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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서의 ‘모던’한 기술 활용법

<The Modern 402>

정준원

제227호

2022.12.08

천재 예술가의 이야기는 많은 공연 제작자들과 관객들에게 흥미로운 소재이고 이야깃거리다. 모차르트, 반 고흐, 아르튀르 랭보 등 수많은 예술가의 삶이 이미 공연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그 사실을 방증한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천재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1890-1950)의 삶 역시 여러 극작가의 흥미를 끄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그는 천재적인 실력으로 ‘발레의 신’이라고 불렸지만, 발레 안무의 관습을 깨는 파격적인 안무를 선보여 당시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29세의 나이에 조현병을 앓기 시작하여 이후 30년간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The Modern 402>는 이러한 니진스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으로, 니진스키의 화려했던 전성기보다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고통받던 그의 어두운 시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를 작‧작곡‧연출했던 서윤미가 작‧작곡‧연출‧미디어아트를 모두 도맡은 이 공연은 2019년 아르코 ‘창작산실 대본공모’에 선정되었고, 2021년에 아르코 ‘예술과기술융합지원’ 부문에 선정되어 기술을 활용한 융복합 공연으로 트라이아웃 무대를 올렸다. 그리고 올해 같은 사업 ‘우수작품 후속지원’에 선정되어 TINC(This Is Not a Church)로 자리를 옮겨 본 공연을 올렸다. 무용은 어떻게 보면 가장 아날로그적인, 기술의 정반대 편에 있는 ‘몸’이라는 매체를 사용한다. 특히나 니진스키는 원초적인 안무로 유명했던 무용수다. 나는 이러한 무용의 감각들과 니진스키의 무의식이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소재가 첨단 기술을 통해서 어떻게 무대화되었을지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를 안고 극장을 찾았다.

<더 모던 402> 공연 사진. 옛 교회 공간의 설교단을 무대로 활용했다. 계단 아래 세 명의 배우가, 단상 위에 세 명의 배우가 있다. 아래쪽 배우 중 한 명은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 왼손을 객석 쪽으로 뻗어 연기하고 있고, 다른 두 배우는 양옆으로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서 있다. 단상 위의 배우들도 각자 거리를 두고 서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단상 위 무대 뒷벽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벽지와 세로로 긴 창문 세 개가 나 있는 배경이 영사되고 있다.

공연이 이루어진 공간 TINC는 옛 명성교회 건물에 위치한 공연장으로, 교회의 실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한쪽에 바닥보다 높은 (아마도 설교가 이루어졌을) 단이 있고, 세로로 긴 창문 몇 개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단상과 그 앞쪽 공간이 공연의 무대로 사용되었고, 단상을 바라보는 (아마도 길쭉한 교회 의자가 줄지어 놓여있었을) 공간에 객석이 놓였다. 무대 뒤쪽의 벽에는 세로로 긴 창문들과 함께 교회풍의 벽과 문이 그대로 보였는데, 그 무대 뒤 벽 전체에 프로젝션 매핑으로 영상이 투사되었다. 극장에 들어갔을 때 바로 보였던 천장의 육중한 프로젝터와 스피커, 바닥에 깔린 전선들, 벽에 투사되고 있는 커다란 화면은 그 자체로 약간의 위압감을 주었다.
공연은 니진스키와 그의 후원자이자 동성 연인이었던 ‘발레 뤼스’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그리고 니진스키의 아내였던 로몰라 드 풀츠키 세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호텔 방 402호에서 처음 마주한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는 이내 가까워지고 연인 관계가 되는데, ‘발레 뤼스’에서 무용수로서 승승장구하던 니진스키가 자신이 직접 창작한 안무를 무대에 올리기를 원하면서 둘의 관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니진스키가 안무한 <목신의 오후>, <봄의 제전> 등은 발레의 관습에서 벗어난 원초적인 움직임을 선보였고, 당시 수많은 사람의 야유와 혹평을 받았다. 니진스키는 자신의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는데, 이러한 관객들의 반응을 디아길레프가 흥행을 위해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결국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순회공연을 떠나던 배 안에서 만난 무용수 로몰라와 결혼하게 되고, 이에 분노한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해고하고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후 니진스키는 조현병을 앓게 되고 무의식 속을 헤매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공연은 일평생 ‘모던(Modern)’을 갈망한 니진스키의 내면의 고뇌, 그리고 그와 함께 삶의 파도를 겪은 디아길레프와 로몰라의 감정들을 시적이고 사색적인 대사들로 세밀하게 그려냈다.

<더 모던 402> 공연 사진. 하얀색 셔츠에 검은 바지와 조끼 정장을 입고 목에 검은색 리본 타이를 멘 남성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뒤쪽에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이 남성을 바라보고 있으며, 단상 위에는 세 무용수가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다. 무대는 푸른 어둠에 잠겨 있다.

