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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하는 이유, 또는 그래도 사람 속에서 사는 이유

극단 마실 <심청길 비밀레시피>

이진아

제244호

2023.10.26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곡성으로 갔거든요” 2022년 5월 12일 발행된 연극in에서 이양구가 인터뷰한 손혜정에 대한 기사1)를 보았다. “아, 돌아왔구나!” “다시 연극하는구나!” 하며 숨이 탁 놓였다. 그의 고향이 곡성인 것도 그때 알았다. 블랙리스트진상조사위원회가 발간한 기록물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아본 후로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미국에 가 있단 소식만 얼핏 들었다. 이제 연극은 하지 않는 것인지, 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지 내내 궁금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곡성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 할머니들의 말씀이, 할머니들의 밥이, 할머니들과의 작업이 그를 다시 연극하게 했구나 싶었다. 궁금했다. 그때부터 그렇게 꼭 다시 일 년을 기다려 올해 5월 곡성에서 <심청길 비밀레시피>를 보았다. 곡성의 할머니들과 청년들이 함께 만든 공연이었다. 곡성 기차마을에서 복원된 증기기관차를 타고 가정역으로 가, 할머니들의 레시피로 만든 도시락을 먹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연극이었다. 그래, 이 사람들 만나 살았구나, 그래, 이 밥 먹고 다시 연극했구나, 싶었다. 계절을 두 번 보내고 가을에 다시 <심청길 비밀레시피>를 찾았다. 이번엔 할머니 밥이 그리워서 갔다.
흑미 쌀밥과 콩나물국, 아주까리 잎사귀에 올려 담은 돼지불고기, 토란 줄기 무침, 제철 나물무침(가을에는 말려둔 나물무침), 멜론 장아찌, 아삭한 배추겉절이, 여기에 옥수수, 호박 식혜, 장식으로 올렸을 귀여운 땅콩이 더해진 정갈한 도시락이다. 이 도시락은 그냥 끼니가 아니다. 극의 주인공인 할머니들을 살게 한 비밀 레시피다. 여순사건으로 부모 잃고 굶는 날이 더 많았던 시절 서슬 퍼런 경찰 눈치 안 보고 기꺼이 밥 덩이 내어준 동네 아주머니들 덕에 잘 자란 동이가, 논에 사는 우렁이 덕에 농약 안 치고 건강하고 깨끗하게 키워낸 쌀이 지금 내가 먹는 곡성 백세미 쌀밥이요, 납치와 성폭력으로 얼룩진 결혼을 비관하여 죽으려 했을 때 아들 몰래 도망가라며 보따리에 여비와 돼지고기 삶아 넣어준 시어머니의 마음이 지금 내가 먹는 돼지불고기이며, 입 하나 덜겠다는 마음으로 시집간 낯선 고장에서 구박만 하는 시어머니 눈치 보느라 아홉 해 만에 막내딸 그리워 찾아온 친정어머니에게 밥 한 끼 못 해 드리고 그냥 보낸 서러운 마음 달래어 다시 살아갈 힘 되어준 배추로 만든 것이 지금 이 겉절이다. 그렇게 ‘살아낸 이야기’, 극중 인물의 말을 빌리면 ‘살라는 명령(생명)’ 지켜낸 이야기가 <심청길 비밀레시피>의 중심이다.

기차를 개조하여 만든 ‘음악다방’의 모습이다. 열차 내부 벽을 덮은 목재 타일과 좌우로 길게 설치된 나무 의자가 통일감을 준다. 
                벽면에는 LP판과 음료의 가격표가 붙어있다. 흰 천이 덮인 세 개의 사각형 테이블이 놓여있고, 각 테이블에 앉은 관객들은 무언가를 적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잔디밭을 배경으로 나물과 밥, 돼지불고기, 김치, 고구마 등이 담긴 도시락이 한 사람의 무릎에 놓여있다. 
                사진 속 손은 젓가락으로 밥을 뜨고 있다.

