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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겨운데 - 무서워요 - 무서운데 - 지겨워요 -

다른 손(hands/guests)⁺

이동경

제247호

2023.12.07

[희곡]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읽고 써야 할 희곡들을 싣습니다. 올해는 ‘+’가 더해진 ‘다른 손⁺의 희곡 쓰기’를 선보입니다. ‘다른 손’의 주제적 카테고리 안과 밖에서 쓰여진 새로운 작품들을 만납니다.

등장인물
악이
아기 - ‘악이’와 ‘아기’는 일란성 쌍둥이거나 그렇게 보이는 두 배우가 맡는다.
멀티
무대
똣 . 똣 . 똣 . 똣 . . .
일정한 간격의 소음이 자로 잰 듯 깔려있다. 이 소리는 극장의 문이 열린 순간부터 닫힐 때까지 쭉 함께하며, 등장인물들과 경합한다.
발버둥 치면 간신히 포근함이 느껴질 정도의 적은 빛이 머물러있다.

#

악이 무대 중앙에 근엄하게 등장한다.
악이는 무대 위에 줄곧 존재한다. 등퇴장은 아기와 멀티만이 한다.
멀티는 따로 지문이 없는 한, 자신의 대사를 할 때는 마치 끼어들 듯 대사한다.
악이가 홀로 존재할 때를 제외하면 무대는 시종일관 경쾌하게 흘러간다.

악이
나는 태어났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말았다.
다만 축복받지 못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했을까.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가만히 웅크린 채 지냈다. 조금씩 커 가면서.
나는 알기 위해 매일 내 몸을 맛본다. 내 몸을 통과하는 피의 온도와 점도, 흐르는 속도를 느끼며 모든 걸 알아간다.
심장 소리가 마음을 투명하게 만든다.

아기와 멀티 등장.

아기
또 허리가 아파서 엑스레이를 찍었어요. 발견된 건, 커다란 종양이었어요. 난소들에 달려 있었어요. 종양이 있단 증거는 이 사진뿐인 것 같았어요. 원래 생리통은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첫날부터 삼일까지 네 알, 다음 날부터 한 알씩. 다들 약 먹으며 참지 않나요.
(멀티에게) 저기요, 아픈 허리는 괜찮은 건가요?
멀티
산부인과로 가요. 지금 당장.
아기
피가 뽑혔어요. 팬티를 벗고 일회용 치마를 입은 뒤 두 다리를 벌려 앉는 의자에 앉으래요. 이 병원에서 가장 오래된 것 같이 생긴 할아버지 의사가 스테인리스 기구를 질에 넣었어요. 처음 받는 검사지만 나는 원래 지겹도록 병원에 자주 다니니까 컨베이어벨트 위의 통조림처럼 순종적이고 빠릿빠릿하게 굴렀어요.
종양은 진짜 있었어요. 주먹 두 개를 합한 것보다 커요.
멀티
바로 수술합시다.
아기
작은 충격에도 터져서 내장을 오염시키거나 이미 암덩어리로 돌변해 있을 수 있대요.
멀티
우리 애,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는데요! (운다)
아기
엄마가 엉엉 울었어요. 토닥였어요.
테이블 한 개가 중앙에 놓인 하얀 방으로 보내졌어요. 젊은 남자 의사가 수술 동의서를 쓰다가 갑자기 엄마를 밖으로 내보냈어요.
멀티
(사이. 은밀하게) 오빠한테만 말해봐. 성관계 해본 적 있어? 비밀로 해줄게.
아기
(사이) 엥?
무슨 말인지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했어요.
전 오빠 같은 거 없거든요.
나는 내가 여자인 게 싫어요. 그렇다고 남자라는 건 아니에요.

아기, 멀티 퇴장. 악이 무대 전면에 등장.

악이
나는 발견됐다.
발견되고 나서 쭉- 부끄러웠다. 나는 나를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무엇이 부끄러운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화가 났다.
사실, 가장 화났던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이건 피곤한 게 아니다. 두려움, 두려운 거다.
두렵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종종 기대곤 했던 구불구불한 소장이 사라지고 빛이 들어왔다. 나는 발견된다, 발견되고 만다. 흠- 붙잡고 있던 난소와 생이별을 한다. 보잘것없는 천쪼가리 위에 누워,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던 피의 흐름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이곳에는 인체의 일부분이 잔뜩 버려진 쓰레기장이 있다. 절단된 내장, 유방조직, 그리고 종양들. 후- 죽어버린 조직들이 영원한 한숨을 쉰다.
너 상상해 본 적 있니?
눈을 꼭 감고 있던 너.

