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혜영
나는 나, 라고 말하는 배우
부새롬_연출가, 무대디자이너
112호
2017.03.23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뿌 얼마 전에 <메디아>보고 캐릭터라이징이 궁금했어요. 약간 말괄량이 같다고 해야 하나, 하이힐 막 집어 던지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연출이 원하는 대로 했어요. 연출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의 <메디아>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이 작품을 하기로 하고, 그리스 비극...
이 연출이 원하는 대로 했어요. 연출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의 <메디아>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이 작품을 하기로 하고, 그리스 비극...

- 뿌
- 얼마 전에 <메디아>보고 캐릭터라이징이 궁금했어요. 약간 말괄량이 같다고 해야 하나, 하이힐 막 집어 던지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 이
- 연출이 원하는 대로 했어요. 연출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의 <메디아>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이 작품을 하기로 하고, 그리스 비극, 신화, 온갖 기원전 작품들, 읽다가 읽다 시저가 쓴 『갈리아 전쟁기』까지 읽었어요. (웃음) 그렇게 신화를 섭렵하면서 너무 매혹 당했어요. 내가 가장 흥분하면서 좋아했던 내용은 그 시대 사람들이 맹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였어요. 트로이 전쟁도 맹세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요. 당시에 배신이란 건 이미 죽은 목숨이랑 같죠. 그런 게 너무 거룩하게 느껴졌고, 멋있었어요. 신화에 너무 매혹 당해서, 내가 그 신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았어요. 그런 꿈 얘기를 한 적도 있어요. 헤라 이모와 구름 위에 같이 앉아있었다는 둥, 제우스랑 같이 벼락을 던졌다는 둥. (웃음)
무대에 멋있게 서서 관객들을 바라보면서, 흔히들 아는 그리스 의상을 입고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읊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연출을 만났더니 신들을 다 빼고 싶고, 현대로 갈 것이며, 신화라는 건 잊어버리라고, 러브스토리로 가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럼 그 ‘러브’ 때문에 애도 죽이고 그러는 거냐, 그랬더니, 분노했고 복수하는 거다, 그래요. 근데 내가 또 그리스 신화에 매혹 당했던 것 중의 하나가 뭐였느냐면, 전쟁도 사랑도 파멸도,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신들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거였어요. 인간이 인간을 정죄하는 게 아닌 거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끔찍한 스토리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고. 신을 없앤다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결말도요. 원래는 메디아가 수레를 타고 날아가잖아요. 근데 죽였더라고. 너 같으면 남편이 이렇게 배신했을 때 어떻게 하겠냐, 연출이 묻길래, 나 같으면 아이게우스의 대사처럼 그런 고약한 인간이라면 보내겠다, 나는 평소에 싸움도 안 하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는 사람이고, 이런 분노를 가져본 적도 없다, 그랬더니 “그럼 우리는 메디아를 못하죠. 우리는 지금 그 얘기를 하려는 건데. 그럼 메디아는 여기서 끝.” 그러더라고. (웃음) 그런 분노를 하려면 그 큰 사랑을 해야만 하는데, 그때부터 공부가 시작된 거죠.
연출이 모든 걸 요구한 거예요. 원작을 읽었을 때는 상대방이랑 마주보고 대사를 할 것 같지 않았는데, 대사를 다 마주보고 하라는 거예요. 상대배우와의 소통, 스피드를 많이 강조했어요. 내가 조금이라도 감정에 빠지려고 하면 “No, no, no”가 바로 나와요. 이미 그 감정을 가지면 스피드가 떨어지고 관객은 느낄 수 없다, 라는 거죠. 그래서 정말로 연출이 원하는 대로 했어요. 말하자면 형태를 먼저 만든 거죠. 그렇게 하다하다보니까 어떤 날은 내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럴 땐 좀 천천히 가보겠다, 그러면서 작업을 했어요. 연습 때 힘들어서 슬리퍼를 신고 했는데, 공연에서처럼 막 벗겨지고 그러는데 연출이 좋다는 거예요. 연출의 선택과 의도에 따라 메디아가 만들어진 거죠. - 뿌
- 결과적으로 마음에 안 드시나요?
- 이
- 아니요. 결국 비극은 성격이 만든다더니, 그녀의 성격, 메디아라는 역할, 이 경험을 하면서 정말로 연기자로서 업그레이드된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만족해요.
