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 대한 새삼스러운 질문들] - 여섯 번째 이야기
왜 극장이 아니라 거리에서도 공연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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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건물에서 식판을 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렬로 걸어옵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당황하기도 하다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에 깜짝 놀라기도 하며 거리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멈춰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요양원에서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입니다. 우연히 열린 식당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식판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하다 마침내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식판을 내던지고 구호를 외친 후 차량을 탈취하여 유유히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탈출: 비상구(Echappees Belles: Issue de Secours)> ⓒ하이서울페스티벌
이것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면에서 본 듯한 노인문제를 다루는 신문기사도 아닙니다. 이것은 작년에 서울거리예술축제(舊 하이서울페스티벌) 에서 공연된 거리극의 장면입니다. 이 공연은 프랑스의 거리극단체인 컴퍼니 아도크(Compagnie Adhok)가 프랑스와 한국의 원로배우들과 함께 만든 거리극 <아름다운 탈출: 비상구(Echappees Belles: Issue de Secours)>입니다. 무대는 극장이 아니라,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부터 시작되어 덕수궁 돌담길까지 거리를 이동하며 진행되었고, 다음날에는 청계천 광통교에서 시작되어 청계천로를 따라 이동하며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관객들도 배우들을 따라 이동하며 관람합니다.
거리는 극장과는 다른 제한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날씨에 그대로 노출된 상태로, 거리의 소음과 싸우며, 거리의 본래의 기능과 목적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민원에 대응하며, 거리에서 공연을 합니다. 왜 거리예술가들은 극장이 아니라 거리에서 공연을 할까요?
세 가지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거리’라는 특정장소의 물리적 특성을 작품에 활용해야 하거나, 또는 그 장소의 사회문화적 의미나 역사와 같은 장소성을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서, 즉 장소특정형(site-specific) 연극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제한된 극장의 객석보다 더 많은(또는 더 가까운)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서입니다. 티켓을 팔지 않아도 되는, 대부분 무료라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세 번째는 실내극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장소로 ‘거리’가 채택됩니다. 이 경우 ‘거리’는 반드시 야외공간만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실내극장이 아닌 다양한 종류의 실내공간(카페, 로비, 기차역 등등의 공간)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즉, ‘거리’는 공공공간으로서의 거리뿐만 아니라 제도나 고정관념의 탈피와 저항, 새로운 시도로서의 대안적인 공간까지 포함됩니다.
서울거리예술축제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도심 지역 공공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축제입니다. 2003년 하이서울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거리극을 축제 프로그램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광장과 거리, 공원, 골목, 미술관, 카페, 건물외벽, 옥상, 기차역 등이 공연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심지어 마을 전체의 장소성이 공연을 위해 활용되기도 합니다. 다음에 소개할 몇 개의 작품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거리예술축제에서 공연한 작품들 중에서 작품의 내용과 의도가 그 장소의 장소성과 잘 어울리며, 또는 장소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효과적으로 구현되었다고 회자되었던 공연들입니다.
<빈 종이(Blank Page)> ⓒ하이서울페스티벌
도시의 불빛, 번쩍이는 광고판과의 한판 승부,
룩 아모로스(Luc Amoros)의 <빈 종이(Blank Page)>(하이서울페스티벌2013)
2013년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특수한 투명필름으로 제작된 9개의 대형 캔버스에 6명의 예술가들이 그림과 글자를 그리고 지우고, 필름을 떼어내어 버리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는 형태의 공연입니다. 이 예술가들은 그림을 통하여 문명의 탄생과 전쟁의 폭력성, 자본주의 하에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예술작품들에 관하여 노래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오직 그들이 노래하고, 그릴 때만 존재한다며, 예술의 유한함과 즉각성을 반복적인 그리기와 떼어버리기의 퍼포먼스로 풍자합니다. 이러한 작품의 성격은 그 내용 자체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서울광장을 둘러싼 고층빌딩으로부터 새어나온 불빛들, 특히 번쩍이는 광고판들에 던지는 일종의 도전으로 읽혀집니다.
