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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3040극단] 두 번째 이야기

하나의 유연한 뿌리가 향이 다른 열매를 만든다: 극단 76단

김슬기_공연저술가
92호 2016.05.26
일시: 2016년 5월 11일
장소: 서울연극센터 아카데미룸
사회: 박해성
참석: 기국서, 김낙형, 임정혁, 이은준, 최윤우
구성 및 편집: 김슬기

일시: 2016년 5월 11일
장소: 서울연극센터 아카데미룸
사회: 박해성
참석: 기국서, 김낙형, 임정혁, 이은준, 최윤우
구성 및 편집: 김슬기

* 극단 76단은 1976년 신촌의 한 시장 골목 지하 소극장에서 몇몇 뜻 맞는 젊은 연극인들이 시작한 동인제 극단으로, 올해 창단 40주년을 맞이했다. 페터 한트케의 <관객 모독>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하고 최근까지 다양한 방식의 레퍼토리로 선보였으며, 1980년대에는 시대와 정치를 소재로 한 일련의 <햄릿> 시리즈를 제작했고, 1990년대에는 주로 현실의 어두운 단면과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창작극으로 만들어 발표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76단에서 활동하던 임정혁이 극단 동숭무대를, 김낙형이 극단 죽죽을, 박근형이 극단 골목길을 창단했다. 지난 4월부터 시작한 40주년 기념 공연 <리어의 역>,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붉은 매매>가 오는 6월 12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박해성

박해성
웹진 「연극 in」에서 새로운 기획 좌담으로, 창단 30, 40주년이 된 극단들을 모시고 동시대 한국연극의 자장 안에서 오늘날 극단의 위상을 같이 얘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좌담으로 극단 76단의 뿌리와 그간의 이야기들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연출하는 박해성이라고 합니다.
먼저 76단 기국서 연출님 자리해주셨고요. 76단에서 함께 작업하시다가 새로 극단을 꾸리신 극단 죽죽의 김낙형 연출님, 극단 동숭무대 임정혁 선생님 모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자리엔 함께 하지 못하셨지만, 역시나 76단 출신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연출님과 함께 작업하셨던 극단 파수꾼의 이은준 연출님 나와 주셨고요. 웹진 「연극 in」최윤우 편집장님이 같이 얘기 나눠주기로 하셨습니다.

극단의 자유가 또 다른 극단이 되기까지

박해성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기국서 선생님 처음 76단 작업을 시작하셨을 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셨는지, 간단히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1976년에 창단했다고 해서 극단 이름이 76단이 된 거잖아요?
기국서
창단할 때 내가 같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요. 김태원 씨, 이정갑 씨, 그리고 또 다른 몇몇과 내 동생 기주봉이 함께 창단을 했어요. 동생이 어느 날 그냥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연극을 하리라고 생각은 안했지만 나도 대학 때 아마추어 학생극을 했기 때문에 연극에 관심은 있어서 한번 가 봤어요. 그때 가서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거죠(웃음). 그런데 연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니면서도 만약에 연극을 한다면 어느 극단을 택할 것이냐 고민은 했던 것 같아요.
박해성
그때 76단은 어떤 분위기였나요? 거기서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이유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기국서
우선 76이라는 이름이 좋았어요. 예를 들어 민중, 실험 같은 이름을 들으면 뭔가 특징이 그려지잖아요. 그럼 그런 연극만 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76은 열려 있는 느낌이었어요. 가봤더니 단원들은 다 내 또래였고 신촌 시장 골목 안에 작은 소극장이 있었는데 유신시절이니까 뭔가 독립운동 하는 분위기였죠. 대본을 가리방 등사기로 만들고 포스터도 거기서 찍고, 그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이끌렸던 것 같아요.
요새 젊은 극단이나 이전에 생겨난 극단들도 다 비슷하게 꾸려졌겠죠. 연극의 길로 들어서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아요. 기성의 극단에 오디션을 보거나 소개를 받아서 입단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거고, 그렇지 않다면 동지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서 새로 극단을 만들어보는 경우일 텐데요. 우리 극단 경우는 두 번째, 동인제에 해당했던 거예요.
박해성
여기 계신 연출님들은 76단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지금 기국서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창단 이래 76단은 줄곧 그 자유로움과 실험 정신으로 주목을 받아왔는데요. 각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임정혁
서라벌 고등학교 연극부 할 때 지도교사로 오셨던 기주봉 선생님을 처음 뵀어요. 그때 청소년연극제에 참여하고 76단까지 오게 된 거죠. 76단에서 10년 동안 배우를 했어요. 저는 지금도 76의 아들이 동숭무대라고 말하는데, 그때도 연극하는 동료들하고 만나면 우리 극단이 최고라고 늘 싸웠죠. 굉장히 자유로운 느낌이었어요. 10년쯤 되었을 때, 기국서 선생님하고 북한산 등반을 하다가 극단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너는 들이받을 수 있잖아, 한 번 해봐”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 당시에 극단 대표로서는 최연소였다고 하더라고요.
박해성
동숭무대가 독립을 선언할 때 기국서 선생님은 어떤 마음이셨어요?
기국서
우리 극단은 분위기뿐만 아니라 체제 자체가 좀 자유로웠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 들어오고 나가는 데 있어서 일종의 삼투압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해야 하나요. 창단한다는 건 야심이니 존중하고 박수 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박해성
그래서인지 어떻게 보면 아들 극단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극단이 76단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김낙형 연출님은 어떤 기억을 갖고 계신가요?

