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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그날의 하품에

다른 손(hands/guests)⁺

표지인

제248호

2023.12.21

[희곡]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읽고 써야 할 희곡들을 싣습니다. 올해는 ‘+’가 더해진 ‘다른 손⁺의 희곡 쓰기’를 선보입니다. ‘다른 손’의 주제적 카테고리 안과 밖에서 쓰여진 새로운 작품들을 만납니다.

장소
우연히 방문한 작고 허름한 여관
배우 1
우연히 방문한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를 부탁받았습니다. 아무거나 좋으니 이야기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덴 영 재주가 없어서 대신 제가 받은 편지를 읽어도 될까요? 하고 물었는데, 그들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러자 누군가가 어쩌다 그 편지를 받게 되었냐고 물었고, 이 편지가 어쩌다 제 수중에 들어왔는지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건 역시 우연히 방문한 작고 허름한 여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저는 여행자라서 매일 매일 우연의 연속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요청받는 일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길 이 편지의 주인이 이제 없다고 했습니다. 편지를 전하지 못한 죄책감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내게 이 편지를 주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걸 찢든, 버리든, 태우든 뭘 하든 상관없다고 했으니, 제가 이걸 읽어도 괜찮을 겁니다.
배우 2
그 이야기의 시작은 너무 지겨웠던 어느 날 오후 하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하품을 하다가 그는 어떤 말을 했는데, 의도했던 말도 아니었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은, 지금까지 고심하고 뱉은 어떤 말보다도 그럴싸했습니다. 그 말에 이 말과 저 말을 더하면서 이야기가 지어지려는 찰나, 하필 그 순간, 그 사람이 마지막 부분을 들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에게 이야기를 계속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든 그는, 그 사람을 위해 뒤에 올 말을 만들었습니다.
말은 커지면 커질수록 그와 그 사람이 머무는 장소 밖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까닭입니다. 사람들의 호의를 받는 건 아주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신이 나서 뒤에 올 말을 잇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한정 이어질 줄 알았던 그의 상상력은 끝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는 끝이 머지않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인정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사이

잘만 버티면 영원히 숨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기가 지루해질 만하면 새로운 사건을 일으켜서, 이야기를 영원히 끝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으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차분히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침묵

저는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요?
배우 1
예?
배우 2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배우 1
아. 예. 뭐. 그래서 들키고 말았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적혀 있진 않은데, 누군가가 그에게 은밀하게 물었다고 해요.
너 사실 할 말 없지? 하고.
배우 2
예?

사이

배우 1
상상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집에 가는 길에 누군가가 뒤따랐을 거예요. 이야기에 푹 빠진 사람이었겠지요. 그의 집에는 어떤 이야기가 더 있을까. 혹시 결말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잔뜩 품고서 뒤를 밟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 집엔 아무것도 없었던 겁니다. 뜯어진 매트리스와 낡아빠진 책상, 읽을 수도 없는 언어로 빼곡한 책, 그리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그. 이야깃거리가 있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같은 그의 집을 보아버린 거죠. 그렇다고 바로 실망하진 않았을 거예요. 어쩌면 그토록 낡고 허름한 집을 보고 매력을 더욱 느꼈을지도 모르죠.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낼지 잠자코 지켜보기로 합니다. 이야기의 근원은 근사한 집이 아니라 그, 이니까.

그러나 종일 기다려도 그에게서 별다른 걸 발견할 수 없었겠죠. 과연 그가 침대에서 나오기나 했을까요.

물론 고작 하루 동안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바로 실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의 눈에는 그가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이야기를 읊조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속에 도서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이야기를 보관하는 거죠.

그렇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두 달, 기다렸겠죠. 인내심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 싶을 때,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을 겁니다. 궁금해서 미치겠으니까. 무엇이 그렇게도 궁금했을까요. 저는 침대의 한 귀퉁이에 누워서 꼼짝도 않는 그가, 가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그가, 진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잠을 자고 있는 건지 궁금할 것 같습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침입자는, 마침내, 그를 향해 걸어갑니다. 아주 아주 천천히. 그의 콧구멍을 향해 자신의 검지를 뻗고서.

