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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에 준비하는 이별의 시간

<세컨드 찬스>

장윤정

제228호

2022.12.22

영화 <어바웃 타임>은 여러 가지 화두를 남겼다. 혹자는 저렇게 여러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지면 누가 못 살겠느냐는 말을 했고, 혹자는 여러 번의 삶 중에서도 소중한 삶은 단 한 번뿐이라는 점을 발견한다고 했다. 영화에서 아들은 아버지와의 이별 앞에서 한정된 시간을 타임슬립으로 되돌리는 비범함을 발휘하지만, 현재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스스로 그 능력을 봉인한다. 관객은 훈훈함을 느끼는 동시에 어쨌든 나와는 거리가 먼 특별한 케이스로 여겼다. 타임슬립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연극 <세컨드 찬스>는 사랑하는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영화 <어바웃 타임>과는 결이 다르다. 현실이라는 땅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서 있다. 이 공연엔 모든 것을 해결해줄 타임슬립 같은 마법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한 가정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각자 삶에서의 두 번째 기회를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에 동화되면서 무대 위의 일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게 된다. 먹먹함으로 눈물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입은 웃게 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 극장을 나서는 길엔 두 번째 기회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분명, <세컨드 찬스>는 선물 같은 작품이었다.

<세컨드 찬스>의 공연 사진. 검은 상의를 입고 목에는 검은 바탕에 하얀 땡땡이 스카프를 두른 윤혜숙이 레코드판이 그려진 종이를 손에 들고 서 있다. 그의 앞에는 허리 높이에 작은 목재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위엔 작은 우주인 인형, 모래시계, 노트북과 작은 사진들이 놓여 있다.

“KEY TO THE MOON”, 유한한 관계 속에서의 두 번째 기회

극장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윤혜숙 연출이 직접 글을 쓰고 연출을 하며 무려 무대에서 연기를 ‘홀로’ 진행한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윤혜숙 연출이 몸담은 극단 래빗홀씨어터는 <우리는 이 도시에 도착했다>(2018), <마른 대지>(2018), <보팔, BHOPAL(1984~)>(2019), <춤의 국가>(2020), <당신을 초대합니다>(2021), <편입생>(2022), <정희정>(2022) 등 소수자의 위치에 속한 이들을 주목하고 사회 속 다양한 층위의 문제들을 톺아보면서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조명해왔다.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들이었지만 때때로 그 속에서 특유의 위트가 빛을 발하기도 했다. 그런 작품을 만들어낸 연출가가 과연 무대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괜히 애정에서 비롯된 쓸데없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정말로 쓸데가 없었다. 극단 래빗홀씨어터의 정체성과 연출 윤혜숙의 능력과 인간 윤혜숙의 매력 및 위트가 완벽할 정도로 잘 어우러져서 그 모든 부분을 집대성한 결과가 바로 <세컨드 찬스>였기 때문이다.