- 뿌
- 어떻게 업그레이드 된 것 같으세요?
- 이
- 여러 가지 배우로서 좋은 점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지만 (웃음) 그걸 발휘할 만한 역할을 만나야 드러나는 거죠. 내가 그 어떤 걸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게 무대 위에서 예술적으로 표현이 될 때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메디아는 역할 자체가 그런 볼륨이 있죠.

- 뿌
- 작품을 준비하실 때 책이나 관련 자료를 많이 보시나 봐요.
- 이
- 그럴 수 밖에 없죠. 메디아는 그리스 비극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으로 표현이 돼요. 그 인물이 어떤 세계에 있었는지 모르면서 연기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냥 말만 읽는 건 말이 안 돼요. 너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 뿌
- 아무래도 그리스 비극은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다른 작품 하실 때는 어떠세요?
- 이
- 공부를 필요로 할 때는요, 사실 모든 역할이 그랬겠지만. <헤다 가블러>할 때가 기억에 많이 남아있어요. 그 유명한 <인형의 집>의 노라는 너무 많이 들어서 아는 것 같았지만 실은 잘 모르고 있었죠. 한동안 입센에 푹 빠졌어요. 다른 작품들, 여러 가지 논문도 읽고, 입센을 파고 들다보니 또 입센이랑 관련된 다른 작가 작품들도 읽고… 어느 순간 <헤다 가블러>가 쓰여진 19세기로 가있더라고요. 나는 준비가 됐어, 그 시대에 가있어, 나는 그냥 하면 돼. (웃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갈매기>할 때도 체홉에 관한 것, 러시아 문화사, 문학사… (많이 읽었어요.) 아르까지나가 아들 꼬스챠한테 “키예프의 속물”이라고 하는 대사가 있어요. 키예프가 도시라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키예프가 어떤 곳이길래 그런 말을 했을까? 그걸 찾으려고 800페이지짜리 책까지 읽었는데 못 찾았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지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속물근성을 얘기한 거였는데. (웃음) 그러니까 그런 질문, 나의 궁금함이 그렇게 하게 만드는 거죠. 근데 결국 그 대사는 빠졌어. (웃음)
- 뿌
- 연출보다 더 열심히 하시는 것 같은데요. 반성이 드네요. 평소에도 책 많이 읽으세요?
- 이
- 네. 나는 웬만한 것들은 어떤 걸로 대체가 돼요. 화가 나든, 슬프든, 우울하든, 뭘 먹거나 음악을 듣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하면 풀리는데, 어떤 것들로도 도움이 안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오로지 책만이 도움이 돼요. 미친 듯이 빠져서 계속 읽어요.
- 뿌
- 최근에 재밌게 읽으신 책 있으세요?
- 이
- 얼마 전에 연기에 관한 책을 선물 받아서 읽고 있는 게 있고, 작품 들어오면서부터는 책을 많이 못 읽었어요. 다른 데 조금이라도 정서적으로 뺏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읽지 않는 것도 있고요. 그 전엔 『도올 김용옥의 중국일기』를 재밌게 읽었어요.
- 뿌
- 지금 말씀하셨던 아르까지나, 헤다 가블러, 흔히 말하는 ‘쎈 역할’을 많이 하셨잖아요. 영화에서도 그런 역할을 많이 하셨던 것 같고요. 어릴 때부터 그런 역할을 많이 하셨어요?

- 이
- 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배우를 하고 싶었고, 그렇지만 그게 부러워서가 아니라, 왜 저렇게밖에 안하지? 내가 좀 보여줘? 이러면서 한 거거든요. (웃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역할만 한 게 아니라 내가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런 여자고,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만약 어떤 역할이 A라고 분명하게 요구된다면 누가 해도 똑같아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잖아요. 이혜영이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내가 처음 배우가 됐을 때 청순가련형 일색이었어요, 봐줄 수가 없었어. (웃음)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모두 다 좋아해준 건 아니죠. 어떤 가능성이나 나의 성격에 관심을 갖고 보는 사람도 있었고, “아, 니가 나오니까 화면이 찢어질 것 같아!” (웃음), “너한테는 무대가 맞어.” 그런 사람도 있고.