김낙형

김낙형
저도 배우로 출발했어요. 기국서 선생님이 창무포스트극장에서 <작란>(1993)이라는 공연을 하실 때 출연했었죠. 당시엔 대본을 손으로 쓰던 시절이고 편지지에 복사를 해서 주셨는데 대사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시 같았죠. 혼란스럽긴 했지만 일반 연극을 하는 것과 다른 느낌이었어요. 배우가 이런 능력도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죠. 그땐 연출가나 작가가 아니고 배우였는데도 불구하고 대본이 정말 좋구나 생각했어요.
대학로에 연습실이 많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 서초동 쪽에서 연습했는데 눈 뜨면 신세계에 와있는 것 같았어요. 집시의 시간처럼 시간도 고이고 장소도 섞여 있어서 마법이 펼쳐진 느낌이었죠. 극단의 작업도 훌륭했지만 같이 하시는 한 분 한 분의 캐릭터와 인연들이 정말 소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할 때도 아니고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해 있을 때도 아닌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면서 연극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 프랑스에서 설치미술 하고 오신 분이 기국서 선생님하고 같이 작업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도 너무 자유로워 보였고요. 극단에 사무실도 없었지만 사람들 자체가 사무실이었죠.
박해성
기국서 선생님이 보시기에 김낙형은 어떤 배우였나요?
기국서
다른 데서도 많이 얘기하지만 김낙형이라는 연극인은 배우도 계속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여전히 생각해요. 아쉽고 아까운 사람이죠. 맨 처음에 나랑 시작했던 인연은 연출가협회에서 하는 연출가전 같은 프로그램이었는데, <한여름 밤의 꿈>을 세 팀이 공연하는 거였어요. 김낙형이 오디션을 보러 와서 보텀 역을 연기하는데 정말 한국식 보텀 같았죠. 그 다음에 <리어왕> 할 때는 오즈왈드를 했는데 그때도 굉장히 독특하게 연기를 했어요. 돌아가신 연극 평론가 한상철 선생님께서 저 배우가 누구냐고 물어보셨을 정도로 재밌는 연기를 했고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죠. 지금은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하지만 연기도 계속 하면 어떨까 싶어요.
임정혁
김낙형 연출이 긴 대사를 맡으면 완전히 자기 옷으로 만들어버리는 연기를 보여주죠.
김낙형
예술의전당에서 <리어왕> 연습하는데 그때 장우재 연출이 각색을 도와주던 때라 저희 둘이 분장실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왕궁 장면에 사람이 필요하니까 나올 수 있는 사람 다 무대로 올라오라고 하셔서 둘이 나갔는데, 저희를 보시고선 왕궁 장면에 안 어울리는 사람은 나가! 하셨던 기억이 나요(웃음).
박해성
이은준 연출님은 어떠세요? 기국서 선생님하고 76단에서 같이 작업을 해보신 적이 있던가요?
이은준
저한테는 박근형 선생님이 스승님이시니까 기국서 선생님은 스승님의 스승님이신 거잖아요. 그렇게 보면 사실 저는 한 세대 아래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76단하고 정확하게 인연을 맺은 적은 없고요. 박근형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골목길이라는 단체가 없을 때였어요. 76단에서 활동하고 계실 때였죠.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 모두가 술을 좋아하고 노는 걸 좋아하지 않나, 싶고요(웃음). 저도 선생님들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76단이 동인제라고 말씀하셨는데 저 또한 그런 영향을 받아서 제 세대나 또래들하고 같이 극단을 꾸렸고요. 저 같은 경우는 공동창작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배우들에 기대서 연습하기도 하고요. 기국서 선생님하고 작업을 해보진 못했지만 이전에 놀러가서 디렉션하시는 걸 보고 굉장히 세심하게 보시는구나,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시대의 흐름과 극단의 변화

