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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국립극단 <토막>

헬조선과 나와 토막

정진세_작가
79호 2015.11.05
아버지, 서러워 마시고 살아갑시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만들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갑시다. 마지막 금녀의 대사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양장 여인의 입에서 신파조로 울려 퍼졌습니다.

(재)국립극단 <토막>

아버지, 서러워 마시고 살아갑시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만들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갑시다. 마지막 금녀의 대사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양장 여인의 입에서 신파조로 울려 퍼졌습니다. 기침대신 웃음으로 껄껄대며,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응답은 잘 차려입은 신사에게서 읊조려졌고요. 원작 토막의 엔딩을 제일 첫 장면에 배치한 이 상황은 곧 ‘연출’임이 판명됩니다. 닭이 울면 부르주아적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실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토막>의 1933년 초연관객들은 막이 내리자 이렇게 외치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떠할까요. 극 중에서 가장 눈에 밟혔던 모습은 가난한 ‘젊은이’들의 모습이었고, 그다음엔 부르주아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생계에 쫓겨서 혹은 자신에게 도취되어 세상을 멀리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저 자신을 보는 듯 부끄러웠습니다. 리뷰를 하는 것은 반성문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지요. 토막의 많은 장면이 지금의 한국 상황을 그대로 증언해주는 듯했습니다.

동랑 유치진 선생이 식민조선의 토막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김철리 연출가는 헬조선의 흙수저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무대화합니다. 1920년대 토막에선 ‘아파도 희망을 갖자’고 하지만, 2010년대 쪽방에선 ‘아프면 병신’을 말하지요. ‘가난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메시지 외에도 이 작품은 ‘시대를 외면하는 예술은 부르주아의 고상한 취미일 뿐’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특별히 이번 리뷰에서는 <토막>의 인물과 배우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보고자 합니다. 국립극단의 배우들은 인물들을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제 스스로가 반성적 해석의 대상이 될 때, 그 역할에 어떻게 임했을지 궁금했습니다.

(재)국립극단 <토막>

연극이 시작되면 꼽추인 금녀의 모습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자신의 굽은 등을 거울로 비춰보면서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는 행동이 도드라집니다. 제대로 된 인간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이의 부질없는 욕망이 애틋하지요. 금녀는 극빈층 장애인에 저학력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헬조선의 끝판왕입니다. 일본에 보낸 오빠를 기다리며, 병든 아비의 수발을 들고 억척 엄마를 도와 토막의 살림을 맡고 있지요. 국립극단의 젊은 배우 황선화가 어려운 인물을 소화했습니다. 까까머리의 추한 몰골을 들킬 때, 오빠가 무기징역이라는 사실을 들을 때, 아버지가 혼절하여 쓰러질 때, 이를 악물며 참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집을 저당 잡히고 일본으로 ‘해외연수’를 떠나는 청년 삼조가 찾아옵니다. 일본에 가서 외국어만 배워오면 조선에서 뭐라도 되지 않겠느냐는 허세 가득한 청년입니다. 그는 조선의 병든 노인네와 말싸움을 벌이며 청년세대와 노인세대 간의 갈등을 유발합니다. “결혼이 다 뭐유”하는 장면에선 3포세대를 넘어 N포세대(포기가능한 모든 항목을 포기하는 세대)로 진입하는 우리네 젊은이 모습이 떠오르고요.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주연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백석광 배우가 그간 아껴두었던 재기발랄함을 선보였습니다.

당국에 의해 전 재산이 집행당하는데도 실실거리는 경선은 시종일관 우울한 연극에 그나마 웃음거리를 보탰습니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집 주위를 활보하는 경선과 허리를 뒤로 젖히고 뒤뚱거리며 쫓아오는 그의 처는 무대적 활기를 더해주었지요. 물론, 1막의 소동이 주는 희극성은 2막에서 도주로 인한 비극성을 한층 강화시켰습니다. <조치원 해문이>에서 악당 역할을 근사하게 해낸 김정호 배우가 비겁한 가장(家長) 역할로 등장했습니다. 능청스러움 뒤에 숨겨진 초라함이 관객으로 하여금 진한 페이소스를 자아내게 했지요. 토막을 다시 찾아온 그가 불어제끼는 하모니카 소리가 구슬프고 아름다웠습니다.

