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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개진 팔뚝들, 그리고 괴물의 빈자리

창작집단 푸른수염 <유디트의 팔뚝>

이지현

제228호

2022.12.22

페미니스트 텍스트는 오해의 소지 없이 명백한 용어로 이슈를 설명하지만, 아르테미시아(혹은 다른 어떤 화가)의 그림은 이중적 의미로 읽힐 수 있다. […] 유디트나 막달라 마리아는 종종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고정된 유형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인물들인데 아르테미시아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물을 빚어내자 그 변화하는 유형 속에서 깊이와 복합성을 얻었다.
- 메리 D. 개러드, 『여기, 아르테미시아』 중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그림이다. 두 여성이 한 남성을 제압하여 그의 목을 칼로 자르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왼쪽의 붉은 원피스를 입고 머리 장식을 올린 여성은 두 손으로 남자의 팔을 가슴팍에 모아 온몸으로 그를 누르고 있으며, 남성의 오른팔은 붉은 옷을 입은 여성의 멱살을 잡고 있다. 오른편의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은 왼손으로 누운 남성의 머리채를 잡고 오른손으로 칼을 잡아 그의 목에 대고 있다. 칼과 남성의 머리 주변으로 붉은 피가 하얀 침대보를 적신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12~1613)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 ~ 1656?)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12~13, 이하 ‘<유디트>’)에서 신화 속 인물 유디트가 자신의 하녀와 함께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순간을 그려내면서 강인하고 격정적인 여성을 묘사하였다. 이 작품을 통해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을 성폭행했던 미술 선생 타아시에 대한 복수를 담아냈다고 전해진다.

팔뚝들로 써 내려가는 여성 서사

연극 <유디트의 팔뚝>은 이 그림에 대한 해석과 상상을 중심으로 동시대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극 중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인물은 대학교 1학년생인 정원이다. 정원은 대학의 전공필수 과목인 서양미술사 수업에서 아르테미스의 <유디트>에 관한 과제 발표를 맡는다. 정원의 나이는 아르테미스가 <유디트>를 그렸던 시기와 동일하게 스무 살 무렵으로 설정되어 있다. 17세기와 21세기 사이 400년의 세월을 건너, 정원은 작품에 대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아르테미스가 살았던 시대를 자유롭게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든다. 정원이 써 내려가는 <유디트> 이야기 속에는 아르테미스와 사랑하는 사이로 설정된 하녀 로미가 등장한다. 로미 역할은, 정원이 10대 시절 교사에게 추행을 당할 뻔했던 순간에 그녀를 구해주었던 (현재는 죽은 것으로 암시되는) 친구 지수 역의 배우가 1인 2역으로 연기한다.
정원은 자신의 과거 기억과 아르테미스의 과거를 연관 지어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극 중 흥미로운 설정은 정원의 오른 팔뚝과 왼 팔뚝이 각각 두 명의 남성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인데, 이들은 정원이 전형적인 서사에서 빗겨나가는 작법을 선택할 때마다 정원을 제지한다. 이를테면 타아시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진술이 진실함을 입증하기 위해 재판정에서 고문을 견뎌야 했던 아르테미스의 고통을, 그러니까 피해자의 고통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선택이다. 정원은 이들의 방해(?)를 끝내 물리치고 뻔하지 않은 서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유디트의 팔뚝> 공연사진. 회색 트레이닝 셔츠에 초록색 풀치마를 입은 긴 생머리의 여성이 가운데 앉아 노트북을 들고 화면을 응시한다. 그의 앞에는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둥그런 목재 팔레트가 놓여있고, 그의 좌우에는 각색의 트레이닝복을 입은 네 여성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미소를 띄고 가운데의 여성을 바라본다. 그들의 뒤로 보이는 벽면에는 30도 정도 기울게 붙어있는 흰 화이트보드가 보이고, 보드의 앞에 두 단의 스툴이 놓여져있다.

17세기 아르테미스의 <유디트> 속 유디트와 하녀의 굵은 팔뚝, 그리고 거침없이 칼을 빼든 손동작은, 당시 화가들이 여성을 묘사했던 전형적인 모습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다. 정원이 자신의 팔뚝을 제어하며 써 내려간 이야기 속 아르테미스와 로미 역시 마찬가지로 강인하고 굳건하게 자신들의 사랑을 지켜나간다. 실제로 아르테미시아는 재판과 결혼 이후 자신의 성을 젠틸레스키에서 로미(Lomi)로 변화시켜 ‘아르테미시아 로미’로 표기했는데, 극 중에서는 이를 하녀 로미와 사랑의 징표를 남긴 것으로 상상한 것이다.
이러한 상상 속에는, 과거 정원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지수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정원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주었던 지수의 굵은 팔뚝이 주는 존재감은 <유디트>에 대한 해석에서도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정원은 스스로를 아르테미스 혹은 유디트에, 지수를 로미에 대응시켜 영웅적 여성 서사 속 인물로서 살아나게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정원의 곁에는 이불 속에 숨어 사는 룸메이트 원정이 함께 있다. 발표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들은 무대 한편에서 거친 붓 터치로 원작보다 더 굵고 강렬한 검은 팔뚝을 그려내며 추상적인 그림을 완성한다.

