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 대한 새삼스러운 질문들] - 두 번째 이야기
모든 연극엔 스토리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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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발극장 <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 ⓒ옥상훈
00. 책으로 배운 연극
1970~80년대 태어나 80-90년대에 중고등학교에 다닌 분들이라면, 분명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접했던 희곡 한두 편쯤이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헌데 당시 교과서에 실린 희곡들은 대개, 이미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해방 직후의 근대극 작품들이었죠. 여기서 그 의의를 논해보자는 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연극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어 보여서요. 우리에게 연극이란 곧 장막의 사실주의 희곡을 기반으로 한 무언가를 뜻했으니까요. 그 와중에도 우리는 희곡이 연극의 3요소에 들어가는지 4요소에 들어가는지 매번 헷갈려해야만 했고, 희곡의 3요소가 무엇무엇무엇인지를 빈틈없이 암기해야만 했었죠.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든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이외에도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와 같은 것들을 학습하며 이야기하기 혹은 이야기 만들기를 위한 기초 체력을 차분차분 다져왔습니다. 국어 교과목을 좋아했는지, 혹은 글쓰기를 잘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저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는 데 익숙하게 길들여졌던 거죠.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희곡을 ‘읽었습니다.’ 아, 물론 기억 한편에는 이런 것도 있긴 합니다. 국어 시간에 희곡의 인물들을 여럿이 나누어 읽으면서 나름의 연기를 뽐냈던 건 몹시 유쾌하고도 흥분되는 일이었거든요. 맞습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연극을 ‘연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책으로 배운 연극입니다.
01. ‘스토리’의 정체를 찾아서
그래서인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모든 연극에 ‘스토리’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네,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스토리’라는 말을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 혹은 서사나 줄거리 같은 말로 바꿔볼까요? 물론 엄정하게 따지자면 이것들은 제각각 그 의미와 심급이 다른 개념들일 테지만, 여기서는 일단, 그냥 넘어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다른 개념들이 만나는 지점, 그 교집합을 작정하고 파헤쳐 보는 것이, 바로 웹진 [연극in] 편집부가 저에게 전달한 미션이자, 제가 써야 할 글의 핵심이기 때문인데요. 이런 종류의 질문을 품게 만드는 연극이 최근 확실히 늘어가고 있는 추세인가 봅니다. 그리하여, “네, 있습니다”라는 저의 단정적인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셨을지 모를 독자들을 위해, 지난해 공연된 몇몇 작품들을 구체적 사례로 들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고른 작품은,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상상만발극장 <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 크리에이티브 바키 <비포 애프터> 세 개인데요. ‘스토리’라는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연극은 너무나도 많고 많아, 동시대 연극의 양상을 증명하는 여러 지표 중 하나를 빌려볼 작정입니다. 이상 세 작품은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2015 올해의 연극 베스트3’인데, 마침 이들이 매우 다른 층위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거든요.
(재)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02. 이것이 갈등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이 작품은 중국 고전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기군상의 「조씨고아」라는 잡극을 그 원작으로 합니다. ‘스토리’는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춘추 시기 진나라에 도안고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충신 조순에게 원한을 갖고 그 일족 300여 명을 몰살시켰죠. 이러한 불의를 좌시할 수 없었던 의인들은 자기 자신과 그 자식까지 희생시키면서 마지막 남은 조순의 혈육을 지켜냅니다. 그렇게 절치부심의 세월이 흘러 20년 만에 복수는 성공하게 되죠. 이야기는 복수를 향해있는 주인공 인물을 따라 흘러갑니다. 명백한 악인과 선인, 그리고 해소되어야 할 갈등이 있으니 여기서의 ‘스토리’란 그것을 선명히 간추리는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고 그 원작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희곡의 모양새를 갖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국립극단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도 고선웅 연출이 ‘각색’을 한 버전이죠. 공연이 올라갔을 무렵 고선웅 연출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복수가 꼭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각색과 연출 의도에 맞춰 원작이 보다 세밀하게 재배치되고 재조직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통하구나”라고 얘기하는 것과 “다지고 다져 놈을 한 덩어리 육젓을 만든다 해도, 내 가슴 가득한 울분은 삭일 수가 없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그 메시지가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스토리’를 선명히 드러내는 데 기여하는 것이 비단 대사의 내용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다시 한 번 책으로 배운 연극을 떠올려볼까요. 흔히 대사의 3요소라 일컬어지는 독백과 방백과 대화는, 대개 인물의 관계나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매우 다른 양상으로 가시화합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유연하게 맞물리면서 그 비극성이 한층 부각되었지요. 인물들은 스스로의 결의를 다질 때는 혼잣말을 하지만,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할 때는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고, 진실을 밝혀야 할 시점에는 서로 묻고 답하며 저간의 사정을 폭로해나갑니다. 요컨대, 배우들이 ‘누구를 향해 말하는지’가 그 연극의 ‘스토리’를 구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요.