박해성
76단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각 극단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상황이 다 다를 텐데요. 여태까지는 한 뿌리에서 나온 공통점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동인제라는 게 예전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면, 요즘은 주로 프로젝트성 작업이 많다 보니 극단이라는 질서가 점점 해체되고 있기도 하고요.
기국서
우리나라의 경우 현장에서 활동하는 극단들을 보면 대체로 조직체 자체가 굉장히 느슨하다고 느껴요. 아마추어적이라는 거죠. 극단도 하나의 회사인데 그런 경영적인 태도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렇게 느슨한 것이 사람들을 모으는 힘도 되겠죠. 느슨한 결사는 자유로우니까 배짱이 맞고 미학이 통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제약이 없기 때문에 창조적인 생각들도 나올 수 있고요.
임정혁
동숭무대 이전에 76단에 대해 돌아보면 저는 시대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요. 우리가 흔히 20세기를 물고기자리, 21세기를 물병자리라고 애기하잖아요. 20세기에는 목이 말라서 물을 찾아다녀야 하니 예술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되죠. 그런데 21세기에는 물병이 옆에 있으니 물이 필요 없어요. 중요한 건 시대가 바뀐다는 거고 그 시대에 부응할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경영적인 게 중요한데 그걸 놓치면 무너지고 아니면 동인제 시스템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인 것 같아요.
김낙형
저는 혜화동1번지 3기 동인에서 극단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극단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 76단에 들어갔던 90년대 초반에는 작품 한두 개 하면 극단들이 다 망했거든요. 제작비를 책임져야 하고 작가나 연출가가 대본을 직접 써서 하려면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요. 앞 세대에 창작에 대한 열망이 막 열린 상태에서 우리 세대는 어떻게 보면 그 세례를 받은 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흐름을 따라가게 된 건데요. 보고 배운 건 장인적이고 수공업적인 거였는데 우리가 하려고 보니까 전문가가 되어야 했죠.
박해성
90년대 후반에 갑자기 전국에 연극영화 관련 학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잖아요. 그리고 전공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고요. 특정 미션을 훈련 받은 인력들이 현장에 나오면서 배우이자 작가인 것처럼,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기보다는 역할 분장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됐죠. 그런 분위기가 프로덕션 식으로 자기 일을 수행하고 빠지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이은준 연출님이 활동을 시작하던 시대가 전형적으로 그렇지 않았던가요?

이은준

이은준
저랑 비슷한 세대 같은 경우는 거의 전공자가 많죠. 그런데 학교에 전공이 생기고 제가 1기 입학생이어서 그랬는지, 혹은 예술대학이 아니라 종합대학이어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건 거의 이론이었어요. 현장은 극단에 와서 알았죠. 제가 보고 겪었던 건 극단의 단원들이 모든 일을 같이 해나가는 모습이었고요. 지금 저희 극단 같은 경우도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지는 않아요. 배우들이 기획일 하고, 출연 안하면 오퍼 하고요. 그런데 지금이 마케팅 시대인 건 분명합니다. 그걸 굉장히 잘하는 팀도 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저는 연극이 아날로그인데 그걸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해요. 실상 지금 대학로 현실은 극장 대관료나 비용 문제가 있으니 3주 이상 공연을 하기는 힘든 여건이잖아요. 대표이자 제작자로서 배우나 같이 있는 스태프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내가 빨리 유명한 연출가가 되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죠.
기국서
물론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해도 현실이 팍팍하니까 예전 같은 분위기에서 극단을 창단하고 운영하는 그룹이 점점 줄어갈 수밖에 없겠죠. 그럼에도 몇몇 극단들은 정말 훌륭한 체제를 갖추고 있더라고요. 미학적으로도 단결이 되고 경영적인 문제도 꼼꼼히 챙기면서 흥행도 모범적으로 해가는 극단들이 있는 거죠. 그런 극단들이 바람직하게 오랫동안 공연할 수 있는 토양을 갖게 된다면 단원들도 쉽사리 이합집산 안하고 더 좋은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한국연극계에서 극단이 처한 상황을 그렇게 우울하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박해성
제가 얼마 전 선돌극장에서 <리어의 역>을 봤는데 극장가는 길에 보니 반대편 게릴라 극장의 연희단거리패 공연에 관객들이 줄을 어마어마하게 서있더라고요. 선돌극장에 도착해보니 거기도 마찬가지였죠. 기국서 선생님, 이윤택 선생님 두 분 모두 여전히 관객들을 줄 세우는 현역 연출이시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한국연극계가 중대형극장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된 대형 프로덕션들로 분위기가 모아지고 있는 추세잖아요. 심지어는 돈 안 드는 홍보수단인 인터넷 홍보마저도 인력을 투입해버리니 규모가 달라지고요. 극단 작업은 주목도가 상대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죠. 각 극단의 연출님들이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하고 계신지 노하우나 고충을 들어보고 싶어요.