내가 처음 연극할 때 한 선배님이 “야, 넌 굉장히 크게 되거나, 굉장히 안되거나 둘 중의 하나야.” 그랬어요. 나중에는 그 선배가 “너 왜 이렇게 많이 깎였냐? 팡팡 튀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떤 각이 있었는데 뭔가 둥그래졌구나” 그래요. 그게 좋은 의미이기도 하고 안 좋은 의미이기도 했어요. 나는 안정적이라는 게 배우한테 정말 필요하다고 느껴요. 좋을 땐 다 좋지만, 배우가 위험할 때는 안 좋을 때잖아요. 안 좋은 상태를 어떻게 극복하냐, 가 중요한 문제죠. 나는 좋으면 너무 흥분하고 안 좋을 땐 너무 떨어져버려요. 지금껏 배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실수를 하고 제대로 발휘를 못했다면 그런 극과 극의 성격 때문이었어요.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서 안정감을 갖게 되고, 오히려 그런 안정감이 그 이후에 활동할 때 훨씬 좋았어요. 결혼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야. 부모로부터 안정감을 얻는 사람이 있고, 친구나, 애인이나, 어떤 선생이나, 사람마다 다르죠. 나의 경우는 가정이에요. 어려서부터, 성장배경이 좀 불안해서 그런 것 같아요. 열등감, 감추고 싶었던 것,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어졌고, 그때부터 나의 정직함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좋게 쓰여진 것 같아요. 정직함이나 솔직함이 어떤 때는 너무 컨트롤이 안 됐었거든요. - 뿌
- “버릇없다, 건방지다” 이런 말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들을 수 밖에 없는 시대였으니까,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 이
- 그럼. 그랬었죠.
- 뿌
- 청순가련형, 재미없었다, 그 말씀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그런 역할이 요구되기도 하잖아요.
- 이
- 요즘도, 뭐, 거의 그렇죠.
- 뿌
- 착한 여자거나, 흔히 말하는 악녀거나, 아님 엄마거나. 여성의 역할이 좀 한정적인데, 이런 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
- 여자역이 늘 상대적 역할로 많이 나왔죠. 내가 데뷔했던 시절만 해도 난 좀 큰 편이었어요. 여자는 남자보다 작아야 되고, 남자가 안아줄 수 있어야 되고, 그건 뭐 지금도, 미국도 마찬가지죠. 좀 큰 여배우는 코미디 영화에 나오거나, 여자주인공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죠.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 않을 걸요? 그런 건 여전히 불만이죠. 그리고 최근 들어서 더 여자 역할이 없지 않아요?
- 뿌
- 그렇죠. 특히나 어느 정도 나이가 되고 나면 많은 배우들이 엄마 역할로 들어가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헌신하는 엄마 역할 너무 많잖아요. 해보신 적 있으세요?
- 이
- TV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엄마 역할을 처음 해본 것 같아요. 내가 진짜 엄마가 돼서 엄마 역할을 한 거죠. 그 역은 남편이 없는, 아들이 곧 남편인, 아들을 남자로 생각하는 여자였죠. 그 전까지TV드라마에서 없었던 엄마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연기를 했다고, 나는 자부해요. 그 역이 독립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아들을 낳아봤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어떤 건지도 알았으니까 만들어진 인물이죠. 물론 작가랑 연출이 깊이 신뢰해줬고, 그 신뢰가 자신감을 줘서 오들’라는 캐릭터가 생긴 거죠. 어쨌든 엄마라는 역할이 곧 평범하다, 라고 볼 수는 없어요, 그건 아니야, 얼만큼 영향력이 있는가를 표현해야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그런 이야기가 너무 없지 않아요? 이건 쓰는 사람들하고 얘기해야 될 꺼 같은데? (웃음)
어렸을 때 연극을 많이 보긴 했지만, 뮤지컬을 좋아했어요. 애초에 내 꿈은 줄리 앤드류스나 진저 로저스, <퍼니 페이스>에 나온 오드리 햅번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어떡하다 보니 <메디아>를 하고 있네요. (웃음) 연극에서는 내가 감동했던 건 유인촌이 나왔던 <햄릿>이었어요. 거기서 난 거트루드도, 오필리어도 되고 싶지 않았고, 그 햄릿이 하고 싶었어요. 언제나 여자 햄릿 어디 없나? 그랬는데, 일본에선 있었다고 그러대요. 세상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그랬던 거죠. 근데 이번에 메디아 하면서 “아, 햄릿 부럽지 않아.” 이런 생각을 하게 됐네. (웃음)

- 뿌
- 정말 여배우들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없긴 한 것 같아요.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도 그런 것 같고.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여자가 주인공이고 주목 받았던 건 <아가씨>밖에 안 떠오르네요. 그런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전도연 배우였나, 누가 봐도 매일 시나리오가 백 편씩은 들어올 것 같은 유명한 배우였는데, 작품이 없다고 했더라고요. 저는 그쪽 판은 잘 모르지만 그게 무슨 얘긴지 단박에 알겠더라고요. 재밌게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 없는 거죠. 하고 싶었던 햄릿 같은 메디아 역할을 하셨는데, 또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 있으세요?