이에 더해 배우들의 표정이나 손짓 하나, 그리고 음악과 조명, 무대 세트, 심지어는 인물들이 몇 발자국 거리에 서있는지조차도 ‘스토리’를 돕거나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연출의 역할인 셈이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과 같이 ‘스토리’가 간단명료한 작품에서는 이러한 모든 연극적 요소를 활용해 그 갈등을 온전히 전경화하는 것이 연출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갈등 구조가 명확하면 할수록 연극은 성공적이죠. 현장의 다양한 연극들을 일반화하는 우를 범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주인공 인물이 중심 갈등을 풀어나가는 희곡을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렇게 ‘스토리’를 조직합니다.
상상만발극장 <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 ⓒ옥상훈
03. 확정적 서사는 가라 <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
극장에 들어서면 공간 전체에 의자들이 열 맞춰 늘어서 있습니다. 무대도 객석도 따로 존재하지 않으니 어느 방향을 보고 앉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최대한 편할 것 같은(?) 자리를 골라봅니다. 이내 공연이 시작되고, 배우들이 빈 의자에 가서 앉는가 싶더니 의자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말을 합니다. 어떤 것은 명백히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 때론 강의처럼 들리는 대사들도 있습니다. 무대 세트가 없으니 인물들이 어떤 장소에 와있는 것인지 그들의 말을 통해 추론할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그들이 직면해 있는 현실에 대한 ‘명백한’ 단서들을 포착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연극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요.
<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은 매우 의도적으로, 관객 스스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스토리’를 제시합니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박해성 연출가에게 물으니, 확정적인 감정이나 메시지,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 굉장히 비연극적이라 느껴져 이러한 작업을 시도했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서사가 없는 연극이고, 정교하게 말하자면 익숙하지 않은 방식의 서사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순간을 나열한 것인데, 그것이 비선형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다양한 서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서사를 만들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이 연극만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 공연에는 배우들이 구현해야 할 대본이 있습니다. 연극을 본다는 것이 곧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한다면, 이에 따라 대본의 이야기들 또한 응당 어떠한 ‘순서’에 의해 배치되고 조직되게 마련이지요. 이 작품의 경우, 이미지를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시키거나 인물이 가진 욕망의 템포를 조절하기 위해 장면을 전략적으로 구성합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순간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인지하면서도, 연극의 흐름에 감각을 내맡기고 그 이야기들의 퍼즐을 맞춰나가게 되는 것이죠. 관객의 자발적인 추정과 추론을 위해 대본의 지표들이 모종의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연극에서 ‘스토리’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단 하나의 첨예한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과연 ‘스토리’가 될 만한 것이 있기는 한 걸까요. 하지만 저는, 바로 저 배우들의 말 속에 ‘스토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명 글을 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며, 말을 하는 방식, 그러니까 배우들의 연기 또한 분명 그것을 연출한 사람이 전달하고 싶은 무언가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연극의 ‘스토리’는 관객들의 능동적 독해를 요구합니다. 연극이, 관객 각자가 자기만의 ‘스토리’를 찾아내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육성 프로그램 <비포 애프터>
04. 질문만 가져가세요 <비포 애프터>
매우 다른 모양새이긴 하지만 위의 두 공연들이, 한 명의 글쓴이가 공연을 위한 대본을 만들고, 어떤 식으로든 허구의 인물과 상황을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동궤에 놓여 있다면, <비포 애프터>의 ‘스토리’가 거주하는 영역은 그 경계가 사뭇 모호합니다.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따로 또 같이, 연극의 매 장면들을 구성했기 때문이지요. 이 연극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 개인이, 우리 사회가 겪어야 했던 ‘세월호’라는 사건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공부하고 고백하는 과정들을 담아냅니다. 실제로 공연 프로그램북에서 이경성 연출은 연극 <비포 애프터>를 ‘삶 연습의 일환’이라 얘기하고 있지요.
