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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극센터 ‘PLAY-UP 아카데미’ 극작수업 편 - ③ 극작가 고연옥

극작은 어떻게 수업될 수 있는가

홍지현
98호 2016.08.18
필자는 지금도 오만하고 독선적인 생물체지만, 사실 예전에는 조금 더 그랬다. 때로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귀신같이 스스로 정당화했다. 그래, 작가라면 자기 글을 믿어야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작가 본인도 믿어주지 않는 작품을 누가 믿어줄까? 그러니 필자는, 오만하고 독선적이면서 잔머리도 잘...

필자는 지금도 오만하고 독선적인 생물체지만, 사실 예전에는 조금 더 그랬다. 때로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귀신같이 스스로 정당화했다. 그래, 작가라면 자기 글을 믿어야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작가 본인도 믿어주지 않는 작품을 누가 믿어줄까? 그러니 필자는, 오만하고 독선적이면서 잔머리도 잘 굴러가는 생물체였던 셈이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던 와중에 우연히 서울연극센터에서 희곡창작워크숍을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극작 수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말이다. 서울연극센터가 어디였던가. 눈을 감고 떠올려보았다.

혜화역 1번 출구에 바로 맞붙은 건물. 서울연극센터는 오다가다 필자에게 무료카페 노릇을 톡톡히 해준 터였다. 급히 인쇄를 해야 할 때나 책을 빌려야 할 때 쉽게 빌릴 수 있는 멀티플렉스 공간. 그런데 거기에 2층이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사실 작년의 필자였다면 귀찮아서 지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재작년의 필자였다면, 쓸데없는 반발심 덕분에 지원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원했어도 떨어졌겠지만!) 그러나 단막에서 장막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극작가라는 자격요건을 읽었을 때, 장막극 없이 9년을 흘려보낸 올해의 필자는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마침 나를 평가해줄 선의의 제 3자들이 애타게 필요했던 참이었다.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화요일은 고연옥 작가, 목요일은 김은성 작가. 필자는 자연스럽게 화요일반을 선택하게 되었다. (김은성 작가도 물론 좋아하지만) 고연옥 작가를 좋아해왔기도 하거니와 마침 목요일 저녁에는 다른 일정이 있었다.
그렇게 대학에서 아예 다른 전공을 했던 필자는 난생 처음으로, 극작을 누군가로부터 수업 받게 되었다.

화·목요일반 통합으로 한 번의 오리엔테이션과 세 번의 특강을 거친 후부터는 각자의 반에서 수업을 받게 되는 일정이었다. (박상현, 윤한솔, 이진아, 이렇게 세 분의 문학적, 현장적, 학술적인 강의 또한 필자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에 감사드린다.)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 고연옥 선생님과, 8명의 난쟁이들. 우리는 열심히 통성명을 하고, 또 얼굴을 익혔다. 수업은 합평 형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형식이었지만, 그 또한 그냥 좋았다. 극작과를 나오진 않았지만 저들의 나의 교수님이고, 나의 동기들이려니.
여름이 다 지나기는커녕 아직도 폭염은 절정이지만, 올해 여름은 벌써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합평은 주로 한 번에 2, 3명 정도의 작가가 참여하기 때문에 8명인 우리는 돌아가면서 서로의 작품을 읽고 또 읽혔다. 3번의 합평과 즉흥극 시간, 필자는 마음으로 울었고, 비판받았고, 또한 따뜻한 공감과 지지를 양껏 받았다.

“모든 규칙을 깨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까지 극작을 하면서 느낀 것은, 어쩌면 그 동안의 시간들은 규칙을 재발견하기 위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거든요.”

