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지영
공기가 있으니까 연기를 하고, 연기를 하니까 숨을 쉽니다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나는 배우입니다.
극단이나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채
10년 째 오직 배우
두 글자로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오직 배우

나는 황지영입니다.
나는 배우입니다.
극단이나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채
10년 째 오직 배우
두 글자로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오직 배우
두 글자로만 존재할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춤을 췄어요. 한국무용을 했죠.
너무너무 재밌었는데 집이 망하는 바람에 그만 둬야 했어요.
하하하.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개인레슨을 했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더 이상 춤을 배울 수 없다는 거예요.
단식을 했어요.
초등학생이 춤을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하하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무용복이랑 공연 사진을 마당에서 태우고 있었어요.
아, 나는 이제 정말로 춤을 추면 안 되는구나.
하지만 너무 춤을 추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봐주는 게 좋았고
나는 정말로 춤을 추러 태어난 것 같았고.
길에서 춤을 췄어요. 스트리트 댄서로. 하하하.
춤을 추느라 학교를 안 갔어요.
아버지는 내가 하도 학교를 안 가니까 비행소녀인 줄 알았는데
난 정말로 계속 밥 먹고 춤만 췄어요.
그렇게 추고추고 또 추다가 고3때 JYP 연습생 오디션을 봤어요.
연습생이 아니라 곧바로 모 그룹 백댄서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기분이 정말 정말 좋았어요.
그렇게 백댄서를 두 달 했는데.
거리에서 춤을 추던 것보다 재미가 없었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춤, 내가 춤을 춘다면, 늙을 때까지 계속 즐겁게 출 수 있을까.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럼 늙을 때까지 즐거울 수 있는 건 뭘까.
갑자기 연기가 생각났어요.
연기는 늙을 때까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즐겁게 할 수 있겠다.
그날 이후로 연기 연습을 해서 동아방송대에 연극영화과 시험을 보러 갔어요.

시험장에 갔는데 지정대사가 코딜리어였어요.
코딜리어가 누군지 몰랐어요.
리어왕의 코딜리어라고 했어요.
리어왕이 누군지 몰랐어요.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이라고 했어요.
셰익스피어가 누군지 몰랐어요.
와,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부끄럽던지.
어쩌겠어요.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대기실 풍경을 보니까 대부분 예쁘고 착한 코딜리어를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에라 모르겠다.
난 잘하지 못하니까 다르게라도 해야지.
시험장에 들어가자마자 무지막지하게 오열하면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면서. 하하하.
교수님이 웃으시더라고요.
괜찮다고. 괜찮으니까 천천히 하라고.
정신을 차려보니 합격을 했더라고요.
학교에 가자마자 목표를 세웠어요.
난 연기를 못하니까 다른 거 하나라도 목표를 잡고 혼자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운동장 20바퀴를 돌자. 그 이후로 정말 졸업할 때까지 매일 운동장을 달렸어요.
그 덕분에 아직 연기를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연기를 잘 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하하하.
졸업을 하자마자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어느 날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오디션 공고가 뜬 거예요.
세상에. 예전에 이 공연을 관객으로 보면서 너무너무너무 감동 받아서
내가 언젠가 저 배우들과 함께
꼭 이 무대에 서겠다고
꼭 이 무대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었거든요.
그 생각을 하자마자 오디션 공고가 뜬 거예요.
이건 내꺼다. 이건 내꺼야.
정말로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함께 무대에 섰어요.
그렇게 프로무대 데뷔를 하고,
그때부터 모든 오디션의 준비는 기도로 시작하는 습관이 생긴 거 같아요.
하하하.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인당수 사랑가>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칠수와 만수>
<변두리 멜로>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
<내 마음의 슈퍼맨>
<늙은 부부 이야기>
<당신만이>
한 편 한 편 신나게 하다보니 10년째가 되었네요.
사실 10년이라는 시간이 크게 다가오지는 않아요.
저의 시간은 ‘하루’거든요.
하루를 잘 사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오늘을 잘 살면 계속 잘 사는 거니까
현실을 잘 살면 무대에서도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가끔 주위 분들이 꿈이 뭐냐고 물으시는데
솔직히 난감해요.
전 이미 꿈을 이뤘거든요.
늙어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게 꿈이었는데
충분히 이루어질 것 같으니까요.
요즘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어요.
어떻게 좋은 죽음을 맞을까.
어떻게 멋있게 늙어 갈수 있을까.
그럼 결국 좋은 삶을 살아야겠죠.
매일매일 충실하게 열심히.
열심히 살고 열심히 연기하고.
매일매일밤을 감사함으로 마감하고.
어찌보면 단순한 삶이겠지만
어찌보면 명확한 삶이죠.
나의 평생 목표는 딱 두 가지예요.
계속 배우를 하는 것.
계속 배우를 하기 위한 상태를 만드는 것.
배우를 하기 위해서
쉼 없이 배우고 움직이는 건
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건 비밀이었는데요.
엄마가 무당이었어요. 엄청난 무당. (지금은 하느님을 믿으십니다. 하하하.)
그래서 어떤 숙명에 대한 것을 믿었어요.
타고난 정해진 운명 같은.
실제로 쉬면 몸이 아프기도 했었고.
요즘은 숙명보다는 사명으로 생각해요.
가끔, 정말로 가끔
우리의 공연 한 편으로
마음의 방향이, 삶의 방향이 작게나마 바뀌는 것을 목격해요.
그때가 가장 뭉클하고 배우가 가진 사명이
얼마나 크고 행복한지.
근데 아직 가족들은 저를 안쓰럽고 불쌍하게 보는 것 같아요.
전혀요.
10년동안 한 번도 힘들지 않았어요.
정말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업만 했거든요.
난 내 인생의 끝이 보여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작업을 하고
좋은 관객을 만나고
좋은 술을 마시고
좋은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고
다시 다음날
좋은 마음으로
새로운 작업과 사람들을 만나러
집을 나서고
이렇게 계속 시간이 흐르다보면
내 인생은 아름답게 끝나겠지요.

공기.
아무도 없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그 공기.
객석에 앉은 관객들이 말없이 뿜어내고 있는 그 공기.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쫑파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 골목
그 골목을 걸어갈 때의 그 공기.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닌
이상하고 복잡한 공기.
그 공기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계속
어떤 공간에서
어떤 공연의
어떤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공기’를 맡고 있어요.
나한테 연극은 공기예요.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 황지영(배우)
- 주요작품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인당수 사랑가>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칠수와 만수> <변두리 멜로>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