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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지혜

가면과 맨얼굴의 경계에서 지혜가 생겨나요

오세혁_작가·연출가·배우
79호 2015.11.05
나는 이지혜 입니다.

배우 그리고 광대입니다.

많은 인물들이나를 만나고 나를 떠나갑니다.

배우 이지혜

나는
이지혜 입니다.

배우
그리고
광대입니다.

많은 인물들이
나를 만나고
나를 떠나갑니다.

<로풍찬 유랑극장>의 끝심이
이 친구는 한국전쟁의 고아입니다.
<이건 노래가 아니래요>의 이겨을
이 친구는 버스킹하는 젊은 가수입니다.
<달나라 연속극>의 은하
이 친구는 옥탑방에 살면서 원주율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아가씨입니다.
<순우삼촌>의 지숙
이 친구는 70년대에 잠실에서 농사짓고 살던 여자애입니다.
<미성년으로 간다>의 시은
이 친구는 방에 틀어박혀서 팬픽을 쓰며 온갖 상상을 하는 여고생입니다.

예전의 나는
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가면을 썼어요.
‘끝심’이라는 가면
‘겨을’이라는 가면
‘은하’라는 가면
‘지숙이’라는 가면
‘시은이’라는 가면

지금의 나는
이 친구들을 가면을 쓰고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내가 이 친구들이 되고 싶어요.
전쟁터를 기어 다니는 지혜
버스킹을 하는 지혜
원주율을 외우는 지혜
잠실에서 날갯짓을 하는 지혜
방 안에 틀어박혀서 팬픽을 쓰는 지혜

가면을 쓰려고 노력했던 시간만큼
맨 얼굴이 되려고 노력하는 시간을
천천히 천천히 보내고 있어요.

배우 이지혜

연극을 시작한 이유도
어쩌면
맨얼굴이 되고 싶어서
시작한 것 같아요.

인기를 얻고 싶어서
일부러 어리버리한 척을 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 어눌한 가면을 쓰고 있으면
누구랑도 친해질 수 있었어요.
모두가 나를 편하게 생각하고
모두가 나를 보면 웃고
그 힘으로 반장도 하고.

그런데 그게 들통이 났어요.
수학여행 때였어요.
친구들과 밤새 놀다가
먼저 잠들었는데
내 친구가
나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어요.

“쟤 원래 학기 초에만 인기 있어.”
“일부러 어눌한 캐릭터로 인기 얻는 거야”

음,
좀 충격이었어요.

입시에 돌입하면서
모범생의 가면을 썼어요.
난 대학에 가야 된다.
공부를 잘해야 된다.
공부를 잘해야 되니까
옷도 사면 안 된다.
남자를 만나도 안 된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왔는데

음.
잊어버린 거예요.

뭘 해야 할지
목표는 뭔지
미래는 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났어요.
어떤 가면을 써야 할지.

아아
안 되겠다.
그냥 살자.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막 살자.
낭만을 마구 누려보자.
수업도 안 가고
연극반에서만 살고
연극 대본만 보고
남들은 2000년대를 사는데
나만 1990년대 학생 같았어요.

정말 막 살았어요.
지금까지 가면을 쓰느라 눌러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느낌이었어요.
이러다가 자칫하면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아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졸업을 했어요.

배우 이지혜

제 전공은 경영학이에요.
어릴 때 꿈은 음악이었어요.
그것도 클래식.

어릴 때부터 비올라를 했어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했었고
그러다가
갑자기 집안 사정이 안 좋아졌어요.
입시를 앞두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지혜야, 미안하지만, 전공은 안 되겠다.”

그때는 참 슬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 됐어요.
내가 클래식에 들어갔다면
내 성격에, 내 정신에
하하하.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경영학과에 오긴 했는데
대학이니까
재밌는 걸 해보고 싶은데
악기는 지겹게 했으니
다른 걸 해보고 싶더라고요.

연극은
본 적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는데
뭐랄까
대학은 젊은, 열정, 용기 이런 느낌이라
안 해본 걸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연극반에 들어가서는
늘 연극반에만 있었어요.
경영학과를 다니는 게 아니라
연극반만 다녔죠.
하하하.

재밌는 건요.