명색이 ‘수업’이긴 하지만, 고연옥 선생님이 뭔가 공개적으로 필기를 하신 것은 딱 한 번이었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그리고 각 단계가 전체 작품에서 어떠한 방향성과 흐름을 지니고 있는지를 읽는 법. 어떤 극작법 책에도, 심지어 국어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인 기초 중의 기초. 그러나 기초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되는 법이다. 극적 규칙과 고연옥은 꽤 멀리 있는 단어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필자의 섣부른 고정관념일 뿐이었다. 필자는 조금 덜 오만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필자를 덜 오만하게, 더 겸손하게 해준 순간은 바로 합평 시간이었다. 어째서 더 훌륭하고 탁월한, 7명의 동료들이 아닌 필자에게 칼럼을 쓰라는 청탁이 오게 된 것인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필자가 가장 낙제생에 가깝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단 시놉시스를 가져와 함께 점검한 다음 초고에 착수하는 순서로 10주 간의 합평이 진행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단 한 번의 합평으로 시놉시스를 완성한 동료도 있었다. 두 번 가져와본 동료도 있었다. 그런데 필자는 무려 세 번을 가져오고도 지금 다른 시놉시스를 구상하고 있으니, 가장 뒤쳐져 있는 셈이다.
처음 어떤 작품(너무나 창피하기에 어떤 내용인지는 감히 말할 수 없다! 하하!)의 결말 없는 시놉시스를 한 번 가져와봤고, 애써 외면하려했던 문제점들은 낱낱이 파헤쳐졌다. 이유를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었던 필자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놉시스로 진행한 2번째, 3번째도 마찬가지.
합평이 이런 거였나. 필자가 회피했던 물음들을 그리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들을, 타인의 입을 통해 대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니 고연옥 선생님을 비롯한 일곱 명의 동료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었다. 끝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괴물이었으며 어떨 땐 나 자신이었고 가끔씩은, 안기고픈 천사이기도 했다. 또 다른 모습의 ‘나’가 되었다.
생가죽을 무두질을 하여 가죽 원단으로 만들고, 넣을 문양이 있다면 새겨 넣는다. 더 어울리는 색깔이 있다면 서로 염료를 추천해보기도 하고, 마침내 어떤 물건을 만들기로 결정했다면 고통스럽지만 목타로 바느질할 구멍을 뚫어야한다. 어떤 실로 어디와 어디를 이어 붙여 어떤 물건을 만들지는, 온전히 만드는 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글쓰기는 힘들면서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선생님 말씀마따나 이건 고통스러운 쾌감이 분명하다.

외부에서 연출과 배우 분들을 섭외하여 진행한 즉흥극도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필자의 시놉시스 속 등장인물들의 행동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하하) 이유로 진행된 일이었기 때문에, 동료들 보기에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한 공간과 그 안에서의 여러 가지의 설정을 준비해두고, 그 설정에 따라 달라지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미묘한 감정선을 지켜보는 것은 작가로서 귀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당연히 ‘아’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거나 ‘야’일 수도 있다는 것. 배우들이 짧은 시간 내에 한 인물을 구축해내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 개연성을 넘어선 핍진성의 가치. 커다란 자극이었다. 그 때의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녹화해두고 틈이 날 때마다 돌려보고 있다. 고연옥 선생님과 서울연극센터 김지우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그 ‘수업’에서 배운 것들은 지금도 필자 안에서 싹이 자라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자. 극작을 학교에서 전공하지는 않았던 자로서 필자는 극작 수업이 과연 어떤 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맨 처음엔 있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또 수업이란 무엇인가. 그 이전보다 이후가 나아졌어야 교육이고 또 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란 결국 내가 어떠한 관점으로 세상과 인간들을 보고 그리느냐, 더 나아가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러니 이렇게 질문을 바꿔볼 수 있겠다: 극작 수업을 통해서 필자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몇 번에 걸친 합평과 즉흥극 시간이 필자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날카로운 질문에 등골이 서늘해진 적이 있었어도? 각자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말로 전달하지/받지 못하여 이따금씩은 답답했어도 말이다.
필자의 답변은 당연히, 힘찬 ‘그럼요!’이다. 고연옥 선생님, 연극센터 김지우 선생님을 포함한 우리 8명이 함께였기에 안구는 20개요 뇌는 10명 분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재밌을 때는 함께 마음 놓고 깔깔거렸지만, 생각이 갈릴 때는 솔직한 의견 교환으로 서로를 존중했다. 그뿐 만인가? 그러고 나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또, 얼마나 꿀맛 같던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수업 받을 수 있을까. 어떤 종류의 인생 수업이든, 모든 이에게 수업 전보다 수업 이후가 나아질 거라고 확신을 줄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 수업이라면 하나마나한 이야기일 게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존경할 만한 선배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라면, 그들의 시야를 빌려 우리는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오늘도 산다. 그리고 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사진: 서울연극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