫자고.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고구마를 찌자고.
3
(관객에게) 어느 날의 일이다. 비가 멈춘 도시는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된 40일간의 기록적인 폭우에 다시 바닷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 관측이나 계산 따위는 불필요해졌다. 비는 펄펄 끓는 고구마 찜통을 식히려고 작정한 것처럼 퍼부었고 하늘은 온통 뿌연 증기로 가득 찼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사흘 밤낮으로 비가 더 쏟아져 내렸으니 고양이 섬도 그만큼 좁아졌다.
언덕 위에 다닥다닥 엉덩이를 붙인 고양이들의 울음합창소리가 더 커졌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4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재앙이야. 뭔지 모르겠지만 다 내 탓 아닌가 싶어. 다 내 탓이다 그냥 그렇게 정하고 싶어.
2
고양이들이 우릴 잡아먹으려는가? 찜통 구멍에 손톱을 갈더니 나를 무섭게 노려보더군. 난 냇가에서 고구마를 씻고 있었을 뿐이라고. 고양이들이 너무 싫어졌어 젠장.
1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고양이들이 고구마 밭을 줴 헤집어 놨다는 거야.
결국 더 많은 고구마를 기대하는 게지. 기다려보자고.
2
결국 우리 차례군. 우리가 찜통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 이 말 아닌가. 무엇을 기다리자는 게야. 찜 되고 싶은겨? 인간이 먼저냐 고구마가 먼저냐네. 물론 고양이가 먼저겠지 젠장.
1
잠깐. 엎드려. 땅이 움직인다. 기다려보자고.
3
배가 고파진 고양이들이 깊은 도시바다 속에 동시에 앞발을 담그고 노 젓듯 물고기 사냥을 하는 날에는 고양이 섬이 이리 저리로 이동했고 바다는 온통 흙탕물이 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경기도 송추에 위치한 탤런트 임채무 씨의 두리랜드 범퍼카장을 연상케 했는데 벤츠, 아우디, 페라리 할 것 없이 악셀 밟는 대로 서로를 들이박는 아비규환이었다. 전진과 후진만이 존재하는 말 그대로 참사에 가까운 광경인 것이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밤낮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바닷속 도시는 요동을 치며 뒤섞였다. 강남 대치동에 위치한 은마아파트 몇 동이 혜화로터리 동성고등학교 급식실 자리로 옮겨졌고 광화문 조선일보 사옥이 용산 청와대로 쓸려가 부딪혀 무너져 내렸다.