그의 콧구멍에 가까워지자, 침입자는 자신의 검지에 미세한 공기입자가 부딪히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그에게 이 감촉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끼는 세상과의 접촉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순간은 그에게 자신이 살아있고, 이 사람도 살아있다는 걸 가장 생생하게 느낀 순간이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을 텐데, 그의 떨림이 손끝에도 전달되어, 침대에 누워있던 그의 코끝을 슬쩍 찔렀을 겁니다. 그러자 누워있던 사람이 눈을 뜹니다. 그의 입장에선 눈을 뜨자마자 웬 침입자가 자신을 향해 검지를 뻗고 있었을 테니 무척 놀랐겠죠. 그래서 고함을 치든, 살려달라고 빌든, 몸싸움이 벌어지든,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겁니다. 사건의 강도가 격해질수록 감정도 격해졌을 테죠. 그러다 침입자가 말합니다. “난 다 알고 있어 당신은 할 말이 없다는 걸!”

이건 그의 자존심을 대단히 상하게 하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는 자존심보다 훨씬 소중한 걸 잃어버렸을 수도 있어요.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주의를 기울일 때 어떤 눈동자로 저를 보는지 모를 테죠. 저는 당신의 눈동자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당신의 눈동자를 보기가 무서워졌습니다.’

사이

배우 2
제가 들은 이야기는 그날 밤 그가 어떤 생각을 해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야기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야기는 분명 사소한 하품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기억해낸 것입니다. 하필 그날의 하품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어떤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고, 그것이 지금의 이야기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헤매는 이유는 본래 별것 아니었던 이야기를 거창한 무엇이라고 착각해서가 아닐까, 어쩌면 이야기의 결말은 하품과 함께 튀어나온 그 헛소리에 숨어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새로운 인물이나,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하품과 함께 헛소리가 튀어나왔던 그때의 온도, 습도, 분위기,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날의 그 순간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어디에서 그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여기는 벗어나야 한다는 직관이 그를 이 마을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작정 걸었습니다. 자신이 헛된 짓을 하는 것도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달리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너무 멀리 와버린 탓에 돌아가는 길도 몰랐습니다.

걷고, 걷다가, 자신이 걷고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걷다가, 갑자기 재채기가 나왔습니다. 바람이 그의 코끝을 스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외부 자극에 놀란 것도 잠시, 누군가 자신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던 지난 어느 밤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의 한순간을 조우했다는 것을 깨닫고, 목적지가 머지않았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배우 1
“허허벌판”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리 걷고 걷고 걸어도 계속 같은 곳에 머물러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허벌판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허허벌판. 이 네 글자는 어찌나 꾹꾹 눌러 썼는지, 다른 글자보다 더 진하고 두껍게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편지지를 뒤집어보면, 여기 이 네 글자만 볼록 튀어나와 있습니다.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다는 걸 잊을 정도로 걷다가 문득, 여긴 어딘가 하고 주위를 둘러봤을 텐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움직이는 건 나 하나뿐이고. 나는 분명 사지를 움직여 걷고 있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앞으로 걷는 건지 뒤로 걷는 건지 제자리에서 걷는 건지. 이렇게 팔을 꺾고 다리를 들어 올리고 고개를 까닥거리는 것도 나의 착각일 뿐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겠죠.
세상이 그를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있는 세상을 지워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여기서 그 사람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나요.
내가 이야기를 해서
단지 그 이유로
나를 떠났나요?


그는 그 사람에게 간절히 묻고 싶었을 겁니다.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이 섰을 테고, 어디로 가야,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걷고 또 걷다가 비로소 발견한 겁니다.

배우 1, 고개를 숙인다. 양발 사이에 난 균열을 발견한다.

