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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아트센터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

새로운 영웅인가, 단지 재미를 좇는 ‘지하실의 쓰레기들’인가

한현주_극작가
93호 2016.06.09
어나니머스 Anonymous. ‘익명’을 뜻하는 이름을 지어놓고도 그들은 굳이 가면을 상징으로 사용한다. 그것도 17세기 영국에서 가톨릭 탄압에 저항하며 의사당을 폭파시키려 했던 인물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그런데 마치 종교와 인연이라도 있듯이, 그들은 2008년 ‘사이언톨로지’를 반인권적인 종교로 규정하고 해킹하여 유명세를 탔다. 작년에는 ...

어나니머스 Anonymous.
‘익명’을 뜻하는 이름을 지어놓고도 그들은 굳이 가면을 상징으로 사용한다. 그것도 17세기 영국에서 가톨릭 탄압에 저항하며 의사당을 폭파시키려 했던 인물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그런데 마치 종교와 인연이라도 있듯이, 그들은 2008년 ‘사이언톨로지’를 반인권적인 종교로 규정하고 해킹하여 유명세를 탔다. 작년에는 파리 테러 이후 IS를 바이러스로 규정, 전면전을 선포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난 업적들을 상기하며 드디어 21세기형 의적이 움직인다고 열광했다. 일종의 팬덤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공격하여 개인 정보를 마구잡이로 유출하기도 했다. 왜? 그냥… 재미로! 사람들은 정색하며 새로운 양상의 범죄 조직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어나니머스의 선택과 우리의 판단 모두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어나니머스의 행적을 따라가는 연극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는 무대 세트부터 연기와 의상까지 모두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연극이 심각할 게 뭐 있어? 그런데 자꾸 심각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예상은 했지만 산만한 무대에 적응하느라, 그리고 전혀 관심이 없었던 해커들에 대해 꼰대처럼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허걱, 벌써 유저들의 비웃음이 들린다. 연극이 끝난 극장 안에도 그 소리는 여전했다. 인터넷 창을 닫듯 극장을 빠져나와 전성현 드라마터그와 박민우 배우를 만났다. 윤한솔 연출과 대학 연극반에서 선후배로 만나 지금까지 ‘극단 그린피그’에서 함께 작업해오고 있는 드라마터그, 그리고 중학교 시절 해커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는 배우다.

박민우 배우(좌)와 전성현 드라마터그(우)

원작에 영웅 서사를 입히다

한현주
일반적인 한 인물의 영웅 서사는 아니지만, 객석에 배치된 컴퓨터 화면에 뜨는 소제목을 통해서 전달되듯 모험담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성현
희곡에 일상적인 대화도 있지만 온라인상의 대화가 대부분이어서 작품 전체를 보는 틀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여러 가지 서사의 방식 중에서 영웅 서사가 잘 맞아 떨어지더군요. 작가 역시 그 단계를 따라가고 있는 게 읽혔구요. 일상 세계를 벗어나 모험을 떠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조력자와 적대자를 차례로 만나며 시험을 통과해가는 그런 과정 말입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문제는 연출의 선택이었어요.
박민우
리딩 단계에서 배우들이 좀 헤매고 있을 때, 이런 방식의 해석을 따라가다 보니 길이 좀 뚫리는 것 같았어요.
전성현
주제적 측면과도 연결될 수 있는데요. 궁극적으로는 이 집단을 영웅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한현주
영웅으로 변모해가는 우여곡절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보는 그런 영웅 서사는 아닌 거죠. 스스로가 영웅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하니까요. 좀 기이한 영웅 서사인 듯... 여튼 의상에서도 그 컨셉은 명확해 보여요.
박민우
룰즈섹(극 중 어나니머스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집단)의 의상들이 특히 그렇죠. 게다가 제가 맡은 케일라는 전직 군인인데 온라인에서는 소녀인 척 하기 때문에 의상이 많은 역할을 하죠.

극 중 이들의 첫 적대자인 ‘사이언톨로지’의 등장부터는 경쾌하게 서사가 잘 읽힌다. 하지만 극 초반 익명성을 지닌 다수의 인물들이 집단을 형성하기까지는 경쾌하기만 할 뿐, 상황을 따라가기가 버겁다. 우연히 ‘디시인사이드’에 들어갔다가 그들만의 언어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의 속도는 더 따라갈 수도 없어 황망하게 사이트를 빠져나왔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신경질적으로 인터넷 창을 닫듯, 벌떡 일어나 나가는 관객도 있었다. 극 초반은 관객에게도 모험은 모험이었다.