배우 각자가 자기 이야기를 펼쳐놓기 때문에 시점도 사건도 하나일 수 없으며, 선형적 ‘스토리’ 또한 만들어질리 만무하겠죠. 극장 비상탈출 매뉴얼 안내로부터, 그날의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일상,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했던 순간, 국가 권력의 실체를 파고드는 것과 사고 당시를 재연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연극은 앞으로 전개될 것들에 대한 예측을 불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구성하는 모든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기능해, 그 어떠한 장면도 홀로 자족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죠. 아무런 친연관계도 없어 보이는 장면들은 그렇게 맥락을 형성하고 결국 이 연극이 던지려 했던 질문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연극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대개 이러한 작업은 참여자 모두가 동등한 정도로 기여하는 장기간 협업을 전제합니다. <비포 애프터> 역시 3개월이나 되는 워크숍과 리서치를 거쳤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실제 공연에는 쓰이지도 못한 채 버려져야 했을지 괜스레 아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요. 내친 김에,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연극을 만들었는지 프로그램북에 실린 연출가 인터뷰를 좀 더 꼼꼼히 파고들어가 볼까요. “대본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큰 공포로 다가오죠. 막막해서 뭐라도 하려고 세미나도 하고 워크숍도 하는 거예요. 최소한의 진정성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도록 토대라도 만들기 위해서요.”
“연극을 하는 것이 공적인 장소에서 발화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해요. […] 다양한 시각이 드러나는 극을 만들고 싶은데 딜레마에 빠지곤 해요.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려면 결국에는 이야기들을 어떤 형식으로 모아야 하거든요.” 이와 같은 언급은 이러한 연극을 만드는 일의 난맥을 몹시 투명하게 노정합니다. 결국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가려내기 위한 틀을 찾는 일이야말로 ‘스토리’의 뼈대를 세우는 일이 될 테니까요. 무엇보다 이 연극의 가장 큰 미덕은 무언가를 섣부르게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연극의 ‘스토리’란 관객을 각자의 사유로 인도하는 질문 그 자체가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05. 그래서 연극입니다
이상, 조금은 억지스럽게 모든 연극에 ‘스토리’라는 레이블을 갖다 붙일 수 있다고 성글고 성근 사견들을 풀어놓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기실 그것이 ‘스토리’라는 말로 설명되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별무소용 아닌가 싶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연극’이라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희곡으로부터 이미 너무나 멀어진, 그 모든 다양한 형식의 대본으로 우리는 연극을 만듭니다. ㅡ물론, 모든 연극의 대본이 대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지문이나 설명만으로 된 대본도 있을 수 있겠지요ㅡ 그리고 그 대본 안에는 만드는 이가 겨냥한 무언가가 반드시 들어있게 마련이지요. 이 시대의 연극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들어내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고, 근원적이고 본유적인 주제를 통해 일부러 사유를 교란시키는 경우도 있으며, 실제 벌어진 일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연극’을 접했다고 부디 당황하지 마세요. 각자의 방식으로 연극을 만날 수 있으면 장땡(!)이니, 어렵다 느끼거나 내가 틀리게 본 건 아닌가, 움츠러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그럴 땐 이런 연극도 있더라고 주변에 소문내세요.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보고 연극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시길 추천합니다. 앞으로도 연극은 계속해서 자기 변신을 거듭할 테니,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연극’에 노출되는 건 정말로 시간문제거든요. 아, 물론 교과서에서 배운 희곡을 기반으로 한 연극들도 당연히 계속되겠지요. 마지막으로 교과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희곡이 연극의 몇 대 요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관객이 거기 들어간다는 건 명확하거든요. 연극은 관객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고, 그게 바로 연극입니다.
[사진: 각 극단(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