그의 양발 사이에 난 어떤 균열을.
뜯어지다가 만 벽지처럼. 하얀 벽지 같은 것의 한 귀퉁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 균열을.
그는 한참을 보다가 그 귀퉁이를 잡아당겼고, 그건 부욱 소리를 내며
배우 2
편지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배우 1
아뇨.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읽혀요.
배우 2
그렇게 읽힌다고요?
배우 1
네. 여기 이 꾹꾹 눌러쓴 ‘허허벌판’이라는 글씨, 그리고 내가 걷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묘사가.
배우 2
놀랍네요. 저도 예전에 이런 곳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배우 1
여기를요?
배우 2
네.
지면의 구분도 없이, 그저 새하얗기만 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런 곳이었는데,
저는 한 발을 들여놓자마자 재빨리 벗어났어요. 두 발을 모두 여기에 들여놓고 싶기도 했어요. 그것이 호기심 때문인지, 아무것도 없는 고요함에 끌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자칫하다간 여기를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황급히 달아났어요. 가능한 먼 곳으로, 빨리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혹시라도 여기에 매혹될까 봐, 나도 모르게 여기를 찾아올까 봐 무서웠어요.
배우 1
신기하네요.
배우 2
네.
배우 1
편지에는 여기서 벗어나고 얼마 안 가 허름한 여관을 발견했다고 쓰여 있어요. 제가 그를 만난 곳이기도 하지요. 그는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편지를 썼을 겁니다. 그렇게 적혀 있거든요.

‘나는 그 균열을 만졌고, 거기서 뜯어진 벽지 같은 거칠고 나약한 무엇인가가 만져졌고, 그걸 잡아당기니까, 나는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나요.
내가 이야기를 해서
단지 그 이유로
나를 사랑했나요?

이제 와서,
당신이 나를 그냥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유명한 가수가 되었더군요.
당신을 기리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움을 노래한 가수라고.
무의미한 짓인 줄 알지만,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요.
편지를 붙일 여건이 되기만 하면 당신에게 편지하겠노라 다짐했었거든요.
거기 안에 있을 때.’
배우 2
그는 편지를 건네자마자 떠났나요?
배우 1
네. 그랬습니다.
배우 2
이야기의 결말은 지었다나요?
배우 1
그건 모르겠네요.
배우 2
아쉽네요. 그걸 지으려고 떠난 여행인데.
신문에 날 정도면 그 사람은 아주 유명한 가수가 되었나 보네요.
배우 1
그런가요.
배우 2
얼마 전에 유명 가수가 죽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배우 1
많은 사람들이 죽으니까요.
배우 2
어떻게 거기를 벗어나자마자 당신과 만났던 그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사이

그 편지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사이

배우 1
당신은 외지인인가요?
배우 2
네?

사이

네, 그런 셈입니다.
배우 1
그럼 근처에 있는 그 마을에 방문할 예정인가요?
배우 2
편지를 읽었다던 그 마을이요?
배우 1
네.
배우 2
아니요.
배우 1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
배우 2
예?
배우 1
사실 저는 그 편지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언어로 적혀 있었어요.
다른 나라 언어라고 하기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문자였고,
조사를 해보니까, 현존하는 언어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지금은 잊혀진 언어인 것 같습니다.
배우 2
편지를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사이

배우 1
그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런데 제가 방금 말한 건 편지와 무관합니다. 허허벌판이라는 이 글자도 꾹꾹 눌러쓴 티가 나지만 허허벌판인지 모르겠어요. 앞에 두 글자가 같고 뒤에 두 글자는 서로 다른 글자인 것 같지만. 망망대해일지도 모르고 첩첩산중일 수도 있고 강강술래, 아니면 듀듀라셀, 뇽뇽멜라일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네.
상관없으니까.
배우 2
그렇죠.

오랜 정적

배우 2
그 뒤로 그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도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길래, 편지를 보여달라는 말을 다시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루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지루했습니다.
왜 둘인데 혼자일 때보다 더 지루하게 느껴질까, 했는데,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심장 뛰는 소리와 호흡하는 소리가 곧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긴장감을 부여하는데 비해서, (사이)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아서, 라고 혼자 답을 내렸습니다.
이 결론이 타당한지 아닌지. 당신도 이 문제를 궁금해한 적이 있는지,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이제 그는 나와 완전히 다른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굴어서.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 편지에 적힌 언어를 알 수도 있어요!