(2에게) 우리가 있는 곳이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은가? 저 63빌딩이 여의도가 아니라 뚝섬에 있었나?
2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벌어지다니. 저기 보이는 게 평양이란 말이지? 저긴 하와이구만. 세상에. 환상의 섬 하와이가 이렇게 가까워지다니.
1
2
자네 왜 말이 없는가? 뭘 보고 있는 거야?
1
하와이가 아니야. 부곡하와이네. 고양이들이 노하시기 전에 수를 쓰자고.
기다려보세.
3
우리는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해변에 나가 커다란 돛단배를 만들었다.
다 부서진 간판들을 전선으로 엮고 유명 정당과 정치인들이 내건 현수막을 꿰매서 커다란 돛을 만들어 걸었다. 그리고 뱃머리에 “부곡하와이호”라고 이름을 적었다. 앞에 보이는 저 부곡하와이 까지만이라도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과 환상의 섬 하와이의 만남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문제는 바람이었다.
1
(멀리서 달려오며) 이것이 진정한 여야합치구먼. 대단한 콜라보야. 화합이야. 사진 하나 찍세.
아니다. 기다려보자고.
4
색깔이 안 어울리는데. 노란색이 좋은데 없네. 노란색을 찾아보겠네.
2
(화를 내며) 자네 놀러 왔나? 컬러 타령 말고 바람이나 기다리세.
바람 없이 바다로 나갔다가는 어깨 빠지도록 노를 저어야 해.
1
바람이다 바람! 얼른 바다로 나가세. 기다려보세.
3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부곡하와이호’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 푸르고 붉은 돛이 멋지게 부풀어 올랐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고 그렇게 우리는 바람을 타고 한참을 항해했다. 그렇게 도착한 부곡하와이는 다 찌그러진 개밥그릇 같았다. 고향을 떠나 부유하는 개밥그릇이 처참했고 안쓰러웠다.
1
하와이로 불리던 부곡하와이로군.
3
우린 항해를 이어 나갔고 시장에 가서 고구마 모종을 샀다. 근처 마트에 들러 통조림과 캔, 즉석 밥을 샀고 고추장과 라면도 샀다. 카페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고 여의도와 뚝섬 해변에서 고양이들 배변을 위한 모래를 열두 자루나 퍼 담아 배에 실었다.
2
반짝반짝 빛나는 모래를 고양이들이 좋아할 거야.
더 이상 날 노려보지 않겠지.
3
돌아오는 길에 극장에 들러 연극도 보았다. 90년대 인기 만화를 연극으로 만든 작품이었는데 연기도 연출도 정말 개떡이었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배경으로 붙여 놓았는데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분명 환불요청 사유다 라고 생각했지만 음악만은 역시 띵곡이었다.
아 세상이 뒤집어져도 김수철은 김수철이구나.
돌아보니 우리 넷을 제외하고는 모두 범퍼카장에도 못 들어갈 5세 이하의 유치원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단체로 코를 골며 주무셨고 극은 완벽히 계산에 실패했다.
그나저나 정말 세상이 뒤집어지긴 했나 보네. 서유기가 재미없다고?
김수철이?
2
(블루투스 이어폰을 만지며) 무슨 놈의 저팔계가 제사상에 엎드려서 꿈쩍을 안 하냐. 돼지가 저리도 욕심이 없다니. 쥐새끼가 코를 파먹어도 모르겠다. 나도 잔다.
4
(작은 목소리로) 사오정을 연기한 배우는 실제로 귀가 어두우신가?
계속 다른 말을 해. 나도 잘래.
1
삼장법사 연기한 사람은 인간 이하로 고지식해 보여. 암만 봐도 연출자가 직접 연기하는 것 같아. 배우가 도망쳤나 봐. 기다려보자고.
3
잠든 객석을 의식했는지 삼장법사는 내게 무언가를 원하는 눈치를 보냈지만 나는 시장 떡집에서 산 개떡을 꺼내 먹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개떡 냄새에 잠이 깨 배가 고프다고 울며 우르르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공연이 마무리되고 삼장법사는 민머리 가발을 벗고 본인을 이 극의 연출자라고 소개했다. 사오정은 여전히 연기 중이고 저팔계는 제사상 위에서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연출자는 처참히 실패했다.
고양이 섬으로 돌아가는 부곡하와이호 위에서 누군가 말했다.

“우리 춤을 추자. 내게 음악이 있으니 춤을 추자”

개떡 같았던 연극 탓인지 나는 개떡 같은 원숭이 춤을 췄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역시 세상이 뒤집어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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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며) 비다! 비가 내린다! 모래자루를 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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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우리는 돛단배와 함께 길을 잃었다. 배는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요동을 쳤다.
1
(소리치며) 기다려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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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며) 서로를 꽁꽁 묶자고!
4
(소리치며) 그래도 화장실은 가야 하니까 한 2미터 길이로 묶는 것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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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며) 자 나란히 서보세. 시간이 없어. 나란히!
3
그새 모래자루를 파고들어 뿌리를 내린 고구마 순을 잘라 길게 엮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를 단단히 묶었다. 나는 대접이란 대접은 다 꺼내서 빗물을 받았다.
비는 사흘 밤낮 내렸고 도시는 다시 완전히 잠겼다.
2
휴 드디어 비가 멈췄군 그래. 죽을 뻔했다오.
1
기다려보자고.
4
… …
3
바람이 잠잠해지고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태양이 쨍쨍 내리쬐고 바다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빛났다. 태양빛에 머리카락이 타들어갔다.
완전한 민머리까지는 그저 시간문제였다. 우리는 대접에 담아둔 빗물을 나눠 마시며 시간을 버텼다. 노를 저어서 고양이 섬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기력이 없었다. 점점 더 목이 말랐다.
다음 날 음악 주인이 음악을 틀며 말했다.