- 이
- 네. 버나드 쇼의 <세인트 존>이라고 있어요. 내가 쟌다르크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도대체 지금 그 연세에 19세를 어떻게?” (웃음) 뤽 베송이 만든 <쟌다르크>를 본 사람들은 밀라 요보비치를 생각하면서 “저 할머니가 왜 그러시나” 그럴 꺼야. 쟌다르크를 다룬 작품은 200개도 넘을 거예요. 근데 버나드 쇼의 <세인트 존>을 읽으면 나이를 초월하는 게 있어요.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영화도 제대로 안 봤고, 책만 읽었는데 <올랜도>, 올랜도가 한 400년 살잖아요. 처음엔 남자로 태어났다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여자로 바뀌어있는 그런 캐릭터도 해보고 싶어요. 그리스 신화에 한참 빠졌을 때는… 너무 좋은 역할들이 너무 많죠. 에우리피데스의 <토로이의 여인들>, <이피게네이아>, 또 <페드라>의 원전인 <히폴리투스>. 그리고 여러 신들이 다 등장하는 이야기, 내가 모르지만 세상에 그런 대본이 있을 것 같아요, 신들이 모여서 트로이 전쟁을 할까 말까, 아킬레우스를 죽일까 말까, 그런 논의를 하는 작품이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다들 나를 헤라로 생각하겠지만 (웃음) 아테네를 하고 싶어요.
- 뿌
- 어느 제작자 분이 보시고 연락을. (웃음)
- 이
- <메디아> 의상 하신 진태옥 선생님이 요즘에 연극을 너무 좋아하시고 욕심이 많아지셨어요. “얘, 이혜영, <보니 앤 클라이드>나 <위대한 개츠비>, <페드라> 그런 거 꼭 해라.” 그러셔. 그 의상을 하시고 싶어서. (웃음) 또 선생님 때문에 <페드라> 해야지. 할 게 많네요.
- 뿌
- 연극을 2, 3년에 한 편씩 꾸준히 하셨더라고요. 영화나 TV도 그렇고, 조금씩 텀을 두고 하셨더라고요. 특별히 조절을 하시는 건가요?
- 이
- 우선 가정에서의 나의 역할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연극은 연습 시간, 공연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TV나 영화는 그렇지가 않아서, 점점 멀어지는 게 있어요. 가정에서의 저의 역할이 너무 크기 때문에. (웃음)
- 뿌
- 워킹맘으로서의 애환이 느껴지네요.
- 이
- 엄마로서의 삶도, 그게 저니까, 그걸 집어던지고서 작업을 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 뿌
- 배우생활 하시면서 되게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어요?
- 이
- 배우를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게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한 건데, 내 역할을 잘 하지 못했을 때죠. 그게 제일 괴로운 일이죠.
- 뿌
- 어떤 특정한 시기나, 작품을 할 때가 아니라요?