“연극을 만나서 연극이 좋아졌어요”

이런 해피엔딩은 아니에요.

막 싸우기도 하고
도망도 치고 그랬어요.
너무 싫기도 하고
토할 것 같기도 하고
왜 저기서 거짓말 하고 있지
이런 생각이 마구마구 들고.

심지어 회장으로 뽑혔는데
연극반은 도망치고
연극반 옆에 있는 재즈동아리 가서 원서 내고.
엄청 욕먹고.
하하하.

그렇게 어물쩡하게 연극반을 하다가
극단 생활도 어물쩡하게 들어갔어요.

“결심했어! 연극할래!” 이게 아니고.

어떤 극단에 어물쩡 구경을 갔는데
연수단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어물쩡 대답을 하고
어물쩡 극단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가
사정상 그 극단을 나오게 되었고
연극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연출가 부새롬 언니가
나를 찾아줬어요.
커피 트럭을 사서
커피 장사를 하려고 했었는데
하하하.

그렇게 <달나라 동백꽃>에 들어가고
무대에 서게 되었어요.
그것도 일인극으로.

<이건 노래가 아니래요>라는 일인극이었고
재능교육 해고자들의 현실을 알리는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페스티벌이었어요.
페스티벌이다 보니까 갑자기 60~70명의 연극동료들이 생겨나더라고요.

그 동료들이 너무 좋다보니까
계속 배우를 하게 되고 오늘까지 오게 되었어요.

배우 이지혜

그리고
좀 부끄럽지만
어물쩡하게
밴드 앨범도 냈어요.

연극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시점이라
집에서 거의 두 달을 안 나왔을 때였어요.

대학 선배가
재미로 한 번 앨범을 준비하는데
너도 노래 만들 생각 있으면
같이 녹음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어물쩡 앨범을 냈어요.
잠시 후 또
어물쩡 두 번째 앨범도 내고.

하고 싶은 음악까지는
실력이 안 돼서
할 수 있는 음악 정도로
타협한 앨범이랄까.
하하하.

밴드 이름이 ‘집 나온 거위’예요.
근데 실제로는
맨날 집에만 있었어요.
반지하방에서 맨날 뒹굴 거리고.
하하하.

그 선배는
지금 뮤직비디오 감독이구요.
그리고 또
제 애인이에요.

제목들도 꽤 좋았어요.

마음 병동
이따 해요
교환 환불 불가
천에 삼십
금방 끝나는 노래
시집 갈 거다
가을겨울봄여름방학
너의 기타에서 하프식 코드 소리가 나

우리는
라이브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 웃긴 얘긴데
애인이 무대공포증이 있어요.
축가를 한 번 하는데
기타 맨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더라구요.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까지 무대에 서지 못 했다는 전설을 만들고 있죠.
무대공포증을 컨셉으로
콘서트를 해볼까 싶어요.
무대에는 안 나오고
대기실에서 부른다던가.
하하하.

연극을 시작할 때는
뭐든지
예스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좋습니다!”
“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지금은
노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게 왜 그렇죠?”

그래서
갈등도 막 생기고
연출 부새롬 언니하고도
예전에는 다 “네네” 했는데
지금은 “그게 왜 그런데요”
막 이래서
막 다투기도 하고.
하하하.

소통을 잘 하면 되는데
자꾸 서툴러서 싸우게 되요.
지혜롭게 극복하고 싶어서
선배들도 마구마구 관찰하는데
선배들도 지혜롭게 극복이 되는지는 잘.
하하하.
어찌되었건 작업이니까요.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니까요.
작업은 치열해야 하니까요.

배우 이지혜

제 목표는
음.
배우를 10년은 해보자.
잘 모르겠지만
10년은 붙어 있어보자.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내 스스로 그만둘 수도 있지만
다른 것들을 쉽게 그만 두었던 것처럼
연극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한 편으로
언제든지 그만둘 준비는 되어 있어요.
연극이 내 행복을 빼앗는다면
언제라도.

그 행복은
실질적 행복이에요.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거나
생활이 무너진다거나
집 청소가 안 되어 있다거나
연극에 쏠리느라
내 생활이 무너지는 경우예요.

연극이 만약
내 생활을 이렇게 잠식한다면
언제든 그만 둘 생각이 있어요.