<유디트의 팔뚝> 공연사진. 푸른 조명 아래에 핸드볼 공을 든 한 배우가 서 있다. 그는 회색과 파란색이 섞인 바람막이를 입었으며, 짧은 머리에 흰색 스포츠밴드를 하고 있다.

모호함과 가능성 사이에서

정원이 퍼포먼스 형식으로 발표한 <유디트> 과제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료를 조사하지 않고 ‘쇼를 했다’는 이유로 남성 교수의 비판에 직면하고, 이에 굴복하지 않은 정원과 원정은 끝내 F를 받는다. 정원의 상상력을 옹호하던 박사과정 남성 조교 역시 이 교수에게 소설을 쓸 거면 학문을 그만두라는 비난을 받는다. 이때 조교는 자신이 정원의 편임을 강조하면서, 교수에게 당신은 “이야기 세계에 속한 사람”의 마음을 평생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연극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조교가 말한 내용, 즉 사실 속에 가려졌던 이야기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여성 서사의 가능성을 다채롭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었을까? 우선 <유디트의 팔뚝>은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 있다. 신화 속 여성과 17세기 여성, 그리고 21세기 여성 인물의 존재가 서로 포개어진다. 그리고 이들의 굵은 팔뚝들이 힘을 합쳐, 이불 속에 숨어 지내는 원정을 두렵게 만들던 남성 괴물을 물리친다. 그러나 각각의 시대와 상황에 처한 여성 인물들이 유사한 하나의 서사를 공유하며 진행되는 이야기 구조는, 의미의 층위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는 반면 극 전체를 단조롭게 만들 위험도 공존한다.

<유디트의 팔뚝> 공연사진. 푸른 조명 아래에 두 사람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여성은 두툼한 소재의 추리닝에 풀치마를 입었고, 머리에는 띠를 묶고 있다. 그는 왼손을 옆으로 뻗고, 오른손으로는 남성의 목을 조르고 있다. 목이 졸린 남성은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양손으로 여성의 손을 부여잡고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여성을 노려본다.

이 연극에서 마주 보는 객석을 사이에 두고 일자로 길게 펼쳐지는 무대는 양옆으로 시야를 넓게 활용한다. 무대는 배구 코트도 되었다가, 대학 강의실도 되었다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목숨을 건 게임이 생중계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객석에 앉아 있다 등장하는 배우들 또한 역할의 변화에 따라 의상과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등퇴장을 이어간다. 이러한 스펙터클의 다양성과 대비되게, ‘사랑하는 두 명의 여성이 합심하여 괴물과 같은 남성을 무찌른다’는 주요 서사는 90분 내내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정원을 중심으로 시대와 인물의 변화와 중첩을 통해 계속해서 의미를 쌓아감에도 불구하고, 이 중심 서사 이상의 새로움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추가적으로 의상과 소품의 다채롭고 신선한 활용에 비해 음향의 밋밋함 또한 극의 밸런스를 방해하는 요소였다. 예를 들어 배우가 화려한 조명 속에서 마이크를 들고 BGM을 튼 채 재즈를 부르는데 실제로는 마이크 효과가 작동되지 않는 등.)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작품에서 강조하는 여성 서사를 단조롭게 느꼈던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시점에서 원정이 처한 어려움의 실체가 너무 어렴풋하게 그려진 데에 있었다. ‘입 냄새 괴물’로 상징되는 어떤 공포스럽고 두려운 존재를 관객으로 하여금 짐작으로만 파악하도록 설정한 것은 왜일까? 추측하건대 이 괴물은 아마도 관객 개개인이 겪어온 삶의 경험 속 남성적 권위 혹은 그로 인한 폭력적 경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관객이 괴물의 상징을 각자의 몫으로 추측하기에는 (만약 그것을 의도했다면) 이전의 레이어들에서 그 괴물의 자리를 강간범 타아시와 추행을 시도하는 교사라는 인물이 채우고 있기 때문에, 관객이 그 이상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모호함 속에서 상상의 여지를 두는 것보다, 정원의 상상적 해석에 대응되는 현실을 구체적인 사건이나 원정과의 관계를 통해 연결시키는 방법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이야기 세계의 여백이 주는 모호함과 가능성 사이에서,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유디트의 팔뚝> 공연사진. 붉은 조명이 비추는 아래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가죽자켓을 입은 입냄새 괴물이 몸을 틀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사진 제공: 창작집단 푸른수염, 촬영: 이승주]

창작집단 푸른수염 <유디트의 팔뚝>
  • 일자 2022.12.9 ~ 12.18
  •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 작·연출 안정민 출연 박서현, 오현종, 윤희민, 장호인, 정고운, 정선경, 정윤진, 허상진, 황혜원 조연출 박서현, 정윤진 무대·조명·영상 송지인, 윤혜린, 송주형 음악감독 김현수 음향감독 이재 무대감독 이뮥수 의상·분장 움직이는 숲 기획 김재웅 포스터디자인 박서현, 전화인 조명·영상·음향 오퍼레이터 오혜민, 안소정, 김혜원 티켓 매니저 이예진, 성민경 제작 창작진단 푸른수염 후원 서울문화재단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5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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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이지현
연극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 illa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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