- 이
- 너무 많아요, 너무 많죠. 나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기 때문에 했던 많은 실수들. 그런 사람이면 다른 사람 말이라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던지. (웃음) 그런 사람도 아니고. 나 같은 사람은 안정적인 삶과 생활이라는 게 너무 필요했던 거예요. 배우는 그게 잘 돼 있어야 돼요. 그런 사람이 연기를 해야 돼요.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모든 게 다 안정적이어야 돼요. 어떤 것 하나라도 균형이 맞지 않으면 안돼요. 배우라는 게 태생적으로 그런 건지,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으려고 하잖아요. 받고 있나, 확인하고. 그러다 보면 자기 중심적으로 되고, 좁아지게 되고요. 보기도 많이 봐야 되고 남도 배려해야 되고, 사랑하는 마음도 커야 되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 정말 존경할만하다, 라는 수준이 돼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이 먼저 돼라, 가 정말 맞는 말이야. 인간이 되려면 그런 모든 게 안정적으로, 균형이 맞아야 되는 거죠.
- 뿌
- 아무래도 배우들은 캐스팅이라는 것도 있고 불안 속에 있기가 쉽죠. 그럼 반대로 성취감을 많이 느꼈던 순간은요?
- 이
- 공연이 끝나고죠. TV도 영화도, 다른 어떤 것도 그런 느낌은 없어요.
- 뿌
- 영화 같은 경우는 첫 시사회 같은 것 보면 비슷하지 않나요?
- 이
- 시사회 보면 아후… 난 다 중간에 나갔어요. 연극이 좋은 게 그거예요. 나를 볼 수 없다는 것. 내가 나를 보는 순간 견딜 수가 없어요. 물론 잔인할 정도로 발가벗은 모습을 봐야지. 근데 내가 내 모습을 보면서 평가하는 게 정말 잔인하고 뻔뻔한 짓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1회성이고 남지 않는 연극이 좋고 내가 그냥 착각한 상태로 있는 게 좋아. <갈매기>를 보고 관객마다 얘기하는 거야 다 다르겠지만, 지금 당장 기립박수를 받을 때, 성취감을 느끼죠. 여러분 나 잘 했죠? 박수치는 저 관객들 중 누군가는 감동했고 기뻤고, 또 인생이 달라질지도 몰라. 내가 그런 걸 줬고, 내가 무대 뒤에서 막 수다 떨다 나와서 대충 연기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내 1년을, 모든 걸 쏟아 부었으니까, 난 자격이 있어요, 여러분, (웃음) 그러면서 커튼콜에서 흠뻑 느끼는 게 착각이어도 좋아.
- 뿌
- 아, 동영상 인터뷰였으면 좋겠어요. (웃음) 독자들이 봤으면 재밌어 했을 텐데, 글로는 전달이 안될 것 같아요. 연극하는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공연이 어땠느냐랑 상관없이 커튼콜에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어요. 이 두 시간을 위해서 저 배우들이 적어도 두 달을 쏟아 부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 이
- 그러니까요.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이 순간 서로 믿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감동하면서, 해나가잖아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요? 우리 식구들이랑 다같이 밥 한 번 먹기도 힘든데.
이 사이, 배우 이혜영의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입맛이 다 다른 식구들 때문에 음식을 몇 가지 이상 요리해야 할 때도 있고, 비염 때문에 잠 못 드는 둘째 아이 때문에 한밤중에 이불을 털기도 하고, 배우인 며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왜 아직도 그 고생이니?”란 걱정을 듣기도 하고, 첫째 아이가 연극에 관한 수업을 듣고 배우인 자신과 말이 잘 통하게 돼서 기뻐하기도 하는. 배우 이혜영의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던 그 삶의 얘기가 참 재미있었는데 지면 길이상 짧게 대신 한다.

- 뿌
- 마지막, 연극데이트 공식 질문입니다. 이혜영에게 연극이란?
- 이
- 내 존재, 내가 존재하는 이유. 나는 내가 좋아서 배우를 했고, 뭘 보여주고 싶어서 했잖아. (웃음)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연극적이라는 게, 어떤 척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한다거나, 그런 식의 표현으로 많이 쓰이잖아요. “연기하지마, 거짓말 하지마” 그렇게. 그런 게 아니라 연극이라는 게 극대화된 감정의 표현이잖아요. 그야말로 자기를 표현하는. 그런 게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내가 매일 그 안에 들어가 있을 수는 없지만 한번도 거기서 나를 떨어트려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 이혜영(배우)
- 2012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 제5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연기상 <헤다가블러>
- 1995 제32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 <문제적 인간 연산>
- 1995 제31회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 <집>
- 1988 제25회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 <사의 찬미>
- 1987 제11회 서울연극제 여자연기상 <로미오20>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