“이것봐들. 우리 춤을 추자고”

그는 삼장법사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요괴에게 부적을 들고 다가가는 엔딩 장면을 연출해내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그냥 목이 마른 불쌍한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그 안쓰러운 개밥그릇을 지켜볼 뿐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다.
다음 날 대접의 물이 바닥이 나자 타는 듯한 갈증에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순간 갑자기 모두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 주인의 리드에 맞춰 삼장법사 춤을 추며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며 간절히 빌었다. 눈물이 흘렀다. 비가 내리는 듯했다. 그러자 눈이 개운해졌다. 비가 내리는 착각에 빠져 더욱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었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개밥그릇 군무는 하느님 계산에는 들지 못했다. 비가 내리지도 바람이 불지도 않았다.
갈증은 더욱 심해졌고 눈알이 뒤로 들어가 멍했다. 하늘에 악마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는 바닷물을 퍼마셨고 누군가는 펑펑 울며 하늘을 원망했다.
1
기다려보자고.
3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부곡하와이호에 몸을 맡긴 채 미동도 없이 잠든 동료들의 수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사람이 둘 그리고 살이 발라져 뼈대만 남은 사체.
그것은 방어의 사체였다.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내 목덜미를 만져보았다. 따뜻했다.
아가미가 없다. 나는 방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우리가 처음 돛단배를 타고 고양이 섬을 떠날 땐 사람이 넷이었어.
커다란 방어는 사람 키만 하다던데 어쩌면 처음부터 사람 셋 그리고 방어가 한 마리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배를 만들 때 사람 손만 한 지느러미가 망치를 들고 서있던 것 같기도 했어.
모두들 정신없이 배를 만드느라 알아채지 못했던 건 아닐까?
혼자 한참을 떠들었다. 어지러웠고 정신이 혼미했다.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세상이 흐릿하게 빛났고 바다는 기분 좋게 춤추고 있었다. 내 목덜미가 따듯해졌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물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 불행하게도 만나고야 말았다. 말로만 듣던 악마가 내 인생에 나타난 것이다.

# 악마

손오공
이후키키. 이놈 내 슈퍼보드를 내놓아라.
악마
하하 쪼꼬만 원숭아. 나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돌려주마.
만약 네놈이 진다면 갈기갈기 찢어 마른 볕에 널어 육포로 만들어 내다 팔아주마.
손오공
이후키키. 좋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악마
하하. 제법이군. 이번엔 다른 것을 내주지. 가위바위보!
손오공
이후키키. 이겼다!
악마
잠깐. 다른 팔들은 휴가 갔는 줄 아시나?
손오공
응?
악마
위를 보시지.
3
악마가 등불에 불을 대자 음산한 동굴과 날아드는 박쥐들의 살기에 손오공은 두려움을 느꼈다.
손오공
아 다른 손들이 각각 가위와 바위와 보를 서로 다르게 들고 있다니.
졌다. 화과산이 그립구나.

# 다를 것이 없는 모양

3
인간계를 넘어선 자. 치졸한 진실과 사실들이 손오공을 무력하게 짓눌렀다.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인 자. 온갖 수를 다 써보아도 가위바위보로는 그를 이길 방법이 없으니 그는 악마가 분명했다.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인기 만화영화 속 악마는 대충 이러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이 자는 머리가 셋도 아니오 팔이 여섯도 아닌 나와 다를 것이 없는 모양을 하고 있다.
거대한 대접에 물이 가득 차 있었고 그는 그 가운데 서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볼 뿐 물 한 방울 권하지 않았다.
이놈은 내가 말라 죽길 바라는 것이구나.
내가 말라 죽길 바라는 것이다. 이 순간 나는 그저 고단백의 육포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내 살을 발라 육포를 만들고 앙상한 뼈만 남길 심산인 것이다. 그 순간 사람 키만 한 방어 사체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악마의 얼굴에서 생기를 보았고 그의 윤기 나는 얼굴껍데기가 꼭 내 어린 시절 팔뚝 살결 같아서 역겨웠다. 내 목덜미를 만져 보았지만 다행히 아가미는 없었다.
그가 말했다.
다를 것이 없는 모양
자 한 잔 마셔보아라. 네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악마란 말이냐?
3
(말을 자르며) 이상한 계산법을 가지고 있으니 악마가 분명하다.
다를 것이 없는 모양
이해하기 쉽게 말해보아라. 날 이해시킨다면 네 살을 발라먹지 않으마.
3
네가 물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를 것이 없는 모양
아니다.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도 물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물을 가졌다. 다만 모두가 인내 없이 마셔버렸기 때문에 내게만 물이 남아 있는 것이다.
3
(소리치며) 그것 자체가 이상한 계산이다. 언제나 네가 중심에 있으려 하기 때문에 악마인 것이다. 모든 계산이 다 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
넌 교차로를 만들었다.
네가 그렇게 내버려 둔 것이다. 네가 그렇게 되도록 바란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널 거쳐 가도록 말이다.
그 위에 서 있는 자. 이 오만 한 놈.
교차로는 언제나 탈이 나기 마련이다 이 무지막지한 악마야.
넌 그리로 사람들을 내몰고 있다. 무지의 극치다. 이 어리석은 자야.
네 여섯 가지 무지를 알라. 그리고 내려놓으라. 네 세 가지 못남을 돌아보고 뉘우쳐라. 네가 지금이라도 교차로에 나가 용서를 구한다면 네가 악마인 진짜 이유를 말해줄 수 있다.
다를 것이 없는 모양
난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을 겁주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교차로를 찾아온 것은 너다. 넌 목이 마르다.
3
아니다. 넌 사람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깨끗한 것이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래 목마름과 같은 것들이다.
아름답고 솔직한 것이다.
네가 용서 대신 그것을 욕하려거든 궁금해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네 계산은 얄팍하고 난 목이 마르지 않다.

