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창작자·워크숍리더 김신록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관객들 엉덩이가 의자에서 붕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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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요.
나는 배우예요.
나는 창작자예요.
나는 워크숍 리더예요.
배우와 창작자와 워크숍리더.
나한테는 세 가지의 세계가 있어요.
처음에는 몰랐죠.
내 세계가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지.
그래서 자꾸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찾으려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머물 세계를 찾아서요.
200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 드림플레이에 들어갔어요.
2006년에 몇몇 드림 식구들과
극단 노뜰에서 기획한 세계 무대예술가 워크숍에 갔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워크숍, 배우훈련이라는 것을 접했어요.
그로토프스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어요.
충격이었어요.
배우훈련인데 배우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배우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 했어요.
영혼과 영혼의 만남에 대해
모든 껍데기 너머 본질과 본질의 연결에 대해
그리고 그 본질로서의 몸에 대해
충격, 충격, 충격이었어요.
그 이후로 계속 여러 나라를 돌면서 워크숍을 찾아다녔죠.
지원도 받고, 월세 보증금이랑 전 재산도 다 털어서.
책에서 읽었던 극단들과 사람들을 진짜로 만나보고 싶었죠.
덴마크의 오딘극단, 폴란드의 그로토프스키 인스티튜트
액션 시어터의 창시자인 미국의 루스 자포라
뷰포인트와 스즈키 메소드로 작업하는 뉴욕의 시티 컴퍼니
이 여정에서 세르게이라는
이번 생애에 다시 만나야하는 연출가를 만났죠.
말이 좀 이상하죠? 하하하.
세르게이는 ‘영원’과 ‘Pure 에너지’, ‘인연’을 중시하는 연출가예요.
어느 날 말하더라고요.
우리는 꼭 다시 만나서 성숙한 만남으로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성숙한 만남으로’ 라는 말이 왜 이렇게 좋았던지.
그 이후로 내 삶에서 만나는 나를 자극시키는 예술가들을 보면
이렇게 생각하죠.
우리는 꼭 다시 만나서 성숙한 만남으로 작업 하게 될 것이다.
나도 그 사람도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면
시간이 지나 성숙해지면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오래두고, 보고, 애틋하게 기다려요.
너무 소중해서 아까운 만남의 순간을.

시티컴퍼니의 대표 여배우
엘렌 로렌
내가 스승으로 생각하는 사람.
육십 가까이가 되었는데
지금도 스스로 훈련을 주도하고 개발하고
사적으로는 굉장히 달콤하고 작업으로는 굉장히 엄격하고.
미안해요.
갑자기 울어서.
보고 싶네요. 갑자기.
나 인터뷰 하는 모습 보면 혼낼 것 같아.
왜 훈련 안 하고 이빨 까고 있냐고.
하하하.
작년에 국립극단 시즌단원을 했었어요.
내 이력들은 주로 피지컬시어터, 즉흥공연, 다원예술처럼
뭔가 낮선 이름이 붙었었죠.
하지만 내 은밀한 욕망은 체홉의 엘레나와 마샤예요.
하하하.
국립에 들어갔던 이유도
고전 작품의 ‘인물’을 제대로 연기해보고 싶어서였죠.
주로 시스템 바깥에서 독립적인 작업을 해왔던 내가
국립이라는 공고한 시스템 안으로 처음 들어가게 되니까
그 시스템이 좋기도 했지만
뭐랄까.
시스템 안에 들어갔을 때 갖게 되는 본질적인 수동성이랄까.
그런 걸 처음 경험했어요.
왕비 역 오디션을 봤는데 시녀 역할을 맡았을 때
실망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그런데도 해야 하고
주인공이 아닌 앙상블을 맡았을 때
삶의 의욕이 와르르 내려앉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그런데도 해야 하고
난 항상 워크숍을 할 때마다
배우들에게 연극은 관객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거다.
관객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깨어있어야 한다.
이런 멋진 말들을 해왔는데
주인공이 아니라 앙상블이 되니까
왕비가 아니라 시녀가 되니까
무대에 서지 않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렇구나.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고
무대에서 잘 보이고 싶고, 좋은 역할만 맡고 싶은
그냥 보통 배우였구나. 나도 그냥 별 수 없구나.
내 안의 세속적인 욕망을 제대로 마주했어요.
너무 괴롭고 추하다고 느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참 좋았어요.
현실감을 갖게 되었어요.
나는 붕붕붕 날아다니면서
이상향을 찾아다니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는데
현실에 발을 딛는 이 세계의 사람이 되었어요.
왕비를 원했는데 시녀가 되었을 때의
괴로움, 그 괴로움이 1년 지나니까
건강함으로 바뀌었어요.
나의 성과 속을 함께 들여다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늘 하고 싶은 작업만 하고
이상적인 집단을 흠모해서 찾아다니고
자기 세계를 이룬 마스터들을 만나면서
이상적인 집단의 세계가 나의 세계인 듯
마스터의 세계가 나의 세계인 듯
착각하며 살아왔던 내가
주인공 하고 싶은 나
앙상블에 실망하는 나와 충돌하면서
그 충돌로 건강해졌어요.
뭐랄까.
각성되지 않은 현실과 이상향이 혼재하면
그건 그냥 나르시시즘이라는 아픈 깨달음.
그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그런가.
요새 나의 화두는 성의와 정성이에요.
장인의 시대가 점점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요.
왜 이런 생각이 들까요.
홍대를 가면 후라이드 치킨을 제대로 파는 곳을 찾기 힘들어요.
수많은 퓨전들만이 존재하고 있어요.
치킨퐁듀가 있고, 허니치즈가 있고
모두 서둘러 시류에 편승하는 거죠.
하지만
자꾸만
가장 기본의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어져요.
본질의 맛을 느끼고 싶어져요.
나도 내 작업에서 본질의 맛을 찾고 싶어요.
내 작업에 성의와 정성을 쏟고 싶어요.
이제 더 이상 해치우는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아요.
2014년부터 <저스트 듀엣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워크샵과 트레이닝에서 만난 작업자들과
일대일로 만나서
그 만남의 과정과 결과를 공연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에요.
예술가와 예술가가 일대일로 만나서
서로를 자극하고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을 보여주는 공연.
일대일의 연결
일대일의 균열
지금까지 세 편의 작업물을 만들어냈어요.
세 편 다 완전 인기 없었어요. 하하하.
그래도
관객 중 누군가가 영감을 얻었다면
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축복이죠.
결국 만남은, 관계는 일대일이잖아요.
맨 투 맨
그래서 ‘저스트 듀엣’
나에게 배우 훈련은 나의 정체성이에요.
훈련은 항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죠.
2009년 이후로 내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워크숍을 리드해 왔어요.
올해에는 < Connecting Group >을 꾸리고 싶어요.
연습실에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 훈련할 동료들이죠.
lt; Connecting >은 2010년에 연출했던 내 첫 연출작 제목이기도 하고
예술가로서의 내 화두이기도 해요.
‘연결’
나와 나, 나와 남, 나와 세상, 무대와 사회가 연결되기를 바라는.
빛나는 동료들이
빛나는 구슬들이
아주 많아요.
그 구슬들을 하나하나 공들여 만나서
평생에 걸쳐서 잘 꿰고 싶어요.

