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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는 이야기

쓰고 보니

나수민

제250호

2024.02.29

[쓰고 보니]는 쓰는 동안 극작가의 몸을 통과해 간 것들을 기록합니다. 극을 쓴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실천을 동반하는지 그 흔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지금의 극쓰기를 반추해보고자 합니다.

극장에서 자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연극 시작하고 10분 만에 잠들더니 옆에 앉은 동행의 어깨에 아주 편안한 각도로 머리를 기대고서는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음악이 흘러도, 조명이 번쩍여도 절대 깨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그 사람 바로 뒤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러닝타임 동안 배우보다 그 사람 뒤통수를 더 오래 본 것 같다. 그야 내가 참여한 공연이었으니까. 하하하, 하하, 하(한숨)……. 그 사람은 딱 한 번 잠에서 깼는데, 때마침 무대 위에서는 배우 A가 잠이 든 배우 B를 야 야 야 부르며 깨우고 있었고, 바로 그 순간에 천년의 잠에 든 그 사람이 번뜩 잠에서 깼다. 그리고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당신은 꿈을 꾸는 중인데 과학적 실수 때문에 꿈의 주민과 눈을 맞추게 된 건지도 모르지요.1)
연극과 꿈은 이상하게 닮아있다. 나는 평소에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이라서 더욱 그렇다. 일어나자마자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도 있고, 반대로 전혀 생각나지 않는 꿈도 있고, 두루뭉술하게 느낌으로만 남아 있는 꿈도 있다. 악몽은 거의 꾸지 않는다. 가위에 눌린 적도 손에 꼽는다. 내 꿈은 대부분 비논리적이고 억지스럽고 허무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시트콤이다. 물론 이런 나도 악몽을 꾸긴 꾼다. 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래 달력은 2023년 12월부터 2024년 2월 마감일까지 기록한 꿈 달력이다. 글쓰기와 악몽꾸기의 상관관계를 알아내고자 만들었으나 막상 기록하다 보니 글쓰기가 악몽보다는 꿈의 내용에 더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촘촘한 모눈종이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칸을 나눠 달력을 그렸다. 2023년 12월의 달력으로, 1일이 시작되기 전 비어 있는 칸에 기록 표기에 대한 해설이 있다. 회색 동그라미는 꿈 안 꾸다, 연두색 동그라미는 꿈꿨는데 기억X, 파란색 동그라미는 꿈꿨고 기억O, 초록색 별은 글쓰다, 라고 되어 있다. 듬성듬성 공백으로 남아 있는 칸에는 날짜별로 회색 동그라미와 연두색 동그라미, 녹색 별이 그려져 있다. 파란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칸에는 꿈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형식의 달력 이미지다. 2024년 1월의 달력으로, 파란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꿈의 내용들은 날짜별로 다음과 같다. 3일: A가 내게 “깊은 공감”이 글에 있어야 한다고 피드백. “깊은”만 듣고 바로 고개 끄덕임. 7일: 이건 깨서도 기억해야지 했던 한 마디 “보그 오브 고릴라”. 8일: 공연했는데 동굴 안에 놓은 돌 위에서 했고 내가 표절 시비에 휘말림…. 9일: 머리 안 감고 냅다 나가야 했는데 사람들이(선후배) 나를 이상하다며 싫어했고, 팽이치기 했다. 11일: 연극 보러 갔다가 연출이 모두 앞에서 피드백하고 결국 연극 못 보고 집 오다. 15일: 고등학교 올라가는데 신이 점쳐주었다. 거대한 식물 같은 여자였다. 16일: 운석인가 뭐가 떨어져서 전등(엄청 큰 알전구) 떨어뜨렸는데 알바생이 받아내서 박수갈채. 17일: 콩이 산책시키는데 파란색 가면을 쓴 뿔 달린 염소를 만나서 인사했다. 18일: 교정하려고 했는데 외부의 방해로 실패. 19일: 이상한 동물병원에 가서 개구리 같은 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온 벽에 그림을 그리는 청소년을 만나다. 21일: 2시에 나가야 하는데 누가 창문으로 사다리 세우고 이웃친구 안소희(원더걸스) 만나서 지각하다. 26일: 다들 조랑말을 한 마리씩 파트너로 데리고 다니는데 벌거벗고 가족 싸움 남. 28일: 수학여행 가서 숙소를 바꿨는데 짐을 다 놓고 와서 어째야 하나 생각 중에 오레오가 먹고 싶어짐. 30일: 방 벽에 이상한 해양생물이 붙어 있었다. 일자 모양 줄무늬….
같은 형식의 달력 이미지다. 2024년 2월의 달력으로, 2월 13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2023년 12월 11일 월요일 글쓰다

소주병 폭탄을 만들었다. 불을 붙이면 탈 만한 것을 초록색 참이슬 병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주로 종이. 잔뜩 구겨서 공 모양으로 만든 다음에 병 안에 넣는다. 종이 공이 좁은 병목을 어떻게 통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은 공을 잘도 삼킨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이 계속 만든다.1
1 잘 쓴 글이란 무엇일까? 읽거나 보면 바로 아는데, 막상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 어려운 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당시에 내 역량을 벗어난 희망사항 때문에 괴로웠다) 꿈속의 나는 소주병 폭탄을 만들었다. 만드는 동안 악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무념무상에 가까웠다. 폭탄이란 어딘가에서 터지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인데, 던질 생각도 방향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글도 그렇게 써야 잘 쓸 수 있는 걸까? 아무도 보지 않고 어디에도 향하지 않을 글?

