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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아어 <외계인들>

새해에는 우리도, 좋은 거 한 번 써봐요

이오진_극작가
83호 2016.01.07
미국의 북동부 버몬트 주의 한 카페 뒤편.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공터에, 서른 살 청년 KJ와 제스퍼가 언제나처럼 죽치고 앉아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때, 신참 아르바이트생 에반이 카페 뒷문을 열고 나와 더듬더듬 말을 건넨다.

극단 아어 <외계인들>

[줄거리]
미국의 북동부 버몬트 주의 한 카페 뒤편.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공터에, 서른 살 청년 KJ와 제스퍼가 언제나처럼 죽치고 앉아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때, 신참 아르바이트생 에반이 카페 뒷문을 열고 나와 더듬더듬 말을 건넨다.
"저기, 아저씨들, 여기 계시면 안 되거든요."
친구가 없는 열일곱 살 유대인 소년 에반은,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올 때마다 마주치는 형들이 엄청나게 신경 쓰인다. 기타를 치고 줄담배를 피우고 환각제를 차에 타 먹는 형들. 한 명은 소설을 쓴다고 하고, 또 한 명은 신경쇠약으로 대학을 그만뒀단다. 누가 봐도 찌질한 동네 루저들이지만, 그래도 먼저 말을 걸어주는 그들에게 에반은 자꾸만 마음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제스퍼가 보이지 않는다. KJ는 전에 없이 술에 취해 혼자 바닥에 엎어져 있다. 형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느낌이 안 좋다.

[때]
2015년 크리스마스 당일

[공간]
서부 서울역 근처의 고깃집

[등장인물]
윤성호 <외계인들> 연출. 극단 ‘아어’ 극작가 겸 연출가
황승욱 <외계인들> 무대감독. 극작가
이오진 웹진 [연극in] 리뷰어. 극작가
장우제 웹진 [연극in] 사진작가

극단 아어 <외계인들>

조명 들어온다.
성호, 승욱, 오진, 우제가 테이블에 앉아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있다.
말이 없다.
문득, 오진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책을 한 권 꺼낸다.

오진
저 이거, <외계인들> 희곡 있어요.
성호
영문 희곡이 있어요?
오진
네. 에니 베이커가 미국에서 핫한 극작가라고 해가지고 찾아 읽었어요, 몇 년 전에. 당시에 이거 읽으면서… 와, 이 언니 잘 쓰네. 어떻게 이렇게 잘 쓰지. 음. 막, 좀, 뭐랄까…
성호
자괴감 들었죠?
오진
예.
성호
(웃음) 저도 그랬어요.
오진
가끔 이런 희곡 읽으면, 제가 쓰는 건 애기가 길에다가 똥 싸놓은 거 같아요.
승욱
(정색하고) 말을 왜 그렇게 해요.
오진
알았어요. 혼내지 마요. (사이) 승욱씨는 <외계인들>의 어떤 점이 좋았어요?
승욱씨도 원래 희곡 쓰잖아요.
승욱
(잠시 생각하다가) 잘 쓴 희곡이니까. 희곡 작가들은 별 거 아닌 대사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다 있잖아요. 근데 별 거 아닌 대사를 그대로 쓰면, 그대로 망하니까. (웃음) 에니 베이커는 그 별 거 아닌 말들로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촘촘하게 쓴 게 대단하죠.
성호
외국 기사들보면, 에니 베이커의 작품을 일상의 조각, slice of life, 이라고 자주 묘사하곤 하더라고요. 하이퍼 리얼리즘 이라고 할까요.
오진
되게 리얼하고 일상적인데, 또 전체를 보면 작품의 극 구조가 뚜렷해요. 작품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젊은 극작가들이 이런 걸 좀 써줬으면 싶더라고요.
성호
애니 베이커가 서른다섯 밖에 안 되었대요. 81년 생.
우제
저랑 동갑이네요.
승욱
<외계인들>을 서른에 썼대요. 나 올해 서른인데.
오진
나도 서른인데.
성호
전 서른셋이에요.

사이. 다들 조금 울적해한다.

