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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뉴스>: 쩍쩍 갈라진 틈에 꽂혀 있던 휴지조각?

이양구

218호

2022.05.12

손혜정
17년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세상이 싫고 사람이 싫었거든요. 그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곡성으로 갔거든요. 거기서 4년 정도 작업을 했어요. 시골 할머니들 얘기를 채록해서 그걸 시로도 만들고, 아이들에게 들려주기도 했어요. 시골 학교 아이들이 그래요. 할머니들에게 그런 스토리가 있는지 몰랐다고요. 브릿지 같은 역할을 한 거죠. 아이들이 만든 랩 같은 거를 또 할머니들에게 들려주기도 하면서.
이양구
그래도 연극을 다시 하신다니 다행이네요.
손혜정
거기 학생들은 대개 실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요. 다른 친구들보다는 일찍 취업 전선으로 나가는 거죠. 그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자기를 표현하는 연습을 시켜봤어요.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학교거든요. 극작도 해보고, 댄스도 춰보고, 영상으로 자기표현도 해보면서 한편의 공연을 만들어보는 거죠. (생각하다가) 그러다 보니 그 사건 이후 제 작업이 전환된 것 같아요. 커뮤니티 아트 쪽으로.
이양구
전환이 어떤가요?
손혜정
살려고 그렇게 한 거죠. 정말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작업 방향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연극in 현장 코너는 현장의 지속적인 활동과 질문, 다양한 창작자들의 욕구와 활동에 주목해왔습니다. 여러 필자가 각자의 현장을 취재하고, 닿고 싶은 곳을 찾아가는 과정은 하나의 지도 안에 담기기 어려운, 이리저리 뻗고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직접 만나보지 못한 장소와 동료들을 만나고, 각자의 다르고도 구체적인 위치와 목표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현장은 또 어떻게 감각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손혜정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출신 전직 장차관 등이, 블랙리스트 사건에 연루된 국장급 고위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 추진을 중단하여 달라는 청원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차례 논란이 있었던 탓이다. 이 공무원들에 대한 (검찰 불기소 처분 시) 징계는 문화체육광관부가 공개적으로 약속했던 사항으로, 전직 장차관들이 이 약속을 부정하는 청원을 한 것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재발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신호로 느껴졌다.1)

사건 당시 예술경영지원센터 담당 직원은 심사 직후 손혜정에게 휴대전화로 연락을 하여 마치 몰래 알려주듯 최종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직원으로부터 난데없는 선정 취소 통보가 왔다. 담당 직원이 초기 예산 배정을 잘못하는 실수를 저질러 지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손혜정은 기관을 상대로 세 달 가까이 혼자 항의하고 싸웠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겨우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선정 취소 사유를 적은 공문 한 장이었다.