하지만 역시
10년은 더 배우를 하고 싶어요.
근데 사실은
언제부터 따져서 10년인지
까먹었어요.
계속 하고 싶단 얘기죠 뭐.
하하하.

나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을까.
음.

원래는
읽고 해석하는 연극을 좋아했어요.
이 연극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그럼 나는 이런 역할을 해야겠구나.
근데 어느새 재미가 없어졌어요.

지금은
이지혜 자체를 텍스트라고 생각해요.
배우라는 존재가
어떤 작품을 만나서
곱하기가 되었을 때
곱하기가 발생했을 때의 짜릿함.
텍스트를 수행하는 인물이 아니라
드라마에 협조하는 배우가 아니라
이지혜라는 존재가
서있고 느끼고 생각할 때
관객들이 그 존재를 봐줄 때.
배우 이지혜가
어떤 작품을 만나고
어떤 작업자를 만나고
이지혜 자체로 존재하고
이지혜 자체로 짜릿해지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누군가 나보고 말했어요.

“넌 불쌍한 역할을 참 잘해”

칭찬 맞죠?
하하하

지금까지는 계속
연극 때문에 생활이 휘둘려요.
그래서 늘 결심을 해요.
겹치기 하지 말자.
임박한 작업을 하지 말자
그런 결심을 하는데
결심이 결심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체력을 키워야 되나.
술을 덜 먹어야 되나.
하하하.

거의 매일
대학로에 있는데
그런 기운을 받아요.
여기서 쿵짝 저기서 쿵짝 하면서
무언가가 계속 도모되는 기운.
하지만 그 도모에도 불구하고
힘든 연극인은 여전히 힘든 기운.

정말 힘든 이삼십대가 많아요.
알바랑 배우를 같이 하던 친구가
어느새 알바만 하고
그러다가
“나 배우 안 할까봐” 선언을 하고
선배와 선생 때문에 힘든 친구도 있고
작업이 뜻대로 안 풀리는 친구들도 있고
기회 자체가 안 오는 친구들도 있고
그런 기운들 때문에 때때로
내 기운이 흔들리기도 하죠.

연극을 처음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그만하라고 할 정도로
맨날 화를 내고 욕을 했어요.
대체 이 작품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대체 내 배역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야.
대체 이 돈으로 어떻게 만들라는 거야.

공연기획자 이동근

그러다 문득
내가 왜 내 에너지를
연극을 할 소중한 에너지를
욕과 화에 쓰고 있지?
생각이 들면서
좋은 기운을 내려고
마구마구 노력하죠.

하지만
요즘 대학로의 기운은
음, 아시다시피

내 동료들이
거의 매일 대학로에서
피켓을 들고 있어요.

내가 정말 사랑하는 내 동료가
우리 극단의 단원이
윤혜숙 연출이
우리 극단 사람들한테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하는데

아 이거 내 문제구나.
난 정말로
사회나 연극계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이 아닌데
그런 나를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정말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못하겠어요.
연습 중간중간에도
계속 현장에 나가보게 돼요.

그 언니는
작품도 정말 온화하고
작은 세계를 추구하는
정말로 온화한 언니인데

그 온순한 언니가
밤잠을 설치면서
폭삭 주저앉은 얼굴을 보니까.

언니의 맨얼굴을 보니까
나도 내 얼굴을 감추지 못하겠어요.
맨얼굴로 나설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 윤한솔 연출이
연극하는 것은 직업이라기보다
태도에 가깝다,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이 정말 좋았어요.

배우 이지혜

태도.

이런 세상에서 굳이 연극하는 이유를
저항이라고 까지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너무 거창한 말이고

어떤 태도로 살겠다, 라는 다짐.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싶고
아름다운 태도로 잘 살고 싶고.
그런 태도와 다짐.

나한테 연극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다짐이에요.

그런데
정말 죄송한데
대학로에 서 있을 동료들이
너무 맘에 걸려서요.
인터뷰를 빨리 좀 마치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배우 이지혜

이지혜(배우)
주요작품
<로풍찬 유랑극장> <이건 노래가 아니래요> <달나라 연속극> <순우삼촌> <미성년으로 간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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