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혜×권슬아]
우리가 사랑한 애니
편집실
263호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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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초연 이래 20주년을 맞이해 다시 무대에 오르는 <유츄프라카치아>. 이 오래된 이야기를 지켜온 ‘빅애니’ 신경혜 배우와 새롭게 그 세계에 들어선 ‘리틀애니’ 권슬아 배우에게 어떤 배우인지, 어떤 애니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어쩐지 질문할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닌 두 배우의 대답을 옮겨본다.
Chapter 1. 연극배우로서
안녕하세요. 연극in 독자들에게 자기소개를 해 주세요.
- 신경혜
- 안녕하세요. 극단 비유의 단장이자 <유츄프라카치아>의 연출 겸 배우를 맡고 있는 신경혜입니다.
- 권슬아
-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유츄프라카치아> 20주년 공연에서 리틀애니 역을 맡게 된 권슬아입니다.
두 분은 어떻게 연극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 신경혜
- 중학생 때 연극부 활동으로 전국 학생 연극제에 나갔는데, 거기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어요. 차범석 작가님의 <고구마>라는 작품에 아버지 역할이었는데, 그때부터 할머니든 아줌마든 역할을 가리지 않고 해온 것 같아요. 그날 처음으로 연기의 재미를 알게 됐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배우 말고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다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돌고 돌아 우여곡절 끝에 연극인의 길로 들어서게 됐죠.
- 권슬아
- 어렸을 때 어머니의 직장 세미나에 따라갔다가 직장인분들이 준비한 연극을 보게 됐어요. 닐 사이먼의 <맨발로 공원을>이라는 작품이었는데, 그분들은 배우가 직업도 아닌데도 무대 위에서 눈이 반짝이고 열정을 쏟아내는 모습에 크게 감동받았어요. 이걸 직업으로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좋은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어머니한테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게 그때예요. 부모님 두 분 다 그냥 한때겠거니 하셨는데,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도 계속 연기를 꿈꾸는 걸 보며 진심을 알고 그때부터는 많이 밀어주셨어요.
배우로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과 어려운 순간은 언제인가요?
- 신경혜
-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당연히 관객을 만나는 순간이에요. 예전에 포항에서 따님과 함께 공연을 보러 오셨던 중년 남자분이 끝까지 기립박수를 치시더니, 가진 현금 전부를 제 손에 쥐여 주신 적이 있어요.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이만큼 마음에 떨림을 주는 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반대로 힘들었던 건 아이를 키우면서 극단을 운영하던 시절이에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매일 연습실에 데리고 다녔는데,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자책 때문에 힘들었어요. 아이는 오히려 그 시간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미안해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무대가 두려워요. 어릴 땐 신나기만 했는데 지금은 생각도 표현도 더 조심스러워진 것 같아요.
- 권슬아
- 공연 중에는 사실 객석이 잘 안 보여요. 그런데 커튼콜 때 조명이 밝아지면서 관객들 얼굴이 딱 보이는 순간, 서로 온전히 마주 보고 박수를 나누는 그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요. 반대로 가장 버거운 건 공연 직전이에요.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라 매번 도망가고 싶을 정도거든요. 다들 저더러 긴장을 하나도 안 할 것 같다고 하시는데, 사실 속으로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 들 정도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이 오르면 바로 괜찮아져요. 아마 무대에 오르는 순간 내가 아니라 배역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 같아요.
좋은 배우, 좋은 연기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신가요?
- 신경혜
-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보고 듣고 느낀 걸 표현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먼저 표현부터 해버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좋은 배우는 자연스럽게 상대 배역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참 쉽지 않아서 저도 여전히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서요. 단장으로서는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진심으로 가슴을 울리고 위로가 되는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사명감이 있어요. 돈도 안 되고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힘든 순간에 우리 공연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버텨왔어요. 실제로 제가 힘들었던 시기에 무대에서 했던 대사들이 저를 위로하고 살렸던 적도 있고요.