<세컨드 찬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준비할 ‘두 번째 기회’를 의미한다. 윤혜숙 연출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아빠를 주목하고 들려주며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공연은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포노그래프는 녹음기이자 재생기로서, 과거의 것들을 영원히 담아내고 다시 만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이 지점은 다시 1977년 보이저호에 실린 골든 레코드로 이어진다. 골든레코드는 이미지를 비롯한 여러 정보를 주파수로 저장하여 외계로 띄워 보낸 레코드판이다. 이 부분에 착안하여 극 중에서 윤혜숙은 우주장(宇宙葬)을 원하는 아빠를 위해 포노그래프를 활용한 특별한 골든레코드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세컨드 찬스>는 전반적으로 아빠 ‘윤기문’을 위한 골든레코드를 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아빠는 병원에서 암을 진단받게 되고, 딸인 윤혜숙은 그제야 부모님의 삶이 유한할 수도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Key to the Moon” 골든레코드를 만들어간다. 가족들의 작별 인사를 담기도 하고, 미리 장례식을 치러보며 이별 연습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는 것은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이다. 이내 윤혜숙은 떠나는 사람뿐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닫고 레코드에 담을 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아빠를 탐색해간다. 아빠가 사는 집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자주 가는 맛집을 찾아가 보며 아빠와 사진도 찍고, 아빠의 유소년기 시절을 더듬어도 보고, 아빠가 원하는 죽음의 과정을 듣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주파수로 변환되어 레코드에 입력되고, 아빠 윤기문의 우주장에 함께 실어 보낼 골든레코드 “Key to the Moon”이 완성되면 공연은 막을 내린다.
<세컨드 찬스>는 결국, 이별 연습을 하는 과정이다. 극 중에서 윤혜숙은 영화 <화양연화>와 영화 <노매드랜드>를 통해 미리 이별 연습을 할 정도로 사랑하는 존재를 떠올린다. 그 대상은 여지없이 아빠였고, “무한한 우주와 유한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세컨드 찬스>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한 아빠 덕에 아빠와의 삶을 다시 시작할 두 번째 기회가 생겼고, 그것은 동시에 이별을 연습할 두 번째 기회가 되었다.
삶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미리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예견하며 이별을 대비해보지만, 아무리 성실히 연습하더라도 결국 이별을 직면하는 순간에는 늘 아플 수밖에 없다. <세컨드 찬스>는 이별에 아프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는 공연이 아니다. 단지, 유한한 관계 속에서 조금이나마 덜 후회하기 위한 기회를 한 번 더 선사하는 작품이다. 극 중 아빠 윤기문의 노트에는 “현재는 곧 과거가 된다. 그래서 현재를 바꾸면 과거가 바뀐다. 현재를 바꾸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중략) 후회 없이 살자꾸나.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이 문장들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현재가 더없이 소중한 순간임을 자각하고, 그 대상과 함께 지금을 충실히 보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은 일련의 과정을 바탕으로, 아빠든 엄마든 딸이든 아들이든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이별 앞에서 후회를 덜기 위해, 돌아오지 않을 현재의 순간들을 위한 ‘세컨드 찬스’를 사유하게끔 했다.