숨막히는 도시의 빌딩숲 속, 나약한 인간의 몸이 보여주는 놀랄만한 가능성
그래비티 & 아더 미스(Gravity & Other Myths)의 <심플 스페이스(Simple Space)> (하이서울페스티벌2014)
이 공연은 서울광장에서 을지로의 고층 빌딩숲을 배경으로 하여 공연되었습니다. 호주의 촉망받는 아크로바틱 공연단체로 물리적 한계를 극복한 인간의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움직임이 돋보였고 수많은 관객들의 호응과 박수갈채를 받았던 공연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텀블링과 서로의 몸에 올라서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움직이는 배우들의 몸은 배경으로 보이는 거대한 도시의 스펙터클과 대조되어 더욱 더 나약하게, 그러나 한계를 넘어서는 놀라운 아크로바틱 움직임은 더욱 더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심플 스페이스(Simple Space)> ⓒ하이서울페스티벌
자동차로부터 해방된 도로 위에서 이 도시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화해의 여정
엑스니일로(Ex Nihilo)의 <도시의 여정(Trajets de Ville)>(하이서울페스티벌2013)
엑스니일로의 <도시의 여정> 공연은 차량통행이 통제된 상태의 세종대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가장 중심거리인 이 장소는 비인간적인 공간이 되어버린 도시의 거리, 외면만이 존재하는 거리의 행인들, 서로 무심한 행인들이 사소한 계기로 서로 충돌하고 공격하는 행위를 묘사한 이 작품에 적합한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차량이 통제된 상태의 도로에 앉아서 비일상적인 해방감을 맛보며 관람하는 이 공연은 충돌하고 외면하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화해, 결국엔 도시와 화해하는 여정으로 끝맺음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도시의 여정(Trajets de Ville)> ⓒ하이서울페스티벌
기차역의 낯선 이민자들에게서 비로소 느끼는 도시의 따뜻함
캄차카씨어터(Kamchatka Theatre)의 <이민자들(Kamchatka)>(하이서울페스티벌2015)
스페인의 거리극단체 캄차카씨어터의 <이민자들> 공연은 2015년 서울역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익숙한 도시의 공간에 갑자기 나타난 이민자들을 통하여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새롭게 인식하고 낯선 대상을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에 대하여 따뜻한 시선으로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즉흥적으로 장면을 만들어가는 이 작품은 서울역이라는 특유의 장소성 - 이동하는 사람들이 밀집된 곳, 떠나는 사람들과 새롭게 도시에 들어오는 사람들, 노숙자들 - 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장면을 만들고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배우들은 관객들의 현실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서울역을 방문한 관객들은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자신의 인생의 순간을 잠시 함께 합니다.
<이민자들(Kamchatka)> ⓒ하이서울페스티벌
이처럼 공공공간으로서 거리가 가지는 현실 세계의 맥락은 작품의 내용과 의도에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리얼리티를 부여하며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극대화합니다. 또한 공연이 이루어진 거리 역시 그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미학적 의미를 가지고 재인식됩니다. 열린 공간으로서의 거리는 관객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제공합니다. 관객은 작품의 텍스트를 그대로 수용하여 관람하기 보다는, 작품이 공연되는 공간이 가지는 사회적 상황과 연결하여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리극의 적극적이며 열린 관람 구조는 예술가와 관객의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는, 거리극을 하려는 예술가는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리는 공공의 공간으로서 개인이 자신만의 영역을 벗어나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또한 예술가들에겐 정형화된 실내극장을 벗어난 혁신의 공간이며, 관객과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공연이 벌어졌던 거리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관객들이 인식하는 거리는 이미 예전의 거리가 아닌 셈이죠.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경험과 기억으로 그 도시를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연극을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