사이.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나 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는 많은 말을 삼키곤 했으니까, 실제로는 말하지 않고서 말했다고 상상하고 믿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그의 집에도 내가 모르는 언어로 적힌 책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비록 그가 무얼 읽고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몰랐지만, 그가 이야기해주는 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제가 너무 구식인가요?

한번은 그가 없을 때 그의 책상 위에 펼쳐진 채로 놓인 책을 보았습니다. 읽을 순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인지 몇 개 단어가 읽히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때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때의 감정이 무슨 감정이었는지 이제야 보입니다.
나는 그때 당신과 같은 언어로 당신과 같이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배우 1, 하품을 하며 아무 말을 한다. 가령, 듀듀라셀이나 뇽뇽멜라,같은
배우 2,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완전히 까먹는다.

배우 2
예?
배우 1
네?
배우 2
방금 뭐라고 했어요?
배우 1
제가요?
배우 2
예. 방금 뭐라고 말했는데.
배우 1
예?
배우 2
예.
배우 1
아.
저는 하품 했어요.
배우 2
예.
그런데 방금 하품하면서 무슨 말을 했어요. 당신이요.
계속해볼래요?
배우 1
하품을요?
배우 2
아뇨.
방금 하품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봐요.
배우 1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그냥 하품이 나와서 하품을 했을 뿐이라고요.
배우 2
왜 하품을 했을까요?
배우 1
졸렸으니까요.
배우 2
왜 졸렸을까요?
배우 1
그야, 지루했으니까요!
너무 지루했거든요. 더 이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사방은 온통 하얗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는 완전히 잊혀졌었어요. 그러다가 하품이 나왔는데,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배우 2
예.
배우 1
생각해보면 하품하기 직전에 아주 미세한 공기의 흐름 같은 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배우 2
되게 신기한 말이었어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배우 1
생각해보면 하품하기 직전에, 아니 하품과 동시에 저는 엄청 대단한 걸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뱉었던 것 같아요, 당신 말대로요!
근데 그게 뭐였지.
제가 뭐라고 했었나요?
배우 2
전혀 모르겠어요.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이라서.
배우 1
그래도 최대한 따라 해본다면.
배우 2
(시도하려고 하나 포기한다) 못하겠어요.
배우 1
떠오르려고 해요.
무언가 자꾸 떠오르려는 기분이 드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당신은요?
배우 2
저도요.
따라 해보려고 해도, 한 번도 발음해보지 않은 소리라 혀를 어디에다 둬야 할지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사이

배우 1
아, 방금 뭔가가 떠올랐어요. 저는 하품을 하기 직전에 이미 눈을 뜨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가수면 상태에 있던 저는 하품을 하기 직전에 이미 잠에서 깬 상태였던 거죠. 저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졸고 있었으니까. 졸리다고 생각하기 직전에 이미 졸고 있었고, 하품하기 직전에 이미 깨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졸고 있었을 때와 하품하고 있었을 때 사이에 나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내 두 발 사이에서 어떤 길다란 자국을 발견했던 것 같아요. 일종의 균열 같은. 그것을 보고 저게 뭘까, 라고 궁금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무의식중에는 궁금했었을 텐데, 그걸 의식의 차원으로 옮겨, 저걸 궁금해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그만 하품을 하고 말았던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래서 나는 하품을 하면서, 아마도.
배우 2
그만
그만 둬요.
배우 1
네?
배우 2
기억해내려고 애쓰지 말아요.
당신이 하려던 말이 내가 들었던 소리와 다르다면,
우리는 또 혼란스러워질 텐데.
이제는

그만하고 싶어요.

사이

배우 1
그게 좋겠네요.
그렇다면 이제 뭘 하죠?
배우 2
글쎄요.

사이

배우 2
아, 이야기해줄래요?
배우 1
이야기요?
배우 2
예.

사이

배우 1
무슨 이야기요?

사이

배우 2
그냥 아무거나.

정적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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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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