손혜정
그날 이후 나는 길을 잃은 것 같아요. 주소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걸어가다가 종이를 펴 보면 그저 하얀 빈 종이만 갖고 있는 꿈을 계속 꿨어요. 그게 나의 무의식 상태 같아요. 그때는 블랙리스트 같은 것은 모를 때였고, 크리스천이다 보니 그저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서 계속 노력하면 그 일은 잘 해결될 거라고 믿었고, 정말 무모하게 계속 싸웠죠. 그런데 결국 그 일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았던 것 같아요. 내 위치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 사람들이 문체부는 무서워도 예술인은 안 무서웠던 거죠. 예술인들이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거예요. 남이 알려준 내 위치를 대면했던 거죠. 그때까지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즐거웠고, 누가 뭐래도 내 작품을 하는 것이 행복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처음으로 너무 큰 세상이 내 앞에 있었어요. 누군지도 알 수 없는 그 누군가가 나를 좌지우지해버린 거죠. 이 사건에서 내가 가장 아픈 부분이 그거였어요. (예산 배정 실수라는, 나중에는 중복지원 금지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설득하려 들었는데, 설득하는 논리가 고작 산수가 잘못되었다는 둥, 이중 지원이 안 된다는 둥 하는 거였으니까요. 만약 내가 어려운 존재였다면 그럴싸한 논리라도 고민했을 것 같은데.
이양구
사실 그때는 직원들도 논리를 개발할 수 없었죠. 말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손혜정
이 사건을 겪으면서 자꾸 생각나는 사건이 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생님한테 맞아본 적이 있거든요. 온몸이 떨리도록. 엄마, 아빠도 나를 안 때렸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창문 뒤로 숨었다가 일어나면서, 장난으로 “누구야!” 하면서 우릴 놀래키며 웃긴 적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같이 웃으면서 “누구야!”, “누구야!” 하면서 놀았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뭔가 기분이 나빴나 봐요. 갑자기 돌변해서 “누구야라고 한 사람 누구야? 일어나!”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같이 웃은 애가 20명은 됐기 때문에 다른 애들도 일어날 줄 알고 일어났어요. 그런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던 거죠. 선생님은 내 뺨을 갈겼고, 나는 바닥에 쓰러졌어요. 이번에는 “일어나!” 하시기에 일어났더니, “일어나란다고 일어나?” 하면서 때리셨어요. 다시 “일어나!” 하시기에 일어나지 않았더니 이번에는 “일어나라는데 왜 안 일어나?” 하면서 때리셨어요. 처음에는 그게 웃겼던지 웃음을 터뜨렸던 친구들도 점차 조용해졌어요. 그러고 선생님은 30분쯤 후에 나를 불러 웃는 얼굴로 미안하다고 했어요. 부모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요. 내가 겪은 블랙리스트 사건이 어떤 거냐고 물으면 나는 이 사건이 생각나요.
이양구
구조적으로 같은 거네요.
손혜정
그런 것 같아요. 이 사건을 떠올리면 그날 생각이 자꾸 났어요. 블랙리스트 사건 때도 그랬거든요. 나는 그저 질문했을 뿐이거든요. 내가 왜 떨어진 건지. 그런데 너 계속 그러면 앞으로 지원받을 수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2
ⓒ임인자
이양구
조사 신청을 무척 늦게 하셨잖아요.
손혜정
(감정이 올라와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 사람 때문에 조사 신청을 했어요. 그때 나에게 몰래 선정됐다고 알려줬던 그 직원요. 그 사건 이후로 그만뒀다고 들었거든요. 기관에서는 자의로 그만둔 거라고 하는데 나는 못 믿겠거든요. 그분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듣기 전에는요. 혹시 그 사람도 나처럼 혼자였을까 봐요.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사과를 받을 때도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이름도 일부만 알려주셨어요. 내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고 있나 싶으면서도 지금도 그게 너무 힘들어요. 그 사람 연락처 하나 받는 게 왜 안 되는 건지. 왜 그 사건에 대해 더 알 수 없는 건지.
이양구
민사소송에 참여하지 않으셨잖아요.
손혜정
다른 사람들이 배상받는 것에 동의하고, 소송에 참여한 분을 비난하는 건 절대 아닌데요. 나는 이 사건이 배상으로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정리될까 봐 두려웠어요. 이 사건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공연을 못 하게 됐으니 공연을 다시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기금을 마련하든, 그게 무슨 방법이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담론이나 이야기로 풀어가는 과정이 먼저 있고 나서 해답이 소송이었다면 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2017년 그때 나에게 민사소송은 해결책이 아니었어요. 나는 내 공연을 원 위치로 돌려주길 원했어요.
이양구
사실 개별 피해를 세심하게 살피기보다는 운동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서 집단 소송을 냈던 거죠. 정부에서도 배상을 위한 법적 근거가 없고요. 국회에서 만들면 되지만 국회는 관심이 없죠. 개인적으로는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들을 위한 배상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손혜정
블랙리스트 사건은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사유화의 문제라고도 생각해요. 공공의 것을 몇몇 사람이 내 마음대로 재단하고 배제하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요. 절차와 방식이 조금이라도 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극단 소개에 블랙리스트 피해를 받았던 사실을 일부러 넣어놨어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너무 먼 얘기로 느끼는 것 같아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도리어 이것 때문에 더 피해를 보는 것 같아요. 까다로운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할까요. 구설수에 오른 사람에 대한 사회적 편견 같은 것을 느껴요. 그래서 사실 극단 소개에서 그 얘길 뺄까 생각도 했어요. 이 인터뷰를 하고 나면 또 구설수에 오르고,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고요.