임정혁

임정혁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모르고 시작했죠. 어린 나이에 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경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40명 정도 단원들이 있는데, 극단 대표는 예술가가 아니고 경영자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연출도 하고 싶고 출연도 하고 싶은 목마름, 그걸 참아야 대표를 할 수 있구나, 생각하죠. 1년에 한 편 국가 기금을 받아서 하면 그래도 좀 나아요. 전문인력을 섭외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단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작업을 쉴 수가 없잖아요. 그 단원들이 계속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연극과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구해준다든지, 조명 작업은 준전문가 정도로 할 수 있게 가르친다든지 그런 일들을 하려고 해요.
김낙형
처음에는 공공극장의 사업들에서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연출가나 몇몇 배우만 가서 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남아있는 것도 그렇고, 다시 대학로로 돌아왔을 때 적응하는 게 쉽지 않기도 했죠. 예전에는 동료 극단들이 어떤 작업을 하는지 절로 파악됐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연극을 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도 있지만 동료의식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든 일이 아닐까 싶어요. 동료는 없으면서 관객은 냉정한 시대인 거죠.
하지만 저는 연극이 가난할지 몰라도 지금이 대단히 부흥기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이 많이 들고 흥행도 되면 좋겠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면 자기 비전대로 연극적인 것을 밀고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저런 걱정 하면서 아무것도 못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자는 거죠. 공공극장과 뒤섞이거나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극단이 해오던 걸 할 수 있어야 해요. 최근 이런저런 극단들이 초창기에 했던 공동작업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는데, 대학로에서는 어떤 방식이든 뒤섞이지 않는 극단의 행보가 더 귀중한 거고 그것만이 답이 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76단의 실험 그리고 열린 미래

최윤우
아마도 1981년에 지금의 아르코 예술극장이 대학로에 들어오고 이후 다양한 극단들이 생겨나면서 극단의 창단과 한국연극의 발전이 궤를 같이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지 몰라도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실주의를 보려면 어느 극단 공연을 봐라, 번역극을 보려면 어느 극장에 가라, 그런 경향들이 있었거든요. 76단은 처음에 어떤 것들을 지향하셨나요? 극단들이 매해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있는데 40년이나 된 극단의 공력이 창작 활동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배경이 궁금합니다. 창단 때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지금도 여전히 가져오고 계신지, 혹 안 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기국서

