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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라는 이름의 자리를 찾아서

무브먼트 당당 온라인 당당극장 <20년 후>

손옥주

제228호

2022.12.22

招魂

올해 6월, ‘무브먼트 당당’(이하 ‘당당’)의 작품기록집이 출간되었다. ‘플레이&댄스그룹 당당’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단체가 처음으로 출간한 기록집이었다. 그곳에 실린 김민정 연출가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당당’의 계획 내지는 소망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 보고자 했던 얼굴들, 그들이 선 자리로 몸을 돌리려 한다. 가지
않는 불모의 땅에 새로운 극장을 열고 그곳에 당신의 자리를 마련하려 한다.

- 무브먼트 당당, 『무브먼트 당당: 머물지 않는 사람들』, 프로젝트 궁리, 2022, 5쪽.

돌이켜보건대 ‘당당’이 발표해온 그간의 작업, 특히 ‘플레이&댄스’에서 ‘무브먼트’로 단체의 수식을 확장한 2007년 이후의 작업은 대개 터럭 하나 뿌리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메마른 땅에서 불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타자화된 과거의 산물인 고려인의 강제 이주사를, 때로는 오랜 기간 금기시되어온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때로는 투쟁하고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시, 선언문, 인터뷰 텍스트 등의 형식에 담아 무대 위로 불러오곤 했다. 그러나 작품의 출발점이 서로 상이한 만큼 서사의 전개 방식 또한 서로 상이하기에, 그동안 ‘당당’이 발표해온 작품들에 대해 특정한 인물, 특정한 삶, 특정한 사상, 특정한 사건에 대한 오마주라고 통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이들의 시도는 엄연히 말해 ‘주변’이라는 명명조차 획득할 수 없었던, 기억된 적 없기에 망각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어떤 존재들과 그들이 살아온 시간에 대한 초혼 의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맥락 속에 잠복해있던 혼들을 오늘의 무대 위에 집대성하려는 시도는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미장센을 매개로 삼아, 때로는 두 주먹 불끈 쥔 투쟁의 목소리를 매개로 삼아, 때로는 B급 정서로 가득 찬 울분의 순간들을 매개로 삼아 이루어졌다.

온라인 당당극장 <20년 후>의 사진이다. 자갈과 흙이 많은 냇가에 10명의 퍼포머들이 축 처진 몸짓으로 각자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이들은 위아래 흰색 속옷 차림으로, 머리에는 꼭 맞는 살구색의 수영모 같은 것을 쓰고 있다. 대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눕거나 쪼그려 앉거나 서 있는 등 그 모양은 다양하다. 자갈밭의 뒤편에는 샛강 같은 것이 보이고, 물 건너편에는 우거진 숲이 있다.

그렇다면 ‘당당’의 창작자들이 시도한 초혼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완전한 외부로 봉인되어온 존재들이 되어보기 위함일까.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세계 속에 그들을 복권해내기 위함일까. 아마도 이 같은 이유 또한 ‘당당’의 창작 시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발 물러나 시야를 확대해보면, (앞서 언급한 연출가의 말이 암시하듯) ‘당당’의 작업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초혼 의식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외 없이 ‘새로운 극장 만들기’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새로운 극장’이란 타자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근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와 같은 타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교감 안에서 창작자들 간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점에서 ‘당당’만이 구현해내는 독특한 공연형식의 기원이 되어준다. 따라서 ‘당당’의 작업은 완전히 타자로 존재하는 상태들, 그리고 그 상태에 대한 예민한 인식과 포용을 배제하고는 설명되기가 어렵다. 이들에게 있어 무대는 다름에 대한 긍정을 실현하는 장소인 한에서 배우에게 움직임을 허락하는, 일종의 제의적 공간과도 같다.

