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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밭을 기어가는 민달팽이의 마음으로

쓰고 보니

우지안

제251호

2024.03.28

[쓰고 보니]는 쓰는 동안 극작가의 몸을 통과해 간 것들을 기록합니다. 극을 쓴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실천을 동반하는지 그 흔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지금의 극쓰기를 반추해보고자 합니다.

‘쓰기’는 언제부터 시작될까

작년에 낭독극으로 공연한 희곡 「다정이 병인 양하여」를 쓰며 통과한 것들에 대해 기록한다. ‘쓰기’는 언제부터 시작될까? 원고의 첫 자를 쓰기 시작했을 때? ‘이걸 쓰자’고 마음먹었을 때? 첫 아이디어를 떠올린 순간? 아니면 희곡이 되리라는 생각도 못 한 채 어떤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 <다정이 병인 양하여>와 연결될 수 있는 기록을 시간순으로 나열해 보았다.

1. 2017년의 그림. 새가 상처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있는 새.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정사각형의 일러스트 이미지.

2. 2017년의 그림. 다 큰 고양이가 비쩍 마른 어미의 젖을 빨고 있었다.

두 고양이.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정사각형의 일러스트 이미지.

3. 2018년의 그림. 2016년 정도부터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장면을 그리다. “귀지가 달그락거려 이비인후과에 가서 빼냈더니 지구였다.” 이 그림은 잃어버렸다.

4. 2017년부터 2019년까지의 일기 및 메모들. ‘용서’라는 제목의 폴더로 모아놓았다.

“용서”라는 이름의 폴더에 들어 있는 18개의 파일 목록. 각각의 파일명은 날짜와 제목, page라는 확장자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들은 대부분 메모, 메모 모음 같은 것들이고, 그밖에 “맥스장례식에서 읽은 메모(전체 글의 일부인 듯)”, “i이와 만나고 기억한 것 메모” 등의 제목이 있다.

5. 2022년 4월 22일. 무늬글방의 리타 수업 ‘여성적 공격성의 형상들2.0’의 최종 과제로 「다정이 병인 양하여」 5장까지 쓰다.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마감을 만들기 위해 수업을 들었다.

[리타]여성적 공격성의 형상들2.0이라는 사이트에 「다정이 병인 양 하여」 파일을 업로드한 페이지 캡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희곡입니다. 아직 도입부(?) 초반(?)을 쓰는 중이라 끔찍하게 부끄럽지만 공유합니다. 완성해서 제출하고 싶었는데... 거친 글이라도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려요. 수업은 매번 너무나 웃기고 즐거웠어요. 감사합니다. 모두 보고싶어요.”

6. 2023년 1월 29일. 무늬글방의 이끼글방 일요반 3주 차 과제로 초고를 완성하다. 역시 마감을 위해 수업을 들었다.

[8기]이끼글방/일요반 사이트에 쓴 글 캡처. “지난 리타 강의에서 썼던 희곡 <다정이 병인 양 하여>를 퇴고중입니다. 가장 최신 버전을 올립니다. 이전 버전을 보셨던 분들이 계실까 민망하네요. 양해 부탁드릴게요. 여기서만 봐주세요. 부탁드려요...”

7. 2023년 9월 15일. 최종고를 탈고하다.

8. 2023년 10월 9일. 책을 발주하다. (편집자 현호정, 디자이너 정소영, 작품 해설 이연숙(리타))

「다정이 병인 양 하여」 책의 표지. 전체 면이 크기가 다른 여섯 개의 직사각형으로 쪼개져 있다. 각각의 직사각형은 분홍색과 하늘색, 노란색, 검은색으로, 정확한 형체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이 들어 있다.

9. 2023년 10월 15, 22일. 낭독극을 공연하고 책을 팔다. 남은 책 5권을 위탁하다. (독립서점 풀무질)

목재 책장의 한 층을 가까이서 찍은 모습. 「다정이 병인 양 하여」 책이, 앞면이 드러나게 세워져 있다. 그 옆쪽으로 책등이 보이도록 꽂힌 책들이 있는데,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 「우리는 적당히 가까워」 등이다.