#

아기
‘기형종’.
정기검진을 빼먹었었죠. 딱 한 번요.
악마의 장난일까요.
멀티
이블(evil)!
아기
미묘한 통증이 느껴졌어요. 난소에 또 종양이 생겼대요.
후회해요.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나를 돌아봐요. 엄마는 내가 늦게 자고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대요.
후회해요. 여친이랑 헤어지고 혼자 급히 했던 삽입 자위 때문에, 그 딜도가 더러웠던 게 아닐까.
조용히 후회해요.
멀티
발병의 원인은 과학적으로 알려진 게 없어요.
아기
새로운 주치의가 우리의 추리를 교정해줘요. 이번엔 크기가 작아서 배를 열지 않고 구멍 몇 개 뚫어 수술할 거래요. 지난번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한대요.
알바를 그만두고 휴학 신청을 해요. 보험을 알아보고 짐을 싸요.
멀티
(우는 소리)
아기
엄마, 괜찮아요!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날 처음 알았어요. 첫 번째 수술로 남아있는 난소는 오른쪽 15%, 왼쪽 50%래요. 선생님, 저는 그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생리를 멈추게 되나요?
주치의가 말했어요.
멀티
남자친구 있어? 졸업하고 빨리 결혼해. 둘은 낳아야지.

아기, 멀티 퇴장. 악이 무대 전면에 등장.

악이
나는 태어났다.
나는 작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너의 난소로부터 태어났다.
너는 네 몸 어딘가가 기형이라는 것 같아 내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한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활짝 웃는다. 평생 아픔에 담가진 적 없던 것처럼 능숙하게.
혼자 있을 때면 너는 너의 몸을 알지 못한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고개를 처박고 운다. 고개를 들면 온갖 여자들이 병원 대기실에 가득하다. 너는 누구보다도 죽고 싶다. 연기를, 수술을, 치료를, 재활을,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
배가 열렸던 기억은 모든 장기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무서움을 느낀 내장은 서로서로 엉겨 붙어버렸다. 너는 때때로 똥을 누기 전에 움직일 수 없이 고통스러워 기절하곤 한다. 그게 다 소장과 내가 밀착한 덕분이다. 하지만 너는 무엇 때문에 아픈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계들이 뱃속을 돌아다닌다. 붙어있던 내장들을 떼어내며 피를 많이 낸다. 핑그르르 돌며 어지럽다. 곧 수혈된 피의 낯선 향기를 느낀다. 볼록해지던 순간, 소장에 붙어 깊숙이 숨어있던 나는 또 들키고 만다. 나의 가능성은 여기까지-
내가 천쪼가리 위에 누워 숨죽이던 때, 옆방으로 옮겨진 너를 사람들이 깨운다. 너는 겨우 일어나 엄습해온 추위에 온몸을 부르르 떤다. 이불… 이불… 이불거리던 너는 갑자기 운다. 마구 운다. 나는 안다. 너는 살아있는 게 너무나도 기뻐서 울고 있다.

아기, 멀티 등장.

아기
주치의는 성실하고 유능한 의사로 유명했어요. 남은 난소를 살리고 유착된 장기들을 모두 분리했어요.
멀티
(갑자기 아기 앞으로 등장한다. 인사한다.) 환자분, 장기들이 또 유착될 수 있으니 걷기 운동을 하세요.
아기
넵.
한 밤을 자고 일어나 복도를 걸어요. (비틀거리며 걷는다) 빨리 나아야 해요. 할 일이 많아요. (또 걷는다. 지친다) 열이 나요.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니 간호사가 무통 주사 버튼을 여러 번 누르고 가요. 손등에 멍이 들었건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아요. 마침 들른 레지던트에게 통증에 대해 물어봐요.
저기요, 계속 아파요.
멀티
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수술방에 들어갔었거든요? (스마트폰을 꺼낸다) 이 사진 좀 보세요. (아기에게 화면을 넘겨가며 보여주고 몇 사진을 확대해준다) 수술은 아주 깔끔하게 잘 됐어요.
아기
(무대는 아기의 뱃속이 된다. 환상적인 꿈을 꾸는 듯 설렘이 깔려있다. 멀티와 함께 사뿐사뿐 무대를 거닌다) 나의 뱃속은 새빨간 커튼을 여러 개 달아놓은 새빨간 방에 더 새빨간 풍선들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기념사진을 찍는 듯 아기와 멀티가 포즈를 취한다) 사진마다 플래시가 터져 고기 파티라도 열린 것 같았어요-! 마지막으로 레지던트는 내게서 떼어낸 기형종을 보여줘요. (마침내 악이를 발견하여 만난다. 악이는 쪼그라든 채 누워있다)
멀티
머리카락과 이빨이 발견됐어요. 기형종은 자기 마음대로 어떤 신체 부위든지 만들어내거든요. 눈알이나 뇌, 심장 같은 것도요.
아기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에 거대한 이빨을 가진 작은 괴물이 피곤해서 엎드린 채로 잠들어있는 것 같았어요. 자신의 속을 본다는 건 자신을 좀 더 알게 되는 과정일까요.
나는 녀석의 영원한 휴식을 빌었어요.
멀티
미안해, 우리 딸, 사랑해, 우리 딸, 미안해, 우리 딸, 사랑해!
아기
정말로 엄마는 오지 않았어요. 무사히 출근했다니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에요.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비틀거리며 걷다가 엉거주춤 앉는다) 병원 복도를 걷다가 잠시 앉아요. 떡이 진 머리가 두피와 목덜미에 다닥다닥 엉겨 붙었어요. 겨우 손을 올려 가장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요. 그때, (무대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산부인과 병동문이 열리고 내 친구가 들어와요.
(소리)
야~! 이 모자란 년아! 혼자, 미쳤냐?
아기
친구가 욕을 해요. 수소문 끝에 겨우 찾아냈대요.
나를 휠체어에 태워 머리를 감겨줘요.
나는 거절하지 않기로 해요.