오진
연출님은 이제 좋은 거 쓰시면 되잖아요.
성호
그른 거 같아요. 서른에 이렇게 못 썼으니까. (웃음)
우제 작가님은 공연 어떠셨어요?
우제
정말 좋았습니다. 아름다웠어요. 아무 말하지 않는 "사이"들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올해 본 작품 중에 제일 좋았던 거 같아요.
성호
(좋고도 쑥스러워) 감사합니다.
오진
작가가 희곡에 "작품의 1/3은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인터미션은 몇 분이다” 이런 식으로 지정을 해놨더라고요.
성호
그런 걸 억지로 지키려고 하진 않았어요. 근데 하다 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사이" 만드는 게 참 어렵긴 해요. 근데 그걸 제대로 만들어야 이 작품을 제대로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고.
오진
연출님께서 일전에 인터뷰에서,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의미를 갖곤 한다”고 하신 걸 봤거든요. <외계인들> 공연 첫 장면에서 그 문장이 생각났어요. 제스퍼랑 KJ가 아무 말 없이 무대에 놓여 있잖아요. 그냥, 말 그대로, 가만히 있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성호
예전부터 연극에서 15초 이상의 “사이”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사실 배우들에게도 연출에게도 “사이”를 만드는 게 참 힘든 일이긴 한데.
오진
무섭죠. 연기하는 사람한테는 무대 위에 말 없는 5초가 5시간 같이 느껴지잖아요!
성호
그쵸. 보통은 공연 하면서 러닝타임이 조금씩 짧아지는데. 우리 공연은 공연을 하면 할수록 러닝타임이 늘어나고 있어요. "사이"가 길어지고 있는데, 저는 지금처럼 가는 게 맞게 가는 거 같아요.
오진
번역이 참 잘 되었다고 느꼈어요.
성호
여러 번 공연 하면서 조금씩 다듬어져 왔죠. 2011년에 프린지에서 낭독을 하고, 올해(2015) 여름에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하고, 이후에 <미래야 솟아라>에 선정 되고. 그러다 이번에 소극장 판까지 오게 되었고요. 처음 낭독이랑은 대본이 많이 달라졌어요.
오진
캐스트는 늘 같았나요?
성호
아뇨, 매번 한 명씩 바뀌어서, 지금은 초연 멤버가 없어요.
오진
오늘 본 세 배우들의 케미가 되게 좋았어요. (제스퍼-박용우/ KJ-최순진/ 에반-안지환)
성호
지난 번 공연 때는 아르바이트생 에반의 캐릭터를 여자가 했었어요. 새별이라고, 극단 친구가 했어요.
오진
아, 진짜요? (희곡을 들춰보며) 그간 외국에서라도, 여자로 공연 된 적이 있나요?
성호
처음이었을 거예요.
오진
대사나 성별을 바꾸는 거에 대해서, 작가가 싫어하지는 않았나요. 인터미션 시간도 지정하는 언니신데….
성호
(웃음) 못 보셔서….

극단 아어 <외계인들>

오진
개인적으로 특정 국가와 세대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외국 작품이 우리나라 와서, 그대로 공연 되는 거에 거부감이 있어요. 그럼에도 <외계인들>은 그런 불편함 없이 작품이 자연스럽게 다가왔어요.
성호
<외계인들>은 확실히 미국색이 강한 작품이잖아요. 한국에서 공연하는 거니까.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은 대체를 해 왔어요. 이게 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진
사실 작품에 나오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 같은 거는, 분명 기념일은 기념일인데, 크리스마스랑은 다른 미국의 정서가 있잖아요. 한국 관객들이 그걸 캐치하기가 어렵죠. 또 KJ가 타 먹는 버섯차(환각성분이 있는 버섯으로 만든 차)나 유대인, 독일인 등 인종 비유 같은 것들이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졌어요.
성호
그쵸. 이렇게 저렇게 대체 해보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들도 많아요. 인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것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대사를 추가하고 음향도 넣어보고요. 예를 들어 독립 기념일 같은 건, “그게 얼마나 대단한 날이라고, 사람들이 다 몰려나오고…” 라는 대사를 추가하고, 폭죽이 터지는 음향 넣어 가지고 그 날의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했죠. 사실 그래도 공연 하면서 늘 아쉬움이 있어요. 생경한 부분들이 여전히 있죠.
오진
극작가로서, 음, 저한테는 어떤 강박이 있는데요,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는 쓰면 안 된다는 거요. 자료 조사하고 심증을 더해 쓰는 거 어딘가 거짓말 같고 막 그럴 때가 있어요. 연출님 지금 한예종 연극원 극작과에도 다니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연출님이 직접, 대한민국의 지금 우리 세대 이야기를 써보실 생각 없으세요?
성호
저는 제 본업은 작가라고 생각을 해요. 그 동안은 연출 모드라서 작가 모드로 돌아오지가 않아서 좀 힘들었는데, 이제 좀 열심히 써보려고요. 저도 오진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 얘기를 쓰고 싶은 욕망 있어요. 특히 이 작품 연출 하면서, 그 생각이 더 많이 든 거 같아요. 좋은 작품 연출하면 쓰고 싶은 생각이 더 들죠.