경선 처는 유일하게 이 연극에서 현대적 ‘연기’가 허용된 인물이었습니다. 옛 말씨에 조심스레 행동하는 인물들과는 다르게 박지아 배우는 마치 ‘지금, 여기’의 인물처럼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자신에게 처해진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강하게 항변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했지요. 감정이 쌓이면 토해냈고, 입에 걸리는 말들은 툭툭 뱉어냈습니다. <토막>의 중심인물들이 눈치를 보고, 주위를 살피고 조아리며 이야기할 때 오로지 경선 처만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언성을 높였지요. 굳세고 단단한 ‘민중’의 모습은 걸인이 되어 나타난 그녀의 형형한 눈빛에서 시작되었고, 돌에 머리를 찧으며 절규하는 모습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전체 연기 톤이나 앙상블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율하면서 동시에 나름의 현대성을 구축해낸 연출과 배우의 실력이 놀랍습니다.

한 번의 등장이지만 존재감을 뽐낸 것은 박완규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장’은 일본의 제국주의와 지배체제를 연상시키며, 명수의 죽음이라는 단서를 제공하는 기능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고압적이면서 동시에 허술함을 드러내는 구장으로 장면을 코믹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민중들의 삶에 대한 권력의 무관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지요. 허리를 숙여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 방안에 벌러덩 드러누워 눈높이를 맞추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해방’과 ‘훼방’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는 민중들을 조롱하면서, 제 스스로는 ‘해방’이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해 어떤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역설적으로 포착되었지요.

(재)국립극단 <토막>

이웃 여자 역할을 맡은 문경희 배우의 연기도 빛났습니다. 토막에서 고전적인 말투를 가장 자연스럽게 사용한 이는 바로 그녀였습니다. 얼굴을 찡그리며 어눌하게 자기 사정을 주절거리는 모습에서,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훔쳐갔을 자신의 닭을 하염없이 찾는 모습에서, 순박하고 몽매한 민중들의 모습이 엿보였습니다. 경선 처와 같이 표현하고 행동하는 민중도 있지만, 참아내고 침묵하는 민중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평범성을 인상적으로 표현해낸 이름없는 이웃여자의 연기도 일품이었습니다.

명서 처는 토막의 실질적인 가장일 뿐만 아니라, 명수의 죽음을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다소 미약한 극의 긴장감을 끊임없이 지탱해주는 인물입니다. 일본에 간 아들에게 돈과 꿈을 동시에 바라는,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모든 인물과 빚어내는 관계에 있어서 원작에서는 이중적인 행동으로 다소 밉살맞게 그려졌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궁핍한 상황에 맞춰 급급하게 마음을 바꾸는 모습으로 역할의 타당성을 더했습니다. 명서 처 역할에는 김정은 배우가 맡아 극의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아들의 유골을 얼굴과 가슴에 바르는 장면에선 관객들은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아버지 구실도 못하는 병든 몸의 명서는 김정환 배우가 역임했습니다. 편지를 붙잡고 몇날 며칠을 씨름하는 모습이나,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눕는 방향을 바꾸는 모습에선 식민지 조선의 답답함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사회 약자들의 감정을 대신하여 토로하지만 그 말은 더욱 공허하게 무대를 맴돌았고요. 집 안팎의 소동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직면한 현실조차 거부하려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명서가 읊는 다소 시적인 표현들이 어색하지 않도록 김정환 배우는 느릿느릿 어감을 곱씹어 발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닭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개인적으론 이 연극에서 불필요한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미끄러운 무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의 안쓰러운 모습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연기하는 닭이 아니라, 생명체인 닭으로 여겨지게 했거든요. 남한의 최고 존엄을 은유하고자 하는 연출가의 의도는 알겠으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를 극장이라는 비자연적 환경에 풀어놓는 것은 외려 작품이 이룩해놓은 성과를 깎아내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공연에서 부디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재)국립극단 <토막>

지금까지 조금 길게 <토막>의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불과 5년 전만 해도 한국의 연극계는 희망을 말하며, 내일을 기약하는 ‘정의신’ 류의 연극들이 꽤 있었습니다. 배우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감정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고, 이에 공감하는 관객들에게 연극의 힘을 전해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엔딩은 쉽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유 없는 낙관주의에 동의할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예술가와 관객들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토막>에 대한 국립극단의 해석은 타당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부르주아 예술의 대조를 통해 연극의 제 모습을 성찰하고, 끔찍한 현실을 무대적 환상으로 치장하지 않은 점이 돋보였지요. 지배체제가 ‘진실’ 로 둔갑시킨 ‘가짜’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장면은 현재의 시의성과 결부되어 큰 울림을 전해주었습니다. 국립(國立)의 의미가 요원해지는 이때에, 제 임무를 오해하지 않고 관객에게 온전히 도달한 배우들과 극단 측에 박수를 보냅니다. 80년전 <토막>은 2015년을 살고있는 - 금녀이면서, 양장여인인 - 수많은 ‘나' 들의 연극이 되었습니다.

[사진: (재)국립극단 제공]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