#

멀티
아, 그 선생님 환자분이시구나. 에구, 길 잃은 어린양이시구나.
아기
넵, 제가 그 길 잃은 어린양입니다.
(빠르게 걷는다) 병원의 사정으로 주치의가 몇 번씩 바뀌었어요. 여러 명의 의사들을 상대하는 동안 환자질에 퍽 능숙해졌어요. 정기검진 때 가장 빠른 검사 루트를 짜거나 ‘똥 싸기 직전!’을 ‘변의가 느껴질 때~’로 표현하며 질문이 있을 땐 모두 물어봤어요.
멀티
(손가락을 꼽아가며 웅얼댄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아기
무엇보다도 10년 가까이 먹어온 호르몬 약의 셀 수 없는 부작용들을 받아들였어요. 나의 무기력증과 우울은 내가 아니라 약의 부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스스로를 덜 미워할 수 있었어요. 나는 약을 먹는 게 유리하니까요.
여자들이 생리통을 호소하거든 산부인과를 권했어요. 나의 병명과 경험한 것들을 말하기도 했어요. 입을 떼기만 하면 같은 경험을 가진 여자들이 나타났어요. ‘여자들’은 덜 아플 필요가 있어요. 더 아프지 않기 위해 기쁘게 움직였어요. 포기하지 않을수록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여자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됐어요.

아기와 멀티에 가려져 있던 악이가 웅크린 채 무대 전면에 등장. 멀티가 악이를 살핀다.

멀티
여기.
(사이) 종합검진 소견에… 난소 종양이 보이네요.
아기
바로 직전에 갔던 산부인과 정기검진에서는 깨끗하댔는데요.
악이
나는…
아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병원을 찾아갈까?
멀티
우리 장비가 한국에서 가장 좋은 거예요.
아기
다시 미묘한 통증 느끼기를 시도할까?
멀티
거기가 잘못 본 거예요. 보이시죠?
아기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배를 갈라 확인하는 거예요. 무리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놓쳐버린 풍선처럼 헤매기만 해요. 지겨워요.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할까요.
악이
나…
아기
문득 잠든 듯 조용히 엎드려 있던 나의 기형종을 떠올려요.
그를 따라 해요.

아기가 악이 위에 웅크린다. 악이와 아기가 더듬고 엉키며 점차 포개어진다.
멀티는 무대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아기
느껴봅니다.
머리카락과 치아를 가졌던 작은 괴물을.
지겨운데 무서웠던 감각이 무서운데 지겨운 감각으로 바뀌던 그 변곡점을요.
만약 괴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면 무서운 게 낫겠지만,
삶은 지겨운 게 낫지 않겠어요.
모자란 년은 지겨운 삶에서 배운 것들이 많았어요.

빛 한 줄기가 무대에 들어온다.

악이
ㄴ…
아기
나는 태어났으니까 살아갈 생각을 합니다. 우선은…

아기가 악이를 꼭 안는다. 하나가 된다.
암전.
똣 . 똣 . 똣 . 똣 . . . 소리가 계속된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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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경

이동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양의 보호자.
삶을 인용하고 각주를 달며 글을 짓습니다.
horizon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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