이양구
곡성으로 가시면서 작업이 바뀌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전에는 어떤 작업을 하셨어요?
손혜정
배제된 작품은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였어요. 관객 참여 공연인데, 한국의 전통 악기를 활용해서 해외 공연이 가능했어요. 아시테지에서 우수작품상을 받기도 했고요. 인도 순회공연까지 마쳐서 자신감이 붙어 있었죠. 연출과 배우를 겸했거든요. 즉흑성, 현장성이 중요한 공연이죠. 그런데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그 사건을 겪은 뒤로는 배우가 하기 싫어졌어요. 사람이 싫어졌거든요. 사람들 앞에, 전면에 서는 데 두려움이 생긴 것 같아요. 원래 즉흥적인 사람인데,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말을 하게 된 거죠.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을 배웠으니까요. 그래서 배우를 하지 못했어요. 몇 번 하긴 했는데, 정말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못했어요.
이양구
곡성에는 어떻게 오시게 된 거예요?
손혜정
곡성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후배가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언니 우리 애들은 공연도 못 봐. 여기 와서 공연해주면 안 돼?” 그러는 거예요. 사람과 관계를 끊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숨어서 살 때였죠. 아이 둘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가뭄으로 땅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는 틈에 휴지조각 같은 게 있어서 들여다봤어요. 그런데 그게 꽃이었어요. 하얀. 갈라진 바닥에 버려진 휴지처럼 피어 있었던 거죠. 내가 ‘얘는 자기가 꽃인 줄도 모를 것 같아.’ 그러니까 애들이 ‘그럼 우리가 꽃이라고 불러주면 되지.’ 그러는 거였어요. 그날 거기서 아이 둘과 함께 춤을 췄어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사람도 잘 오지 않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러고는 곡성으로 가기로 마음 먹은 거죠. 거기 가면 내가 뭔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거기 가서 할머니들을 만나고, 이 사람들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할머니들은 정말 대단해요. 갖고 계신 이야기가 정말 대단해요. 그들을 꽃이라고 불러주고 조명하는 거, 그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2)
3
<할머니의 비밀 레시피>(2021)
할머니 음식 속에 담긴 할머니 삶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다.
마을 청년들과 할머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누고 싶은 연극 장면을 만들어서 선물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양구
할미꽃이네요.
손혜정
사실 작업의 결과물은 별거 없어요. 이를테면 <천국뉴스> 같은 작품에서는 할머니 집에 가서 같이 밥을 먹는 거였어요. 할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병원에서 응급처치 방법을 글로 적어서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가 글을 못 읽는다는 말을 차마 못 하고 돌아오신 거죠. 그 뒤로 다시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할머니가 글을 읽지 못해서 처치를 못 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할머니는 죄책감 때문에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하게 되셨대요. 우리가 동네 청년들하고 연극놀이를 해서 <천국뉴스>를 만들었어요. 천국에서 할아버지가 나와요. 여기 와 보니까 겁내 좋다고,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해주죠. 그날 할머니가 정말 많이 우시고 맛있는 걸 드셨어요. 그 먹는 행위가 쩍쩍 갈라진 땅의 그 꽃처럼 보였어요. 그 뒤로는 나도 조금 바뀐 것 같아요. (이런 작업들이) 블랙리스트가 준 시혜 같아서 말하기 짜증나요. (웃는다) 나를 받아준 고향의 품이 정말 컸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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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자

블랙리스트 얘기를 할 때는 어둡던 그의 표정이 공연 얘기를 할 때는 언제부터인가 환하게 웃고 있어서 신기하였다. 그가 보내준 공연영상을 뒤늦게 보고 나서야 내가 블랙리스트 문제를 (예술인과 작품에 관심 없었던) 공무원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터뷰를 마친 후 손혜정은 광주역까지 다시 바래다주었다. 며칠 후 그는 죽을 것만 같았던 그 시간에도 자기 안에 존재했던 예술의 힘, 더듬거리며 앞으로 가게 만들어준 힘이 있었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가 보내준 아름다운 공연 영상 하나를 소개한다.

  1. 노형석, 「문체부 전 장차관, ‘블랙리스트’ 실무자 구명운동 논란」, 『한겨레』, 2022.04.11.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38368.html
  2. 극단 마실의 작업을 볼 수 있는 블로그. https://blog.naver.com/masil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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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구

이양구 연극 연출가. 극작가.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있었던 극단 마실(손혜정 대표) 배제 사건을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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