무대화를 위한 선택들

한현주
일단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앤 선택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죠.
전성현
연출이 영국 공연 영상을 봤는데, 온라인상의 대화들을 모두 익숙한 연극적 장면으로 풀어냈다고 하더군요. 윤한솔 연출은 그렇게 가기 싫어했죠. 영상이나 음악 활용은 그전 작업에서도 많이 해서 그런 것에 대한 고민보다는, 관객이 인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하고 싶어했어요.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거죠.
한현주
저들이 있는 곳이 인터넷 세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지 않게… 음… 근데 이 극장이 기둥의 제약을 가지고 있잖아요. 관객들의 시야 제한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배우들의 컴퓨터가 놓인 자리 뒤쪽에 앉은 관객들은 화면을 통해 접하는 이미지와 정보가 있는데, 컴퓨터 앞쪽에 앉은 관객은 집중된 무대에만 시선이 갔을 거 같아요.
전성현
배우들의 컴퓨터를 관객이 엿보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배우들의 책상 앞쪽에 앉은 관객들은 그걸 볼 수가 없죠. 그래서 끝까지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기둥 쪽에 모니터를 설치했어요.
한현주
제 옆의 모니터 힐끔거리느라, 기둥에 있는 건 못 봤네요. (웃음) 이제 연기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보죠.
전성현
무엇보다 말이 많은 희곡이라, 결국 연기로 수렴될 거라는 생각에 연기의 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현실 세계의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마치 성우가 외화 더빙할 때 같은 그런 연기톤으로 하고, 오히려 온라인에서 대화할 때는 속도는 빠르더라도 보통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의 톤으로 했던 거죠. 이렇게 역전시켜서 관객들이 인터넷 세계에 함께 속해 있는 느낌을 더 주려고 한 겁니다.
한현주
갈등을 그릴 때도 그런 연기톤이 읽히던데요.
박민우
룰즈섹끼리의 대화를 무대에서 보여줄 때, 그 진지함을 더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전성현
적의 존재가 있기는 있지만 눈앞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이렇게 보이지 않는 적과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해서 배우들이 서로 반응을 좀 과장해서 하는 연기 방식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가면과 소외

한현주
저는 해킹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요. 작업에 함께 한 분들 중에도 저같은 사람이 많았을 거 같아요. 질문이 좀 그렇긴 한데, 박민우 배우가 많이 도움을 주셨나요?
박민우
저 개인적으로는 대본에 적응이 좀 빨리 됐던 거 같아요. 벌써 십오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게 됐죠. 그때 인터넷에서 형들과의 대화는 아주 휘발성이 강했어요.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말들이었죠. 대본에도 그게 잘 드러나 있어서 다가가는 게 좀 쉬웠어요. 처음에는 오히려 팀원들한테 이런 기억들을 얘기하려고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조금씩 설명을 하게 됐는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전성현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한현주
사실 전 상상이 잘 안 돼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정보를 가지게 됐다는 게 그렇게 큰 쾌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박민우
어렸으니까, 그저 장난감을 가진 기분이었달까. 하나 가지고 나면 하나 더 가지고 싶은 그런 기분… 어떤 사이트를 두 달 반 걸려서 해킹한 적이 있었는데, 성공 하고 나면 무언가를 취했다는 쾌감이 크게 오더라구요. 근데 그건 잠시고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더 컸죠. (웃음) 어쨌든 룰즈섹과 같은 팀은 어디에나 있어어요. 실력이 차이가 나고 공격의 대상이 다를 뿐이죠.
한현주
근데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듯이 결국 이들에게도 가장 큰 두려움은 가면이 벗겨지는 거, 신상이 털리는 거잖아요.
전성현
익명성 안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거죠. 어쩔 수 없이 그들 현실 존재 자체는 기존 사회 질서 안에 포섭되어 있으니 권력과 자본은 그 속성을 이용해서 가면을 벗기려 들거나, 돈으로 유혹하는 거죠.
한현주
룰즈섹도 어마어마한 유혹을 받았을 텐데요.
전성현
네. 근데 실제로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해킹한 정보를 무료로 공개해버렸어요. 돈보다 재미가 우선이었던 거죠. 그리고 영웅심.

그러니, 강력하다. 이 시대에 돈을 이기는 것이라니. 그러니, 벗겨야 한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과 정의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가면’을 벗겨야 하는 것이다.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

한현주
영웅심… 작품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지하실의 쓰레기’가 아닌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전성현
제대로 된 영웅으로 박수 받고 싶고, 주목 받고 싶은 거죠. 그래서 해킹 대상을 정할 때도 일종의 관전 포인트를 잘 염두에 두는 겁니다. 어디를 털었을 때 대중이 더 흥분할지, 자기들에게 더 박수를 칠지.
한현주
그들이 또 하나 무서워하는 게 결국 소외더군요.
전성현
기존 질서의 문제를 짚고 철저하게 그걸 거부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라, 재미로 모인 집단이니까 이 안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박민우
제가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저는 저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아이디를 정체성 그 자체로 받아들였어요. 아, 이 사람은 이런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상상을 하는 거죠. 근데 그런 사람에게 배척당하거나 소외당하면 잠을 못 자요. 인정받고 싶어서. 왜 그런 말을 했지? 내가 뭘 잘못했지? 현실에서보다 더 강박적으로 생각하게 되죠. 실체가 없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공기 같이 여겨졌어요.

연극은 주요인물인 ‘토피어리’의 나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안녕 친구들, 인터넷에 온 걸 환영해. 인터넷은 지금까지 니들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봐왔어. 니들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들락거리고, 가십거리나 스캔들을 인터넷 깊숙한 곳까지 퍼 나르는 걸 봤지. 근데 알아둬야 할 건, 사이버공간의 주인은 언제까지나 우리들 어나니머스라는 거야. 인터넷의 주인이 니네가 좆나 사랑하는 정부나 군대, 재벌인 거 같냐? 인터넷은 트롤과 해커, 열정분자와 극단주의자들 거야. 니들은 절대 인터넷을 열 받게 못해. 반성하게도 못하고. 온 인류가 죽음으로 돌진한다 해도, 인터넷은 그냥 히죽거리고만 있을 걸? (중략)

이는 룰즈섹의 일원으로 실제로 재판을 받은 ‘토피어리’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압축한 것이란다. 나도 뭔가를 선택하기는 해야 할 거 같은 강박이 생긴다. 함께 히죽거리거나, ‘그건 아니지’라고 주장하거나, ‘잘 좀 해봐’ 라고 대충 얼버무리거나, 또… ‘그건 네가 말하는 정의고, 내가 말하는 정의는…’이라고 웅변하거나.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 두산아트센터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