극단 아어 <외계인들>

오진
일전에 인터뷰에서 “‘연극’을 위한 ‘연극’이 아닌,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한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다”고 하셨죠. 이번 작품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성호
저는 언어라는 게 얼마나 허약한지에 관심이 많아요. 이 작품 속 인물들만 해도, 각자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거든요. 이들 셋도 이렇게 다른데, 또 외부랑은 얼마나 다르겠어요. 물론 언어에도 논리가 있죠. 하지만 관계가 언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기는 관계들이 있어요.
<외계인들>에서는 안과 밖의 개념이 되게 중요한 거 같아요. KJ나 제스퍼는 계속 공터에 머무르면서도, 여전히 밖을 갈망하잖아요. 쓰고 있는 소설로 성공하고 싶어하는 제스퍼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회성 부족한 소년 에반도 그렇고. KJ는 끊임없이 횡설수설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소년 에반에게 영향을 끼치요. 마지막 장면에서 KJ가 에반에게 말하잖아요. "너는 크게 될 놈이야." 저는 에반이 KJ의 그 말을 들으며 내면의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을 했어요.
오진
그 장면에서 KJ가 참 짠하더라고요. 누가 누구한테 크게 될 놈이라는 거야. 자기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면서… (사이) 미국인인 KJ와 제스퍼가 한국 청년들과 만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성호
음, KJ랑 제스퍼가 서른이고, 그리고 에반이 열일곱이잖아요. 30대와 10대, 그 사이 20대가 비어있죠. 왜 작가가 20대를 비워놨을까 생각해봤는데요. 20대 때만해도, '내 꿈은 이거야' 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여지가 좀 있는 거 같아요. 그런대 서른이 되면서 자기 한계도 보고,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이 정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겠구나, 하고 깨닫는 시간이 오잖아요. 그런 시간을 맞고 있는 관객들이 와서 이 공연을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오진
성호연출님은, 30대 초반을 조연출을 하면서 보내셨죠.
성호
예. 연극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배우나 작가를 해본 적도 없고 하니까.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조연출 밖에 없었어요. 3년 동안 휴일 없이 조연출을 했어요. 그러서다 보니 서른이 이미 지나있었고, 막 내가 나이가 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 와중에 틈틈이 쓰다 (전)진모 연출이랑 프로젝트 식으로 공연 하고, 그러다 극단 [아어] 배우들 만나고. 운이 좋은 거 같아요. <외계인들>도 만나고. 학교도 들어가고. 연출, 특히, 배우도 그렇지만 연출은 공연 기회 잡는 게 진짜 어렵잖아요. 지원금 시스템이 제한적이니.
오진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저는 그래서 연극이 극장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극장만큼 공연하기 안 좋은 공간도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실 관객들더러 '자 여기로 모여', 하고 좁고 어두운 곳에 모아놓고. 관객들 기대치를 높여놓고 시작하잖아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든 극장을 나오는 방식으로 연극이 살아남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외계인들> 같은 경우는 무대도 별로 필요 없고 하니까, 극장 아니라도 할 데가 많을 거 같아요.
성호
국립극단 소극장 판 앞에 잔디밭이랑 벤치도 있고 그러잖아요. 거기에서 <외계인들>을 해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진
전에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공연 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영상으로 봤었어요. 태풍 카트리나가 지나가고 폐허가 된 마을인데, 공연팀이 길거리에서 발전기 돌려가며 공연을 하는 거예요. 폐허가 되고 복구가 안 된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공연의 관객이었죠.
성호
아, 엄청났겠네요. 이건 유명한 얘기인데, 외국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교도소에서 공연한 적이 있대요. 반응이 열광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오진
삶의 터전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고도를 기다리며>가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 것처럼, 연극이 매 순간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외국의 선례들 말고, 분명히 한국적인 상황 내에서 나오는 방법이 있을 것이 있을 거 같거든요. 성미산 같은 지역 공동체 마을에서 하는 공연이나, 대학로를 벗어난 지역에 극장 공간을 짓는 방법 등도 참 좋지만, 또 다른 방법이나 창구들이 좀 다양했으면 좋겠어요.
성호
시민연극이나 이런 움직임들이 되게 좋은 거 같아요. 그렇게 저변이 넓혀지는 거에 따라 결국엔 많이 바뀌고 그러는 거니까.
오진
사실 글 쓰는 일은 되게 외로운 일이잖아요. 성호 연출님과 전진모 연출님처럼, 같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앞으로 뭐든 조금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열심히 하고 잘 하고 계시니까ㅡ 연출님도 앞으로 더 좋은 작품 하시겠죠.
성호
우리도 새해해는 에니 베이커처럼 좋은 거 한 편씩 써봐요.
오진
그래야죠, 좋은 거 써야죠. 성호 연출님 신작도 기대할게요.
우제
다음에는 윤성호 작/연출의 공연을 보고 인터뷰 하면 좋겠네요.
오진
(녹음기를 정지시키며) 인터뷰 여기까지 할게요. 오늘 인터뷰도 공연도 넘 좋았어요. 감사했습니다.
성호
아니에요, 공연 보러 와주셔서 고마워요.

오진, 녹음기를 끄고 일어난다.
오진과 우제, 주섬주섬 옷과 가방을 챙긴다. 성호와 승욱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사이.

우제
이렇게 가기는 조금 아쉽네요.
오진
좀 그렇죠.
승욱
오진 씨, 한 잔 더 하고 가세요. 좀 더 있다 가요.

사이.

오진
…그럼 좀만 더 앉았다 갈까요. (사이) 크리스마슨데.

극단 아어 <외계인들>

우제와 오진, 도로 자리에 앉는다.
다시 술 먹기 시작한다.
밤이 깊어간다.

암전

** 위 대화의 최소 1/3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 극단 아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