- 권슬아
- 예전에 함께 작업했던 연출님이 해주신 말인데, 저는 '온 마음을 다할 줄 아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기술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작품의 이야기와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마음을 무대 위에서 온전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매번 같은 장면을 연기하다 보면 자칫 관성처럼 대사가 나올 수도 있잖아요. 저는 매 장면을 처음 겪는 일처럼 여기고, 대사뿐 아니라 그 사이의 행간까지 온 마음을 다해 읽어 내려 애쓰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Chapter 2. 유츄프라카치아의 애니로서
<유츄프라카치아>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떠셨나요?
- 신경혜
- 1999년에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아주 짧은 드라마 대본이었어요. '유츄프라카치아'라는 식물의 이름이 아프리카 말로 '사람의 영혼을 가진 식물'이라는 뜻이래요. 한 번 잘못 만지면 죽어버리지만 끊임없이 계속 만져주면 살아나는 신비의 식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지속적인 관심을 주면 죽어가던 존재도 살아날 수 있다는 게, 사람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은 헬렌 켈러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설리번의 이야기예요. 설리번은 어릴 적 수용소에서 한 할머니의 끝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해요. 그 사랑이 설리번을 만들었고, 설리번이 헬렌 켈러를 만든 거죠. 사랑을 내 안에 가두지 않고 누군가에게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제 마음을 울렸던 것 같아요.
- 권슬아
- 저는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요즘엔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빠른 호흡에 자극적인 이야기가 넘쳐나는데, 이 작품은 누구나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고 받은 만큼 사랑을 나눠주는 존재가 돼야 한다는 어쩌면 머리로는 누구나 다 아는 말을 외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뻔한 평범함이 정말 귀하고 어려운 거잖아요. 이 작품은 절망을 희망과 사랑으로 정화하는 이야기예요. 먼지 쌓인 마음의 필터를 갈아 끼워 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요.
서로의 애니를 소개해주세요.
- 신경혜
- 리틀애니는 빅애니, 즉 설리번의 과거예요. 누구나 이겨내지 못한 상처가 있고, 사랑을 거부하고 숨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잖아요. 상대의 관심이나 사랑을 자꾸 의심하고 계산하게 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인물이에요. 부모와 사랑하는 동생을 잃고 시력마저 잃은 상태로 세상과 단절된 시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애니를 볼 때마다 안쓰러워요. 리틀애니는 빅애니 안에 남아 있는 존재이다 보니 더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국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애니를 보면 매번 감격스러워요.
- 권슬아
- 빅애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에요. 논리나 기술로 교정하려고 하기보다 유츄프라카치아를 쓰다듬듯이 곁에서 계속 관심을 주며 기다려주는 인물이죠. 아무리 좋은 방향일지라도 누군가를 억지로 변화시킬 순 없잖아요. 빅애니는 스스로 마음을 열도록 기다려 주고 스스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혹은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을 알려줘요.
ⓒ극단 비유
<유츄프라카치아>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이나 대사를 들려주세요.
- 신경혜
- 리틀애니와 자전거를 타고 야외로 놀러 가는 장면이 있어요. 눈은 보이지 않지만 처음으로 세상 밖에 나와 바람을 느끼는, 리틀애니가 행복을 맞이하는 순간이죠. 그때 빅애니가 리틀애니에게 '널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해요. 우리는 보통 사랑한다는 말은 해도,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잘 안 하잖아요. 그래서인지 그 한 마디가 제 마음에 오래 남아요.
- 권슬아
- 저도 자전거 장면을 좋아해요. 리틀애니가 빅애니를 부르면 '왜?' 하고 대답하거든요. 그때 리틀애니가 '그냥요'라고 해요. 그 안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많은 마음이 함축되어 있는 걸 느껴요. 리틀애니는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하는 인물이 아니니까, 그 당시로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을 거예요. 마음이 너무 커서 다 담아낼 수 없어서 그저 '그냥'이라는 단어에 눌러 담은 거죠.