<세컨드 찬스>의 공연 사진. 검은 의상의 윤혜숙이 찬송가 책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서글픈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머리에 장례 베일을 착용하였다. 윤혜숙의 뒤편으로 은색의 굵은 환기구 배관과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119 구급차 미니어처도 보인다.

순환하는 존재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원리

<세컨드 찬스>에서는 순환하는 삶에 대해서도 발견하게 된다. 아빠는 본인의 목소리로 시작해서, 윤혜숙의 입을 빌려 이야기로, 이후 포노그래프를 활용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영상에서 아빠가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데, 말미에 이르러서는 윤혜숙이 곧 아빠의 자리에 위치한다. 아빠의 옷을 입고서 아빠의 자리에 앉아, 그에 동화되어 삶과 심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이해하는 과정이다. 동시에 윤혜숙 또한 아빠의 자리에서 자신의 자손과 이별의 순간이 오게 될 것을 은유했다. 극 중에서 윤혜숙의 딸 소을이 종종 등장하는데, 아빠 윤기문이 남긴 “빈손으로 와서 너희들은 건졌다”는 글귀는 빈손으로 와서 딸을 건진 윤혜숙에게로 이어진다. 아빠 윤기문과 딸 윤혜숙의 관계는 엄마 윤혜숙과 딸 소을의 관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빠의 차림새로 아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윤혜숙의 모습은 곧, 떠나는 아빠와 남겨질 딸의 관계에서 떠나갈 엄마와 남겨질 딸의 관계로 치환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삶의 순환을 사유하게 된다. 극의 마지막에서 아빠 윤기문은 손녀에게 지구에서의 탄생과 우주로의 떠남에 관한 인사말을 남기는데, 생의 순환이 곧 우주의 원리와 맥이 닿아 있음을 가늠하게끔 한다.
<세컨드 찬스>는 생과 사의 순환에 관한 상징을 곳곳에 배치하였다. 아빠 윤기문이 첫째 딸의 태어난 곳에 대해 알길 원하는 것과 죽음을 곧 고향 찾아 달로 가는 것이라 표현한 점, 청소년기에 목격한 친구의 마지막 순간과 그의 아버지의 슬픔, 그리고 자신과 자식들의 이별 앞에서 느껴지는 슬픔, 떨어진 낙엽들이 제각각 다른 존재로 소생하는 과정을 담은 시 등을 통해서 생사의 순환에 대해 내밀하게 전달한다. <세컨드 찬스>에서 죽음은 우주로 확장되며, 생사의 순환은 우주의 원리로 나아간다. 아빠 윤기문의 이름에서 ‘문’은 영어 ‘moon’으로 해석되고, 결국 달에서 태어나 달로 가는 것이 윤기문의 생사 원리가 된다. 작품은 한발 더 나아가 ‘moon’은 한국어로 ‘문’이고 거꾸로 하면 ‘곰’이어서 ‘큰곰자리’, ‘북두칠성’까지 연상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우주장이 등장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거대한 우주는 다시 조그마한 문 너머로 응축되는데, 윤혜숙의 어린 시절 닫힌 방문 너머 아빠의 공간은 아빠의 우주였다. 오늘날 닫힌 현관문 너머의 집은 아빠의 모든 것이 담긴 우주가 된다. 한 사람의 생의 모든 것이 축적된 공간이 곧 우주로 상징되는 것이다. 아빠 윤기문의 집 현관문에 조그마한 ‘달’ 조형물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다. 현관‘문’이자 윤기‘문’의 공간이면서, 한 사람의 모든 것이 담긴 우주인 동시에 ‘고향’인 ‘달’인 것이다.
순환의 구조는 가수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등장하는 표범과 죽음을 맞기 위한 마지막 순례길을 오르는 기문으로 이어진다. 마치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설산을 오르며 유한한 시간 앞에서 이별의 슬픔이 가늠될 수 없어, 차라리 함께 있지 않길 기원하는 아빠의 담담한 마지막 말은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커튼콜에 이르러 무대 벽면에는 아빠 윤기문의 시 「흩어진 낙엽」이 영사된다. 화려한 단풍의 생을 거치고 낙엽이 되어 제각각 흩어지면서,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을 담고 있다. 때로는 온전한 모양새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다른 생명체의 삶을 조력하면서 그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낙엽의 존재성은 확장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컨드 찬스>는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는 생사의 순환에 대해서 발견하게끔 한다. 죽음은 이별인 동시에 순환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윤혜숙은 공연 내내 관찰자의 태도를 유지하며 유쾌한 분위기를 형성해가는데, 그것이 역설적으로 슬픔을 배가시키곤 했다. 동시에 작품은 죽음을 우주의 순환 원리의 과정으로 접근하게 하면서 죽음과 이별을 숙연함과 담담함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들었다. 관객이 마음껏 울지도 웃지도 못했던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세컨드 찬스>의 공연 사진. 검은 상의와 바지, 구두를 신은 윤혜숙이 의자에 앉아 허공을 응시한다. 그의 앞에는 목재 테이블이 놓여져 있고, 목재 테이블 옆의 스툴에는 LP플레이어가 있다. 커다란 환기구 배관은 엎어진 디귿 모양으로 윤혜숙의 등 뒤에 위치하고, 사진 가장 왼쪽 끄트머리에는 환기구의 끝이 보인다. 무대 뒤편 화면에는 달이 영사되고 있으며, ‘저 넓고 깊은 우주를 향해 나아갔다’는 음성해설 자막이 보인다.