난 부적처럼 목에 매달고 다니던 낙지 악판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차하면 그것으로 악마의 목을 찔러 죽일 셈이었다.
다를 것이 없는 모양
그럴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말해주련. 내가 악마인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을 알기 전엔 죽을 수 없지. 계산이라니? 나는 양심을 걸고 아주 적당한 값에 물을 팔았다. 공짜로 나눠 마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더냐. 내 인생을 걸고 정한 값이란 말이다.
그저 내게 와 목이 마르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값이다.
그리고 이 물은 깨끗한 것이다.
그 누구도 내게서 얻은 물을 마시고 탈이 난 자가 없다.
난 난리 속에서 대접을 들고 버텼다. 네놈처럼 게으르지 않다. 네놈이 자고 있을 때 일어나 일한 대가다. 네 놈이 누구인지 상관없다. 하지만 나를 욕하려거든 네놈부터 돌아보아라. 목마름이 무엇이란 말이냐.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저 한 마디다. 한 마디면 되는 것이다. 네 놈 안에 있는 수많은 잔망들을 부수어라. 그것들을 낳아 기르고 짱둥어를 따라 갯벌을 뛰어놀도록 내놓아라. 목마른 것을 욕되게 하는 것은 네놈이다.
(다시 물 한 잔을 건네며) 자 너를 위함이다. 깊고 깊은 마음을 간직해라.
바다가 뒤틀린다 해도 깊은 곳에 닻을 내려라.
3
지랄마라. 이 금수만도 못한 악한아. 난 물이 필요하지 않다. 남은 물을 다 없애주마. 오호라 그것이 네 욕심 그릇이렷다? 네놈 계산속이렷다?

난 목에 매달아둔 악판으로 물이 가득한 그 거대한 대접을 갈기갈기 부쉈다.

널 구원하는 길이다 이 악마! 왜 네놈이 악마냐고?
이후키키. 목이 말라 죽는다 해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접을 깨부수며 비난을 이어갔고 ‘다를 것이 없는 모양’은
자신이 악마인 이유를 기다리다가 속이 타 죽었다.
그리고 나는 목이 말라 죽었다.

# 고양이 언덕 2

3
사흘 밤낮으로 비가 내렸다. 잔잔한 오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다. 고양이들의 울음합창이었다. 그리고 고구마 찌는 냄새가 났다.
나는 소금물에 찌들어 주저앉아버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양이 섬이었다. 처참하게 부서진 부곡하와이호는 섬 오른편 바위에 부딪혀 누워 있었고 동료들은 해변 위에 서로 뒤엉켜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이었다. 모두가 다를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언덕 위에서는 고양이들이 단체 꾹꾹이로 밭에 고랑을 내고 고구마 모종을 심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잔칫날 같았다. 찜기에서 높게 뿜어져 오른 김이 내 얼굴에 와 닿았다. 따뜻했다.
나는 목덜미를 만져보았다. 아가미였다. 난 커다랗게 호흡하며 그 자리에 한참을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