기국서
제 생각에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어떤 연극을 하겠다, 이런 극단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연우무대가 창작극만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지켜왔는데 참으로 한국연극계의 보배 같은 극단이죠. 그런데 대체로 많은 극단들이 그런 슬로건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요. 20대 때 경도된 감각 같은 추상적인 선언문은 있었죠. 진정한 꿈을 꾸는 사람은 헛된 꿈을 꾸지 않는 법이다, 그런 가슴 뛰게 하는 선언이 있었던 것 같아요.
76단은 작업을 하다 보니 실험극으로 자꾸 자리매김이 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예술계에 실험이라는 게 일종의 유행이었거든요. 연극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등 모든 장르들이 유럽 혹은 서구의 새로운 사조들을 받아들이던 시기였죠. 70년대에 활동을 시작했던 우리 또래 사람들의 공통적인 태도는 그 윗세대에 대한 반감이었어요. 아주 고루하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저뿐만 아니라 대개, 엄격한 리얼리즘 같은 거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자기 캐릭터들을 설정했어요.
김낙형
돌이켜 생각해보면 76단에서 배우로 작품을 하면서 아주 좋은 순간들이 많았어요. 퍼포밍의 개념을 그때 제대로 알지 않았나 싶어요. 희곡이 해체되고, 무대 위의 대사도 육체도 드라마 공연들과는 다른 접근이었죠. 공간에 어떻게 퍼포밍이 침투하는지, 그 시절에 다 배웠어요. 부러울 게 없었죠. 원한다면 언제든지 잘 짜인 극도 할 수 있었고요. 사회적인 문제들을 얘기하고 그걸 연극으로 담아내는데, 그게 설명할 수 없이 번져가는 게 보였죠. 사회적으로 정확하면서 냉철한 연극도 있었고 어떨 때는 따뜻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극도 있었고, 그런 게 다양하게 형성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보니 저도 배우로서 성장하면서 공연의 다양성이나 한국에는 이르다 싶을 정도의 극단 운영 방식, 혹은 연극 형태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극단 죽죽을 만들게 되고 그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생각하고요.
기국서
사실 76단 같은 경우 초창기 멤버들이 사라지면서 내가 극단을 떠안게 되고 그 이후에는 내 취향에 맞춰 작품이 나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저 극단은 실험극을 하나 보다 인식이 된 거고요. 나 같은 경우는 애써서 실험을 추구하지는 않았어요. 어떤 형식이든지 재밌으면 하는 거고요. 다만 젊었을 때는 남들보다 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뭘 해도 그런 경향은 있었겠지만, 오히려 요즘은 나이 드니까 리얼리즘이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좋은 리얼리즘을 보면 한 사람의 세계가 달라질 수도 있구나, 싶어요.
박해성
선생님은 지금 공연되고 있는 젊은 창작자들의 실험 같은 걸 접하시면 어떠세요?
기국서
대단히 부럽죠.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예를 들어 동물들이 주인공이 되는 연극을 우연히 봤는데 그걸 만들기 위해 7개월을 연습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어떻게 그런 걸 하겠어요. 연극이 그런 정열의 소산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은준
저 같은 경우, 아직 젊어서인지 꿈이 커서인지 혹은 이기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 제가 이뤄야 할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마음이 커요. 내가 잘하고 있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나, 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런 게 가장 큰 고민이에요. 지금도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연극에 관심을 가질까, 어떻게 하면 관객이 늘어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고요. 모든 세대의 선생님들, 선배님들도 이런 생각들을 다 하셨겠지요.
기국서
그런 건 젊은 작업자의 특권인 것 같아요. 숙명이 아니라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니까(웃음).
이은준
오히려 연극을 하면서 콤플렉스가 자꾸 생기는 거예요. 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지, 왜 내가 하는 건 이렇게 단순하지, 하고요.
기국서
작품을 할 때는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 해요.
임정혁
최근에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지고 나서 바둑 두시는 분한테 들은 얘기가 있는데, 그게 굉장히 위로가 됐어요. 이제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연극밖에 없다,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박해성
네, 연극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우리가 다 같이 찾아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기국서 선생님, 앞으로의 작업에 계획이 있으신 걸로 들었는데 말씀 부탁드릴게요.
기국서
구체적인 걸 상정하지는 않았어요. 실은 76단의 초창기 멤버인 김태용 씨가 그런 말을 했었거든요. 76단의 숙명은 1999년에 끝나야 정당하다, 우리는 20세기의 4사분기만 책임진다, 라고요. 그런데 제가 그 이후로 16년을 더했잖아요. 내가 창단한 게 아니니까 난 책임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별로 무게를 안 느껴요(웃음). 물론 그때도 25년 뒤에 끝내겠다는 걸 믿지도 않았지만 저절로 지금까지 하게 된 거죠.
작년에 나는 76단을 떠나서 자유롭게 혼자 해보겠다고 몇몇 가까운 사람들에게 얘기했어요. 현재는 동생이 대표인데, 젊은 사람들이 맡아서 끌고 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극단은 그들에게 맡기려고 해요. 극단을 마음으로 책임지고 해왔던 사람으로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그저 76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또 이 극단을 끌고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해성
경직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가능성을 열어두신 게 지금까지 76단이라는 극단이 계속 이어져올 수 있었던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차후에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더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도 하고요. 그런 영향을 받은 여러 극단들이 계속 공존하는 한국연극계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오늘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