타자인식공명망

그런 ‘당당’이 최근 또 하나의 새로운 극장을 열었다. ‘온라인 당당극장’이라고 명명된 이 극장이 자리한 곳은 명칭 그대로 온라인이며, 그곳에서 발표된 작품의 제목은 다름 아닌 <20년 후>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 2021년에 처음으로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영상연극을 선보인 이들은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온라인미디어 예술활동 지원을 받아 상시 관람이 가능한 방식의 온라인 연극을 제작, 발표하게 되었다. 작품 소개에 따르면 관객은 “인간의 정의가 달라진 가상세계에서 폐허가 된 채 버려진 ZONE9991을 발견한 최후의 인간 N이 남긴 보고서와 영상, 이미지, 사운드 기록물들을 저장한 거점”으로 지정된 온라인 극장을 방문해 “그 자료들을 통해 가상세계를 상상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조직”(출처: 문예위 온라인미디어 예술활동 홈페이지)하게 된다고 한다. 이 같은 SF 서사적 특징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온라인 당당극장’을 방문하는 관객은 공연 관람에 앞서 각자에게 중요했던 연도, 떠오르는 이름의 알파벳 이니셜, 자신이 태어난 날짜 등을 조합한 코드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극장에 입장하게 된다.

온라인 당당극장 <20년 후>의 입장 화면이다. 검은 배경에 회색의 물결 또는 머리카락 같은 무늬가 나 있는 배경에 입장 안내문구가 적혀있다. 상단부터 “온라인 당당극장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공연 관람에 앞서 본인의 코드를 생성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와 [나만의 코드 만드는 방법]이 적혀져 있고, 그 하단에 코드를 입력하는 입력창과 입장하기 버튼이 마련되어 있다.
온라인 당당극장 <20년 후> 화면 캡처

관객이 저마다 과거의 특정 시점과 타자의 이름, 그리고 자신의 탄생일로 구성된 하나의 임의적인 복합체(Kompositum)로 스스로를 정체화한다는 것은 입장 직후에 마주하게 되는 초대의 글귀, 즉 “고립되고 개별화된 우리의 타자 인식 체계를 느슨하지만 단단한, 거대한 하나로 얽히게 하려는 흐름에 당신을 초대”하고자 한다는 ‘당당’의 창작 의지와 긴밀히 연동된다. 타자-되기가 불러올 수 있는 낭만적인 관념 상태에 함몰됨 없이, 그저 서로 다른 어체(語體)가 모여 이루는 일종의 합성어처럼 내가 아닌 누군가의 어떠한 상태를 인식하고 그처럼 친숙한 듯 낯선 상태와 교감의 망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당당’이 이번 작업에서 ‘타자인식공명망’이라고 명명한 세계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공명하는 네트워크 안에서 ‘우주 하위주체 동맹’이라는 이름의 느슨한 이어짐을 입게 된 관객 개개인은 배제된 채로 폐기되거나 순종적인 까닭에 절멸해버린 또 다른 하위주체들의 발화되지 못한 말들을 찾아 나선다.

이번 <20년 후>에서 관객이 접하게 되는 자료들은 최후의 인간 N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된다. ‘온라인 당당극장’에 따르면 그는 ‘우주 하위주체 동맹’이 일으킨 3차 혁명 당시에 ZONE9991에 접근해 (아마도 그곳에서 발생한 특정 사건에 관한 아카이브일지도 모를) SECTOR 909EK와 SECTOR 912EK에 잠입한 후, 그곳에 보관되어있던 자료들을 필사적으로 모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극장에 접속한 관객은 크게 첫 번째 섹터의 자료들로 구성된 파트 1과 두 번째 섹터의 자료들로 구성된 파트 2, 마지막으로 ZONE9991에서도 오작동을 이유로 폐기될 수밖에 없었던 Pro-A.H 10인의 인터뷰로 구성된 파트 3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각 파트는 크게 강이나 해안, 숲 등지에서 촬영된 단체 영상과 이미지컷, 그리고 화이트큐브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개별 인터뷰 영상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영상 시간은 주제와 패턴에 따라 20~30여 초부터 6~7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배분되어있다. 이번 작품은 파트 3의 인터뷰 영상만 해도 자그마치 10편에 이를 만큼 다수의 시청각 자료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는데, 이처럼 일견 다소 산만한 듯한 구성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유기적이지만 통일적이지는 않은 맥락을 구축해낸다는 점에서 그동안 ‘당당’이 시도해온 무대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20년 후>의 중심인물로 설정된 N에게는 접근 불가능한 폐쇄구역인 ZONE9991에 다다르자 입이 사라지고 신체 부분들이 녹아버리는 자기 궤멸을 겪게 되었다는 서사가 부여되었다. 어쩌면 ‘당당’의 시도는 언제나 이처럼 궤멸되는 것들을 향해 있으므로 결코 일사불란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궤멸되는 것에 대한 재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당당극장 <20년 후>의 사진이다. Zone9991 Sector912ek에 남은 일종의 기록이다. 사람 덩치만 한 검은 돌들이 쌓여 있어 방파제로 추측되는 공간 가운데에 금색 비닐 재질의 사람 형태가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다. 팔과 다리는 기괴하게 꺾여있고, 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돌더미의 뒤편에는 콘크리트로 다져진 편편한 공간이 있고, 그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철골 구조물들이 보인다.

