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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의 자기반성요? 또요?

드림플레이 테제21 <한남韓男의 광시곡狂詩曲 (K-Men’s Rhapsody)>

김민조

제224호

2022.10.27

필자에게 <한남의 광시곡> 리뷰 의뢰가 온 것은 아마도 수년 전에 드림플레이 테제21의 <알리바이 연대기>에 대한 리뷰를 연극in에 게재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 필자는 <알리바이 연대기>가 그려내는 한국 근현대사가 여성의 얼굴이 지워진 남성종(種) 서사에 가까우며, 그렇기에 그 공연은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동시대적 질문에 화답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리뷰에 담았다.1) 감히 韓男이나 K-men이라는, 남초 커뮤니티의 일부 유저들이 과민하게 반응할 만한 워딩을 용감하게 극장 현판에 내걸고 한국 남성성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하고 있는 <한남의 광시곡>은 이제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가?

<한남의 광시곡> 공연사진이다. 하얀색 원피스에, 하얀색 모자,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여성 배우가 긴 총을 들어 한 남성을 겨냥하고 있다. 총부리가 향하는 곳에 있는 남성은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양팔을 들어 올리는 참이다. 두 사람 뒤에는 위아래 모두 하얀색 옷을 입고, 하얀 모자를 쓴 남성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식민지 남성성, 반공 전사 남성성, 산업 역군 남성성, 혁명가/지식인 남성성, 가부장제가 사라진 시대의 가부장 남성성, 마이너리티 피해자 남성성”2) 등등 근 1백 년 사이의 역사적인 시공간들을 혼합‧병치하며 한국 남성성의 노정을 추적하는 이 연극에 유난히 빠져 있는 것, 아니 한국 남성의 자기반성문 양식에서 대체로 반성되지 않는 남성성의 형태에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페미니스트 남성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용어가 남성으로 패싱되는 존재가 젠더 정의를 실천하고 추구하는 모든 양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동족비판과 고해성사의 의례 속에서 남성성의 수복과 재권력화가 기도되는 어떤 특수한―그러나 결코 희귀하지 않은―양상에 대한 용어로 읽히기를 바란다. 페미니스트 남성성은 자기반성의 제스처를 알리바이로 삼아 시대와 현실을 분석하는 조망자의 시좌(視座)로 너무도 쉽게 초월하는 종류의 남성성, 그리하여 이 연극에서도 여러 차례 발음되었던 계몽된 ‘신남성’의 발화 권력과 상징 권력을 수복하기를 도모하는 종류의 남성성이다.
이 연극에 대한 리뷰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유난히 출몰하기 시작한 이 새로운 남성(성)의 행방을 굳이 문제 삼는 이유는 첫째, 이 연극이 “10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3) 신남성의 출현을 촉구하는 연극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른바 신남성에 대한 믿음이 기만과 배신으로 귀결되어 온 현재사를 이미 알고 있다. 각계 #metoo 운동의 고발 리스트에서 신남성 또는 친여성주의 남성의 이미지를 거느리고 있었던 정치가, 예술가, 활동가 등의 이름을 골라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남의 광시곡>은 신여성들을 기만했던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이나 함께 투쟁했던 여성 조합원들을 노사 협상의 희생양으로 팔아넘겼던 민주화 시대의 남성들을 보여주며 배신의 역사를 주제화하고 있는데, 맨스플레인과 그루밍 성폭력으로 얼룩진 신남성의 현재사는 그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다소간 구별된다. 이제는 그 모든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함축한 ‘페미니스트’라는 알리바이로 배신이 벌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둘째, <한남의 광시곡>이라는 연극도 발화의 에토스라는 차원에서 이 혐의를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들이 지난 100년간 벌여온 천태만상을 재현하는 배우들은 ‘지금 과장된 악역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반드시 알아차려야 한다는 듯이 과잉의 표지들을 거듭 강조하고 있으며, 연극은 무대 위의 한국 남성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시종일관 “왜 이러는 걸까요?”라는 외부인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극이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하는 주체의 완벽한 분리에 근거하고 있기에, 전자가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질수록 무대의 (불)투명한 장막 뒤에 숨어있는 후자의 도덕적인 자의식은 고양된다. 한국 남성을 준열하게 성토하며 스스로를 ‘다른 남성’의 발화 위치로 격상시키는 메커니즘을 이미 숱하게 경험한 관객이라면, 이 연극의 ‘반성’과 ‘선언’ 또한 의심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남의 광시곡> 공연사진이다. 한 여성이 양손에 권투 글러브를 끼고 한쪽 팔을 치켜들며 기뻐하고 있다. 여성이 입은 티셔츠에는 영문으로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고 적혀 있다. 이 여성의 오른쪽과 뒤쪽에 거리를 두고 하얀 옷을 입은 남성들이 각각 서 있다. 두 사람도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 있다.