감각적인 연출로써 풍성한 작품

그야말로 반칙이 난무하는 공연이다. 연출가가 연기도 잘하는데 노래까지 잘하고, 연출까지 잘하는데 작품마저 좋으면 반칙 아닌가. 극 중 윤혜숙은 2014년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로풍찬 유랑극장>에서 빨갱이 선생님, 여청숙 역을 맡았다가 자의와 타의에 의해 데뷔하자마자 은퇴했다고 한다. ‘아니, 왜?’ 되물어야 할 정도로 <세컨드 찬스>에서 윤혜숙 연출의 연기는 뜻밖이었다. 능청스러운 태도로 여유롭게 연기해내는 모습은 분명 배우 윤혜숙인 동시에 윤기문의 딸 윤혜숙이자 소을이 엄마 윤혜숙이었다. 찬송가 ‘Amazing Grace’와 가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개사하여 부를 때는 분위기를 순식간에 전환할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다. 포노그래프를 상대로 대화하는 장면 또한 전혀 어색함 없이 진행되었다.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것 또한 자연스러웠고 오히려 관객과 소통을 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물론, 윤혜숙 역을 맡은 까닭에 더 유연히 진행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배우 윤혜숙에게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무대 위에 홀로 서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것이 결코 쉽게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다시 한번 배우 윤혜숙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든다.
<세컨드 찬스>는 매우 영리하고 세련된 방식의 연출을 구사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 배우는 홀로 등장하지만, 음향과 영상, 오브제를 통해 여러 인물들을 공존하게끔 했다. 특히, 음향과 영상은 이 작품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주를 향해 로켓이 발사되는 순간이나 드넓은 우주의 모습, 아빠의 집을 몰래 탐색하는 영상과 동묘시장의 곳곳을 누비며 아빠를 기다리는 장면,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래 끝에 펼쳐지는 광활한 킬리만자로산맥의 영상 등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특히, 포노그래프를 윤혜숙으로 치환하여, 관객이 포노그래프의 시선으로써 영상 속 아빠를 보도록 한 방식은 매우 재치가 넘치는 연출이었다. 그 순간에 흐르는 배경음악이 N.E.X.T의 ‘Here, I Stand For You’인 점은 화룡점정이었는데, 극에 재미와 의미, 심지어 감동까지 더했다. 인파 속에서 너를 한번에 알아볼 수 있으며 그런 널 기다리겠다는 내용의 가사는 시장 속에서 아빠를 찾으며 기다리는 윤혜숙/관객의 입장을 절묘하게 대변해냈다. 아빠 윤기문은 가수 조용필과 매우 근접한 위치의 고등학교를 다녔고, 둘은 나이도 같은데다 생일도 유사하며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었다는 공통점에서, 만약 그 시절 약간의 접점만 있었어도 아빠 윤기문의 인생이 변하지 않았을까 윤혜숙은 생각했다. 그 생각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나아가는데, 윤혜숙 연출은 아빠 윤기문의 삶에 맞춰 개사한 노래를 만들어냈다. 윤혜숙이 노래하는 동안 이동식 영상기기에선 조용필의 얼굴이 어느새 윤기문의 얼굴로 변한다. 아빠 윤기문의 삶에 대한 회한과 의지가 담긴 가사는 노래의 말미에 영사되는 킬리만자로산맥의 장엄함으로 변주된다. 거대한 킬리만자로산맥 앞에서 홀로 기타에 심취한 윤혜숙/윤기문의 모습은 무한한 자연/우주 앞에서의 나약하지만 굳건한 인간존재를 연상하게끔 했다.
영상과 음향 못지않게 흥미로운 장치들이 무대 위에 등장한다. 우선, 무대는 마치 레코드를 제작하는 실험실의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금속성의 물질들과 영상 속 우주의 모습이 조합되는 순간은 우주선의 내부를 떠올리게 했다. 작업복인 듯 우주복인 듯 경계가 모호한 윤혜숙의 의상 또한 두 공간을 겹쳐 보이게 만들었다.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돌아가는 레코드판은 작품의 순환 구조를 상징했다. 아빠 윤기문의 삶을 저장하는 작업이므로, 윤기문의 삶이 지속되고 멈추는 것에 따라 레코드판도 재생되고 멈추기에, 레코드판의 움직임은 곧 생사를 직관적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오브제였다. 공연 포스터에 그려진 골든레코드판이 우주의 모습을 띠는 것은 이와 연관이 있었다. 골든레코드 ‘Key to the Moon’에는 윤기문이라는 한 사람의 우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미난 것은 객석의 각도에 따라 포스터의 그림을 무대에서 목격하게 된다는 점이다. 무대 위에는 달을 형상화한 우주의 모습이 영상으로 비치는데, 무대장치 중 둥근 금속성 부분이 각도에 따라 달의 중심에 위치하는 순간, 포스터 속 골든레코드 형상이 만들어졌다. 작품은 곳곳에 상징들을 배치하고서 발견의 재미를 더했다.

