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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스크리브너, 넘버스

쓰고 보니

전성현

제250호

2024.02.29

[쓰고 보니]는 쓰는 동안 극작가의 몸을 통과해 간 것들을 기록합니다. 극을 쓴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실천을 동반하는지 그 흔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지금의 극쓰기를 반추해보고자 합니다.

희곡을 한 편 쓰고 나면, 책상 위에 B5 종이가 수백 장 쌓인다. 500장짜리 용지 묶음을 옆에 놓고 높이를 재보니 최근에 쓴 작품 노트는 1,000장을 넘지는 않는 것 같다. 클립보드에 종이를 두툼하게 끼워 만년필로 끄적이며 구상을 하기 때문인데, 거기다 대사를 끄적이는 경우는 없다. 구상 단계가 끝난 뒤에 전체 대사를 한꺼번에 쓰고, 그때는 키보드를 이용한다. 필통 속에 만년필이 열 자루 있고, 색과 촉 굵기가 다양하다. 실사용이 목적이라 비싼 만년필은 쓰지 않는다. 가벼운 플라스틱 만년필이 오래 쓰기엔 좋다. 처음부터 만년필이 작업도구였던 건 아니고, 처음 두어 편은 노트북으로만 구성과 장면 쓰기를 다 끝냈다. 그러다 매력적인 인물이나 강력한 사건으로 관객의 약점을 공략하는 플롯의 전략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그때부터 종이에다 되는대로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플롯에서 벗어나 다른 형식을 찾아야 했기 때문인데, 말 그대로 맨땅에 머리 박듯 하는 거라 손으로 끄적이는 게 자연스러웠다. 플러스펜에서 시작해 점점 부드러운 볼펜을 찾다가 연필로, HB에서 점점 진하게, 결국은 4B로. 그렇게 한동안 4B연필을 한 뭉치 들고 다니며 끄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 결국 잉크를 콸콸 쏟아내는 만년필에 정착했다.

극작을 한다기보다 극작법을 창안한다는 마음으로, 보통은 썼던 걸 또 쓰면서 생각을 밀고 나가는데, 빈 종이에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쓰면서 생각을 조금씩 추가하고 고쳐나간다. 인물이나 사건 따위 내용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 늘 형식을 먼저 고민하고 거기에 맞는 내용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설계도를 그리듯이 어떤 구조를 계속해서 쓰고 그리고 채워 넣는다. 그러다 기억해둬야 할 내용을 노트북에 옮겨놓는다. 글쓰기 프로그램은 스크리브너를 이용하고, 그 못지않게 엑셀 프로그램인 넘버스를 활용한다. 구조를 만들어내는 게 작업의 대부분이라 도표가 없으면 길을 잃어버린다. 구상이 끝날 때가 되면, 배율을 25%로 줄여도 한 화면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도표가 생성된다. 그리고 대사를 쓰는 시간이 오는데, 아무리 오래 구상한 작품이라도 장면 쓰기는 일주일 남짓이면 끝난다.

대사는 암막커튼을 쳐 방을 깜깜하게 해놓고 쓰는데, 쓰다가 너무 잘 써진다 싶으면 벌떡 일어나 방을 돌아다닌다. 의식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데, 아마도 아드레날린이 나와 약간 들뜨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상태에서 쓰는 글을 몸이 신뢰하지 않는 건지, 그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좁은 방을 방황해야 이어쓰기가 가능하다. 초고 쓰기의 고단함이 끝나면, 몇 번이고 출력한 뒤 손으로 고치고 화면에서 고치고 하며 작품을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쌓아놓은 종이뭉치를 책상 아래로 내려놓고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작업과 작업 사이에 쉬는 기간을 두지 않고 바로 이어서 뭔가를 끄적이려 하지만, 보통 그때쯤 몸이 알아서 널브러진다. 아프다기보다 게으름의 끝을 본다. 다시 일어나 책상에 앉으면 무엇을 써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 빈 종이에 사건이라는 단어와 일상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그 둘 사이의 빈 공간을 한참 노려보며 뭔가를 끄적인다. 사건과 사건 바깥의 세계를 통합하는 형식을 창안함으로써 세계의 총체성에 다가간다는 전망인데, 그걸 어떻게 하지 하며 하루에 열 장 스무 장씩 종이를 낭비하다 보면, 어렴풋한 구조가 점점 뚜렷해진다. 극단적으로,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작업이라 타인의 이해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포기하지 않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고,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보상이라는 생각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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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

전성현
그린피그에서 희곡을 씁니다. <174517>, <동시대인>, <천만 개의 도시>, <엑스트라 연대기>, <악몽 또한 당신을 들여다본다>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withoutlevi@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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