2024년 1월 8일 월요일 글쓰지 않다

동굴에서 공연을 했다. 층고가 높고 종유석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 무대는 높은 절벽에 있었다. 관객은 절벽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연극을 봐야 하는데 다들 불편하지도 않은지 돗자리 깔고 앉아서 피크닉 나온 것처럼 밥도 먹고 하하호호 떠든다. 공연이 시작하고, 영화 <라이언킹>의 한 장면처럼 절벽에서 배우A가 배우B를 들어 올렸는데 갑자기 나는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 내가 표절 아니라고, 나도 원래 저 장면을 생각했었다고 주장하는데 듣는 사람은 없고 연극은 중단되고 사람들은 돗자리 정리해서 돌아가고 소란스러운 와중에 실망한 표정의 창작진들이 나를 찾아온다.2
2왜 꿈속 공연은 늘 망할까? 잘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미리 망한다고 해서 실제로 망했을 때 덜 힘든 것도 아닌데. 작년 꿈속에서 나는 극장에 앉아 양치를 했다. 무대 위에서 진행 중인 공연이 내 공연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순간 극장에서 내 좌석이 사라졌다. 나는 극장 계단참에 앉아서 계속 양치를 했다. 초등학생 관객들이 지루하다면서 극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뛰놀았다. 오… 망했는데……. 생각하면서 계속 양치를 했고 어디선가 나타난 연출이 내게 양치 거품을 뱉을 비닐봉지를 건넸다. 연출도 자리가 없어서 극장을 유랑 중이었다.

2024년 1월 19일 금요일 글쓰다

여자애가 낙서를 시작했다. 온갖 곳에다가 빨간색으로 글씨를 휘갈기고는 달아난다. 건물 담벼락에도, 학년과 반이 적힌 표지판에도, 신호등에도, 육교, 철제문, 길바닥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낙서를 하더니 내 핸드폰 액정에다가도 하고 달아난다. 여자애는 움직임이 정말 빠르고 유려하다. 꼭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처럼 움직인다. 땅에서 점프하면 10m는 뛰어오르는 것 같다. 너무 빨라서 얼굴은 안 보이는데 머리가 길다. 여자애가 쓴 문구는 읽을 수가 없는데 사랑에 관련된 말이라는 건 알 수 있다. 멋진 사랑을 시작했나 본데. 생각하면서 핸드폰 액정을 본다. 새빨간 글씨가 가득하지만 여전히 읽을 수는 없다.3
3사랑에 대해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더니 저런 인물이 나왔다. 이런 인물은 꿈에서 깨서도 오래 생각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글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을 남발하거나 사랑하지 말아야 할 존재를 사랑하는 인물로. 또는 이상한 낙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나저나 내 꿈속엔 유려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자주 나온다. 저번엔 나한테 못되게 굴었던 카페 알바생이 카페 차양에서 뚝 떨어진 거대한 알전구를 유려한 움직임으로 받아내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용서했던 적도 있다. 유려한 움직임에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 물론 당연히 꿈속에서만 가능한 용서다. 꿈밖에서는 상대가 3단 높이뛰기에 물구나무를 서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꿈을 기록하는 동안, 자기혐오와 무력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이 종종 ‘좋아서 하는 일’로 설명될 때 말할 수 없게 되는 것들. 직업과 예술이라는 단어 사이에서 매번 헤매게 된다. 이건 내(가) 문제인가? 다들 어떻게 먹고 사는 거지? 그사이 나는 꿈속에서 자주 이상한 사람이 되었고,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속에서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건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으나 자기 자신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되는 일’ 같다고 생각한다. 이 깨달음은 꿈밖의 나를 조금 보살펴준다. 꿈속과 꿈밖은 이런 식으로 교차하며 내 삶과 글을 직조해낸다. 이상한 무늬의 이불처럼. 가끔 차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뭐 어쩌겠어 하는 마음으로 일단 한다. 진짜 이상한 마음.

  1. 조너선 레섬, 『그녀가 테이블 너머로 건너갈 때』, 황금가지, 2023, 206쪽. “아마도 결함이 우리 꿈을 꾸는 중인데 과학적 실수 때문에 꿈의 주인과 눈을 맞추게 된 건지도 모르지요.”를 변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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