“나가 곡성 사는 심청이인디”라고 곡성 할머니들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연극이 심청이의 이야기를 희생하는 이야기가 아닌, ‘다시 사는 이야기’로 풀었기 때문이다. 죽기보다 살기가 더 어려운 삶, 그런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이는 누구나 심청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심청이들을 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가족인가 보다. 공연을 통해 청해 듣게 된 관객의 사연마다 가족에 대한 희생 이야기가 가득하다.
연극을 보기 위해 일종의 테마파크인 곡성 기차마을의 플랫폼에 모이면, 관객에게는 설문지가 하나 주어진다. 거기엔 총 5개의 질문이 있다. ① 당신의 ‘인생 음식’이 있다면? ② 당신의 수입을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하시나요? ③ 당신의 시간을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하시나요? ④ ②, ③번에 답한 그것을 위해 여러분이 포기한 것은 없나요? ⑤ ④의 포기하는 자신을 위해 한마디 해준다면? 관객이 설문에 답한 내용은 (구)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섬진강변 옛 철로를 따라 약 30분간 운행될 열차 안에서의 막간극(실제 막간에 진행하지는 않지만, 진행팀은 이를 막간극이라 부른다)의 소재가 된다. 북을 잡은 소리꾼 이수현과, 심청이도 되고 심봉사도 되는 이야기꾼 손혜정은, 심청이의 91대 사촌의 이종 당숙뻘 되는 말례와 복자가 되어 열차가 이동하는 동안 주거니 받거니 대거리를 하며 관객을 심청이 이야기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들은 2023년 심청이를 찾자며 이야기의 문을 연다. 여기서 관객의 설문 내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뽑아 든 사연마다 하나같이 자식을 위해, 아픈 부모를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아이를 위해 새벽부터 일을 하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어떤 이는 병든 어머니 곁에서 수년을 간호하고 임종을 지켰지만, 정작 저 자신은 돌보지 못했다. 그런 사연을 그저 읽어만 주었는데 사람들은 벌써 울컥한다. 누군가는 인생 음식에 시어머니 육개장을 적어 놓고는, 이야기꾼이 “왜 시어머니 육개장이여?”라고 묻기만 했는데도 눈물을 쏟는다. 이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서사는 너무 신파다. 신파인 삶을 기어이 신파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 신파에 우는 것도 딱 질색이다, 하면서 같이 운다. 누구나 삶이 쉽지 않고, 누구나 가슴 한편에 숨겨 둔 서러움이 있는 것이다.

<심청길 비밀레시피>의 공연 사진. 흰 저고리와 흰 치마, 흰 머릿수건을 하고 옆구리에 광주리를 낀 사람과, 흰 저고리와 흰 머릿수건, 
            흰 앞치마, 베이지색 하의를 입은 사람이 가운데 선 사람의 등을 도닥이고 있다. 
            가운데 선 이는 더벅머리를 하고, 때가 묻은 흰색 상하의를 입었다. 맨발에 바지 밑단이 찢어져 있으며, 양손에 각각 주먹밥 한 덩이씩을 들고 있다. 
            세 사람의 뒤로 푸른 잔디밭에 색색의 천이 빨래줄에 널려 있고, 강물이 흐르고 있다.