또 하나의 새로운 극장을 열며

‘당당’은 활동 2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20년 후>라는 제목의 온라인 공연을 발표하며 지난 20년간 폐쇄되어온 한 행성의 모습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어쩌면 그 행성은 이들이 지난 시간 동안 극장에서, 안산의 길 위에서, 여의도의 집회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경험해온 것들의 집약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이 그간 발표해온 작품 제목처럼 <인생>이자 <불행>이며 <울분>인 것인지도 모른다. 20년 전에도, 어쩌면 20년 후에도 다르지 않을 이 같은 행성의 모습을 마주하며 오늘, 여기에서 ‘당당’의 창작자들은 목숨 걸고 행성에 진입함으로써 자기 궤멸에 이르게 되는, 그렇게 타자에 대한 인식 안에서 공명을 실천하는 “최후의 윤리적 인간”(출처: 온라인 당당극장 <20년 후> 보고 개요 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입이 사라지고 신체 부분들이 하나둘씩 녹아내려도 지치지 않고 기꺼이 지금의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그리하여 타자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는, 그리하여 공명의 힘을 근원 삼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존재들이 만나 이루는 한없이 느슨한 합산. 관계에 대한 상상의 뿌리를 어딘가에 내리기조차 힘든 오늘, ‘당당’이 지어가는 또 하나의 새로운 극장은 그와 같은 최후의 상상 속에서 비로소 관객을 향해 문을 연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손님과도 같은 상태, 그토록 모호한 그 자리야말로 여전히 무브먼트 당당이 위치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자리는 뭔가를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라 휘둘리지 않으려는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 무브먼트 당당, 『무브먼트 당당: 머물지 않는 사람들』, 프로젝트 궁리, 2022, 31쪽.

온라인 당당극장 <20년후>의 사진이다. 풀이 울창하여 사진이 온통 초록색인 가운데에, 검은 잠수복과 오리발, 잠수용 안경을 쓴 한 생명체가 풀숲 사이에 서 있다.

[사진 제공: 무브먼트 당당]

무브먼트 당당 온라인 당당극장 <20년 후>
  • 출연 김현아, 방현혜, 한은주, 권택기, 최진한, 정유미, 최정현, 이도경, 마광현, 서재영, 이신실, 원채리, 임지윤, 이도, 해밀, 에티앤 드 라 싸이애뜨 목소리 김현아 제작 컨셉 김민정 감독 김민정 공동제작 최영민, 박재우 제공/제작 무브먼트 당당 프로젝트 개발 최홍준 연출부 서재영, 원채리 텍스트 김민정 회화 임지윤 음악 타코토키 비주얼 크리에이터 이도경 촬영 감독 최영민 웹사이트 제작 총괄 박재우 비주얼 제작 크리에이티브 랙탱글 웹디자인/퍼블리시 인아웃커뮤니케이션 그래픽디자인 고엘 카메라B 이종열 카메라C 박민섭 드론촬영 박민섭 사진 최영민, 박민섭, 김민정 동시녹음 용민네 행정지원 이도원 번역 권유정 장소섭외 권택기, 정유미, 학스 장소협찬 봉봉네, 쉘악터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관련정보 http://dangdangtheater.com/20yearsl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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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옥주

손옥주 공연학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극학, 무용학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무용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포스트닥터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현재 학술 연구와 동시에 리서치 파트너와 드라마터그로 공연 현장에서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춤의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은 서로 맞닿아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춤을 닮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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