공연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건 역시 벽면에 프로젝션 매핑으로 펼쳐지는 영상이었다. 영상은 호텔 방, 바다(배) 위, 정신병원 등 극 중 인물들이 실제 위치한 공간 배경을 보여주기도 하고, 추상적인 미디어아트를 통해 인물들의 무의식/상상 속 세계를 표현하기도 했다. 무대 뒤에 정교하게 씌워진 영상은 극 중 공간의 변화와 인물들의 정서를 형상화하는 역할을 했고, 극 중 공간을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극장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바꿔놓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영상이 극장을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효과를 갖지는 못했다. 무대의 뒤편 혹은 공연이 이루어지는 실제 극장 공간을 지우고 그 자리를 영상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화면으로 덮을 수 있었다면, 프로젝션 매핑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TINC는 교회의 내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공간이었다. 공연에서 울퉁불퉁한 벽면 구조를 잘 활용하여 영상을 투사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스크린이나 평평한 벽면보다는 영상이 매끄럽게 투사되지 않다 보니 영상 너머로 자꾸 실제 공연장의 벽면이 슬쩍슬쩍 보였다. 어떤 순간들에는 벽면 쪽을 향하는 조명의 빛으로 인해 영상이 살짝 지워지고, 벽면이 그대로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관객으로서는 극 중 공간에서 빠져나와 이 실제 극장 공간을 자꾸 상기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벌어지는 영상과 공간 사이의 줄다리기로 인해, 무대 뒤쪽에 펼쳐진 영상은 극장 전체를 극 속의 공간으로 끌고 간다기보다 잘 만들어진 배경 정도의 기능만을 수행했다.

<더 모던 402> 공연 사진. 무대 뒷벽 전체에 영문 손글씨가 빼곡한 이미지가 영사되고 있다.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된 글씨이며, 그 빛을 받아 단상 위에 놓인 의자 세 개가 보인다. 단상 아래에는 한 배우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고, 다른 배우들은 뚜렷하지 않은 실루엣으로 존재하며, 마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공연에서 중요하게 보였던 부분은 ‘Afterimage(잔상)’ 역을 맡은 세 명의 무용수였다.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무용수는 무대를 떠나지 않은 채 일종의 코러스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기술의 정반대 편에 있는 ‘몸’을 통해) 니진스키의 무용 동작들을 직접 구현하기도 하고, 무대의 인물들 주변에서 춤을 추며 인물들의 내면 혹은 인물 간의 갈등을 형상화하기도 하며, 인물들이 말할 때 무대 옆과 뒤의 의자에 앉아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관객의 시선에서 보이는 극 중 인물들의 잔상이기도 했고, 니진스키의 무의식 속에 남은 기억들의 잔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잔상’들이 무대 위에 계속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공연의 전개에 아주 긴밀하게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공연은 대개 인물들의 긴 대사를 통해 진행되었는데, 잔상들은 그 옆이나 뒤에서 추상적인 몸짓을 더하는 정도의 기능을 했을 뿐 인물들과 직접 상호작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퇴장하지 않고 무대 위에 계속 있다 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꽤 길었는데, 이들의 존재가 무대 위에 어떤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관객처럼 느껴지는 일이 더 잦았다. 결론적으로 잔상들은 극의 전개와 공연 연출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 인물들의 대사 사이를 꾸며주고 공간을 채워주는 장식 혹은 배경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쳤다.

<더 모던 402> 공연 사진. 중앙에 하얀색 블라우스와 푸른색 바지 정장을 입은 단발머리 여성이 서 있고, 그 주변으로 세 명의 무용수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팔을 뻗은 모습이 보인다.

공연은 니진스키의 삶과 그가 무의식 안에서 겪었던 고뇌와 고통을 방대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대사들로 그려냈다. 다만 공연이 그 언어들을, 니진스키의 무의식 속 고뇌를 언어를 넘어서는 감각으로 무대화하는 데에 성공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니진스키는 관습과 틀을 깨는 무용수였고, 공연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생의 마지막까지 ‘모던’을 추구하고 갈망”(공연 보도자료 발췌)했던 예술가였다. 니진스키가 추구한 ‘모던’이 이 공연과 가까웠을까? 공연의 야심 찬 연출적 시도들이 나에게는 온전히 와닿지 못한 채 배우들의 배경으로 남았고, 그로 인해 배우들의 열연과 유려한 대사들이 공연과 공간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극장을 나와서 검색을 하다가 본 공연 보도자료에는 “기술의 ‘차용’보다는 작품의 세계관과 형식의 구현을 위한 필연적 ‘활용’을 지향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혹시, ‘활용’ 이상의 것이 되어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사진 제공: 더모던402 기획팀]

<The Modern 402>
  • 일자 2022.11.17 ~ 11.20
  • 장소 TINC(This is not a church)
  • 작·작곡·연출·미디어아트 서윤미 출연 서영주, 전재홍, 임강희, 김민, 박세진, 김건우 안무 정재혁 음악감독·사운드아트 이진욱 영상기술구현 ㈜알마로꼬 영상감독 임효상 조명디자인 김영빈 음향디자인 권지휘 무대디자인 김소연 의상디자인 홍보라 분장디자인 김민경 무대기술감독 이재은 조연출 오유민 조안무 정혜지 무대조감독 김형배, 김진경 컴퍼니매니저 이가영 공연운영매니저 권소희 홍보 영희컴퍼니
  • 관련정보 https://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2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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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원

정준원
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했고, 여전히 연극 주변을 맴돌고 있다. junwon1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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