애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 신경혜
- 애니, 넌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지. 하지만 그건 결코 너의 잘못이 아니야.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스스로를 탓하기도 해. 왜냐하면 그게 가장 쉬우니까. 때로는 그렇게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하고.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어. 정말 잘했어. 애썼어.
- 권슬아
- 애니,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 그리고 의심하지 마. 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네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넌 사랑받아 마땅해.
애니를 만나는 관객들이 함께 알거나 느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 신경혜
- 우리는 사랑의 조건을 찾잖아요. 매력, 능력같이 증명하기 쉬운 것들로요. 그런 조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 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폴라 역을 흑인으로 표현한 적도 있었어요. 당시 인종·장애 등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사회 속에서 나와 다른 존재에게 사랑을 주는 애니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그 역시 차별적 표현이 될 수 있기에 지금은 인종을 특정하는 시각적 연출을 하진 않아요. 무조건적인 사랑에 관한 메시지만은 변함없지만, 20년 세월과 함께 공연도 조금씩 변화하고 함께 성장해온 것 같아요. 지금은 무대 장치보다 마음을 담아내는 내면의 연기가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 작품을 통해 나의 애니, 나의 유츄프라카치아는 누구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을 경험하셨으면 좋겠어요.
- 권슬아
- 저는 리틀애니를 연기할 때, 겉으로는 밀치고 때리는 거친 모습을 보여도 사실 그 안엔 여린 마음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해요. 상처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지키는 아이라는 마음으로요.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곧 다른 사람을 지키는 마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배워가는 것 같아요. 관객분들도 나의 관심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사랑에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Chapter 3. 무대 밖의 한 사람으로서
성격, 습관, 가치관 등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해시태그를 알려주세요.
- 신경혜
- 주위에서 저더러 뽀로로의 '루피'를 닮았다고 해서 루피 인형 선물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이제 '잔망 루피'는 아니고 '중년 루피' 정도?
- 권슬아
- 섬세하고 다정한 성격도 루피랑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선생님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소녀'예요. 웃을 때 소녀같이 웃으시고, 순수함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 신경혜
- '소년'은 많이 들어봤는데, 소녀라니. 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슬아 배우의 해시태그는 뭔가요?
- 권슬아
- 단단함, K장녀? 사실 원래부터 단단한 사람은 아닌데, 추구미를 따라서 그렇게 굴다 보니 점점 단단해져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집에서 장녀라서 그렇기도 하고요.
- 신경혜
-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타고난 것처럼 아주 똑 부러지고 자기만의 단단한 심지를 지닌 친구예요. 보여주고 싶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거라면 더 대단한 거죠.
요즘 가장 빠져 있는 최애나 알고리즘이 있다면요?
- 신경혜
- 요즘은 운동에 빠져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껴서 웨이트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갱년기가 오면서 살기 위해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재미가 붙어서 아침 루틴이 됐어요. 무게를 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더라고요.
- 권슬아
- 대단하세요. 저는 운동은 안 하면서 건강, 면역 이런 데 관심은 많아서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영양제를 잘 챙겨 먹어요. 그리고 운동은 보는 걸 더 좋아해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못 본 야구 경기 하이라이트부터 챙겨볼 정도였는데, 요즘은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안 좋아서 잘 안 봐요.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 신경혜
- '지금도 충분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어릴 땐 부족함을 느끼는 시간이 더 많잖아요. 저도 슬아 나이 때는 늘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안달복달했거든요. 그때는 주위 선배들이 괜찮다고 해주셔도 잘 안 들렸는데, 지금 제가 그 나이대를 살아보니 슬아 배우는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반짝인다는 걸 알겠어요. 지금도 정말 잘하고 있고,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응원해 주고 싶어요.
- 권슬아
- 저한테 선생님은 빅애니 그 자체입니다. 항상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기다려주시거든요. 그게 마음에 안정감을 주기도 하고, 이렇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도 생겨요. 늘 소녀처럼 웃으면서 좋은 얘기들을 많이 해주셔서 항상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