“저 아가씨가 우니까 나도 울지” 공연에 배우로 참여하신 박길순 어르신이 멋쩍게 웃으며 또 울며, 공연이 끝난 후 위로하러 온 스태프에게 항변하듯 하신 말씀이다. 오늘 공연에서 왈칵 눈물이 나 대사를 울음 섞인 호흡으로 하신 터였다.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맨 앞줄에 앉은 여성 관객 한 분이 줄곧 울면서 공연을 본 탓이다. 그 모습을 객석 우측 대기석에서 지켜보시다 그만 어르신도 등장 전부터 울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그렇게 따라 운 이가 어르신만이 아니다. 우는 관객 따라 눈물 닦으시는 어르신 보며 또 다른 청년 배우도 눈물을 삼킨다. 그 모습 보고 있자니 다른 관객도 또 따라서 눈물 훔친다. 아, 우리는 이야기가 신파여서, 우리네 삶이 신파여서 우는 것이 아니다. 서로 알아봐 주느라 우는 것이다. 사느라 고단한 우리네들, 여기 잠깐 함께 모여 서로를 알아보느라, 그래서 그 마음에 위로를 보내느라 우는 것이다. 그렇게 객석에서 무대로, 무대에서 객석으로, 서로를 알아봐 주며 위로가 번진다.
가정역에서 푸른 산과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을 배경으로 펼쳐진 본 공연의 이야기는 곡성에 사시는 여덟 분 할머니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공연에는 장길순, 박길순, 김기자 세 분의 할머니 배우가 등장하여 재구성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대변한다. 어르신들 외에도, 극의 중심을 잡아 준 이윤화 배우를 제외하고는, 본공연의 참여 배우 대부분이 시민 배우다. 연극에 참여한 곡성의 청년들도 곡성의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할머니들이 이렇게 이야기꾼이고, 시인이고, 재주 많고 흥 많으신지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런 시민 배우들을 보고 있자니 커뮤니티 연극의 힘이 여기에 있구나 싶다. 다양한 세대가 모여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하고 서로 다른 언어와 표현으로 서툴게 소통하고 오해하고 다시 이해하는 일, 사는 일이 그렇듯 살 맞대고 호흡 나누며 함께 뒹굴고 ‘연극’하는 일, 그렇게 하여 세대를 아우르고 거듭하는 ‘커뮤니티’가 무엇인지를 다시 깨닫고 의미를 공유하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을 이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그것이 커뮤니티 연극이라는 것을 <심청길 비밀레시피>에서 다시 배운다.

<심청길 비밀레시피>에 등장하는 세 할머니 배우가 평상에 나란히 앉아 웃고 있다. 서로 다른 색의 생활 한복을 맞춰 입었다.

생각해 보면 손혜정과 극단 마실은 늘 이렇게 연극을 만들어왔다. 지역의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붙잡고 ‘아줌마가 이야기해 줄게, 들어봐’ 하던 것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달려라 달려 달달달>이고, 출산과 육아로 연극하기 어려워진 동료 ‘엄마―예술가’들과 함께 ‘엄마’ 배우인지 엄마 ‘배우’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작업한 것이 <파롱 파롱 파롱아> 아니던가. 그녀의 연극은 늘 커뮤니티 속에서, 시민 ‘배우’와 ‘시민’ 배우의 경계에서, 놀이와 연극의 경계에서, 삶과 연극의 경계에서 싹트고 꽃 피었다. 연극도, 사는 것도, 다 사람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다 알지만 또 썩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실을 <심청길 비밀레시피>는 퍽 다정하게 다시 말해준다.

[사진 제공: 극단 마실]

극단 마실 <심청길 비밀레시피>
  • 일자 2023.10.7 ~ 10.9
  • 장소 곡성군 기차마을 (구) 곡성역
  • 작(사)·연출 손혜정 시민배우 장길순, 박길순, 김기자, 김미숙, 김민희, 김예원, 김현정, 빙유이, 에대표, 최효원, 황득경 전문배우 김현정, 손혜정, 이수현 연기지도 이윤화 소리지도 이수현 작곡 황호준 드라마가이드 문정연 전시 희:담 인쇄물디자인 양채은 교육 엘리꼬 홍보 김서희 조연출 이조은 마케팅 이향림, 이혜진 진행 송민영 홍보영상 도민주 무대디자인 김경희 안무 이은실 의상 휘황 음악녹음·연주 송지훈, 권병호, 조아라, 전계열 무대제작 차차 음식제작 심청 홍보 안선용 홍보물디자인 배유진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07893
  1. 이양구, 「<천국뉴스>: 쩍쩍 갈라진 틈에 꽂혀 있던 휴지조각?」, 『연극in』, 2022. 5. 12., https://www.sfac.or.kr/theater/WZ020600/webzine_view.do?wtIdx=12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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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

이진아
연극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연극비평이 필요 없는 시대의 연극비평을 고민하면서 혼자 쓰고 읽고 좋아하며 산다.
snowe.sookmyung.ac.kr/club/playgo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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