한국 남자에 대한 조롱은 쉽고 분석은 어려우며, 성찰은 그보다도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를 남성으로 정체화하고 있는 멤버들이 중심인 팀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해 만들었다는 연극이 대체로 풍자와 희화화의 정념으로 봉인되어 있는 까닭은, 아마도 ‘한남을 까는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성찰적인 질문을 진실하게 대면할 때 발화의 에토스가 사분오열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남의 광시곡>은 이 전형적인 패턴에서 얼마나 나아갔는가. 남성사를 비판하고 여성사를 조명했다고 해서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이 해소될 수 있는지, ‘누가 쓰는 역사인가?’라는 질문이 예비된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한국 남성성을 성찰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남의 광시곡>이 남긴 질문들은 더 있다. 첫째는 중인환시리에 마음 편히 비웃음을 살 수 있도록 재현된 한국 남성(성)의 역사를 지켜보는 것이 과연 얼마나 유익한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 문인들이 주관한 잡지 『신여성』이 당대의 유명한 여성 인사들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매체로 악용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에 덧붙여 ‘『신여성』=월간지=월간 베스트=일베’로 비약하는 유머를 삽입한 경우가 그러하다. 풍자극이 그래왔듯이 어떤 권력의 메커니즘은 터무니없이 유치하고 단순한 유머의 형태로 포착될 수 있지만, <한남의 광시곡>이 구사하는 유머는 종종 복잡한 문제를 납작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는가.
둘째,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 한남 배역을 ‘악역으로 간주하도록’ 틀 짓는 연기 양식에 의존하고 있다면 과연 그 웃음이 인식적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한국 남성성이 정교한 코미디의 문법에 따라 묘파되는 과정 속에서 웃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겁한 표정, 비열함을 강조하는 악센트,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슬랩스틱 등등 ‘여기에서 웃으면 된다’고 지정된 외형적 표지들에 의해 웃음이 일어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았다. 이 연극을, 하나의 캐릭터로 한남을 전형화한 일종의 성격희극이라 볼 여지도 있겠지만, 성격희극의 웃음이야말로 전형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은가.

<한남의 광시곡> 공연사진이다. 오른쪽에 한 남성이, 왼쪽에 한 여성이 서 있다. 남성의 시선은 여성을 향하고 있으나, 여성의 시선은 그를 빗겨나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치아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남성은 하얀색 옷에 검은 띠가 둘린 하얀 중절모를 썼다. 여성은 흰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분홍색 매듭 장식을 달았으며,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고 목둘레선에 선글라스가 꽂혀 있다.

<한남의 광시곡>에서 주목을 끄는 순간은 오히려 여성으로 지정된 배역들이 무대의 중심에 서는 장면들에서 나온다. 특히 1931년 을밀대 고공농성의 주인공 강주룡을 연기한 정유미의 열연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무대 오른편에 설치된 가벽에 올라서서 다부진 평안도 말씨로 동맹파업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강주룡의 모습은 일신의 생사를 잊은 투사처럼 결연하지만 인자하고, 정서로 충만하지만 단호하다. 고공에서 지상의 여직공들을 굽어보고 다독이는 강주룡의 시선, 라이브 필름으로 무대 후면에 투사되는 강주룡의 이미지를 실물과 겹쳐보는 관객의 시선, 그 사이에서 강주룡을 올려다보는 여성 문인 강경애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얽히는 장면은 기록의 어간에 잠재된 역사적 이미지가 연극의 형식으로 번역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운 점은 <한남의 광시곡>의 기획 의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순간들, 주인공으로 지정된 한남들이 스스로 자멸한 탓에 여성들에게 발화의 시간이 주어진 순간들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순간들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멀리 돌아와야 했는가? 한남의 자기반성이라는 형식은 이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운명을 그만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한남의 광시곡> 공연사진이다. 가로로 긴 테이블의 삼면에 세 여성이 각각 앉아 있다. 모두 하얀 옷을 입었고, 목에 하얀 스카프를 둘렀으며, 쪽진머리를 하고 있다. 각자 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빵을 가지고 있으며, 웃는 얼굴이다.

[사진 제공: 가림토 김명집(드림플레이 테제21)]

드림플레이 테제21 <한남韓男의 광시곡狂詩曲 (K-Men’s Rhapsody)>
  • 일자 2022.10.6 ~ 10.23
  • 장소 선돌극장
  • 작·연출 김재엽 출연 김세환, 백운철, 서정식, 이다혜, 이소영, 이태하, 정유미 기획 김재웅 조연출·그래픽 박예슬 무대 서지영 의상 오수현 영상 윤민철 일본어 감수 이정규 분장 이지연 드라마투르그 이지현 진행 이진 소품 이한선 조명 최인수 음악 한재권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2034
  1. 김민조, 「[세대교차] 92학번 재엽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국립극단 <알리바이 연대기>」, 『연극in』, 2019.11.21.
    https://www.sfac.or.kr/theater/WZ020400/webzine_view.do?wtIdx=11909
  2. <한남의 광시곡> 공연 프로그램 북, 5쪽.
  3. 위의 책,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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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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