부끄러운 것에 대해 쓰는 부끄러운 과정

여기까지 쓰자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슬그머니 속삭인다.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헉.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다니. 심지어 3번에서 그걸 고백하고 있잖아. 시간순으로 가장 먼 일부터 솔직하게 쓰지 못했다. 1번 이전, 최소한 2016년 이전에도 나는 귀지가 굴러다니면 세상이 울리는 소리를 나만 듣는 것 같다고, 그게 마치 내가 겪은 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끝까지 무언가를 숨기려고 할까?

「다정이 병인 양하여」의 주인공 구다정은 애인 부치걸과 헤어질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 교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정이 많은 여자애 다정은 자신의 ‘정 많음’에서 발원하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마주한다. 다정의 죄의식은 귀 속에서 점점 커지는 귀지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데, 이 귀지는 결국 지구 전체로 밝혀진다. 퀴어, 폴리아모리, 세대간성애, 성폭력, 자해와 강박… 자신을 둘러싼 여러 화두 앞에서 다정은 점점 더 나쁜 선택만 내린다.2)

초고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지안아, 자칫 잘못하면 치기 어린 작품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정말 치기 어린 것과 그를 의도한 것의 차이를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치기 稚氣
어리고 유치한 기분이나 감정3)

어릴 치 稚
1. 어리다
2. 유치하다(幼稚--)
3. 작다
4. 늦다
5. 더디다
6. 오만하다(傲慢--)
7. 어린 벼
8. 작은 벼
9. 만생종(晩生種)
10. 치자(稚子: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4)

다정한 그의 조언을 두고 오래 생각한 결과 이 작품은 치기 어린 게 맞다. 한참 지나 늦게 도착했고, 거짓말로 사랑받고자 하니 오만하고, 부끄러울 정도로 어리고 유치하다. 다시 묻는다. 나는 끝까지 숨기고 싶은 게 맞나? 그럼 이건 왜 쓴 건데?

이연숙은 자신의 첫 책 『진격하는 저급들』의 서문 ‘젠더 문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다린다. 은밀히 내 구멍 자국을 당신에게 들키기를 소망하면서. 약하고 수동적이지만 그럼에도 끈질긴 소망. 그런 식으로 우리는 수치가 제공하는 시차를 통해 ‘우리’에 속하게 될지도 모른다”.5)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숨기고 싶은 것에 대해서 왜 꼭 써야만 할까. 부끄러운 것에 대해 쓰는 부끄러운 과정 속에서 나는 소금밭을 건너야 하는 민달팽이처럼, 지금 막 다시 태어난 아기 볼드모트처럼 연약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아무리 부끄러워도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써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만 제대로 해내면 어떤 대사, 어떤 단어, 어떤 장면과 인물들은 다 거짓말로 써도 된다. 하지만 진액을 질질 흘리는 이 민달팽이는 기필코 저 너머로 보내야만 한다.

들키기 위해서. 그래서 당신이 나를 알아봐 주고, 잠시라도 우리가 만나기 위해서.

  1. 이 민달팽이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쿠키의 도전: 소설가맛 쿠키편 - 03. 양파맛 쿠키」(현호정, 문학웹진 LIM, 2024)에서 읽을 수 있다.
    //webzinelim.com/3035
  2. 낭독극 <다정이 병인 양하여>의 시놉시스 중 일부. 전문은 독립서점 풀무질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m.poolmoojil.com/product/%EC%95%88%ED%8B%B0%EB%AC%B4%EB%AF%BC%ED%81%B4%EB%9F%BDamc-%EB%82%AD%EB%8F%85%EA%B7%B9/1252/category/1/display/2/
  3. 표준국어대사전을 참고했다.
  4. 네이버 한자사전을 참고했다.
  5. 이연숙, 『진격하는 저급들』,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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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안

우지안
안티무민클럽AMC에서 연극을 합니다. 삶에서 길어올린 미시적이고 자기고백적인 이야기를 세계의 슬픔과 연결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정이 병인 양하여>, <라즈베리 부루>, <단명소녀 투쟁기>,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2020 메갈리아의 딸들> 등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jiann0307@gmail.com 인스타그램 @jiann.ooo 트위터 @jiann_ooo 안티무민클럽AMC 인스타그램, 트위터 @antimoomin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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