아버지가 배우를 하셨대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나를 지인이 운영하는 지역 극단에 데려가서는
“연극을 배우라는 게 아니라 인생을 배우라는 거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참 기억에 남아요.
난 예술과 사랑과 종교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
대학에서 첫 사랑을 만나 연애할 때
학교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는데,
나뭇잎 사이로 황금색 햇살 조각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요.
그 때 처음 ‘황금빛 햇살’이라는 말을 이해했어요.
일종의 마법이죠.
마법 같은 순간.
난 연극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한 순간이라도
관객들에게 마법 같은 순간을 줄 수 있어야 해요.
자신이 알던 방식, 살아 온 방식에 대해
완전히 낯설어 질 수 있는 그 한 순간.
잠들어 있던 일상을 깨워낼 수 있는
그 한 순간.
왜 그럴 때 있잖아요.
한 밤 중에 문득 혹은 이른 새벽녘에
맥없이 잠에서 깼을 때,
어둠 속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낯설어지고
내 존재가 너무 명확하게 느껴지고
모든 중요한 것들이 사소하게
모든 사소한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요.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배우는 연기해요.
배우가 존재를 걸고, 눈 딱 감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섬광처럼 세계가 뒤집히죠.
존재가 가짜일 때
그래서 세계를 전복시키지 못할 때
배우는 참 하찮은 사람이에요.
나 연기 좀 봐달라고 구걸하는 사람이 되죠.
그건 정말 한 끝 차이예요.
아주 한 끝
칼날 같은 한 끝
‘배우는 칼날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을 하다가 주책없게 울었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난 정말 그렇게 느껴요.
내가 깨어있는 몸과 정신으로
무대에 서서 관객을 깨우려고 노력할 때,
난 사랑이자 종교이자 예술이죠.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난 그냥 창녀에요.
그로토프스키의 일갈처럼.

인터뷰 요청을 받고 두려웠어요.
내가 너무 생각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라,
어느 토막을 어떻게 끊어서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해하는 일은 힘들죠.
이해받는 일은 더 힘들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순간이 필요해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섬광 같은 한 순간.
그 한 순간이 모든 설명을 먹어버리고
모두를 벙어리로 만들기를.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제발 관객들 엉덩이가 의자에서 붕 뜨기를!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나 결혼해요.
박경찬과 김신록의 결혼식.
1월 30일 토요일 12시.
놀러오세요. 하하하!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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