<세컨드 찬스>의 공연 사진. 아버지의 붉은 군밤모자와 노란 등산용 패딩을 입은 윤혜숙이 편의점 간이 테이블에 앉아 펜을 잡고 무언가를 쓰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리모콘, 테이프와 비닐 등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 지구본이 놓여 있으며, 벽에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 이미지가 영사되고 있다. 테이블의 아래에는 사골곰탕, 차돌육개장, 메밀소바 등 레토르트 식품이 일곱 개가량 놓여 있다.

<세컨드 찬스>, 이별할 기회를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역설적으로 사랑할 기회를 뜻한다. 저장과 재생이라는 방식으로 사랑의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하고자 하는 윤혜숙의 애틋한 소망은 다신 오지 않을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게끔 한다. 작품은 관객이 지속되는 삶에 익숙해져 소중한 시간·관계·대상을 간과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역설의 방식으로써 전하고 있었다. 그러니 <세컨드 찬스>는 관객에게 선물 같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연극에서는 아빠에서 딸로 딸에게서 또 딸로의 내리사랑이라는 구도와 함께, 딸 또한 아빠를 향해 사랑의 시간을 더듬는 행위를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관계도 순환의 구조에 놓여 있었다.
어쩌면 애정과 애증 사이를 헤매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싫은 소리, 쓴소리를 감내하면서도 기어코 서로를 찾아가는 이상한 행위는 서로가 유한한 관계임을 가늠하기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 관계의 끝에서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먹먹한 일이다. 무한한 우주에서 비롯되는 헛헛함이 왠지 그것과 꼭 닮았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의 소중함, 추상적인 문구가 이토록 와 닿는 이유는 나 자신부터가 우주로 순환할 자연의 일부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컨드 찬스,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이와의 오늘은 오롯이 오늘뿐이므로.

[사진 제공: 래빗홀씨어터, 촬영: 태휘원]

<Second Chance>
  • 일자 2022.11.29 ~ 12.17
  • 장소 Space111
  • 작/연출/출연 윤혜숙 인터뷰이 윤기문 조연출 이유주 드라마터그 신지원 영상출연 강혜련 목소리출연 이지현, 정승길 무대/소품디자인 유소양 조명디자인 성미림 다큐멘트 디렉터 김재영 영상디자인 강수연 음악 박소연 음향디자인 임서진 무대감독 이지혜 영상기술감독 김현배 음향기술감독 이현석 조명오퍼레이터 김다임 음향오퍼레이터 조예은 영상오퍼레이터 박진호 접근성매니저 이청 자막오퍼레이터 이수림 그래픽디자인 황가림 공연사진/영상 태휘원 프로듀서 나희경 대사인용 김명인, 「우주선」, 『바닷가의 장례』(1997), 문학과지성사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래빗홀씨어터 협력 플레이포라이프
  • 관련정보 https://www.doosanartcenter.com/ko/performance/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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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장윤정 연극비평집단시선 소속
연극평론 및 드라마투르그 활동을 한다.
yjlife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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