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흐르는 배> & <킬링 타임>
그들이 너와 나 사이를 가르도록 놔두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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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지경이었다. 하루아침에 내려간 아침 기온에 기쁘면서도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지난여름의 눈물겨웠던 고군분투를 훌훌 털어버리라는 듯 하늘은 높고 파랬다. 눈부시게 청명한 백치의 얼굴을 한 채 전달될 전기요금 고지서 앞에서 또 한 번 부르르 떨겠지만... 열대야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나는 남편이 보고 있는 야구 중계를 흘낏거리다가 뜻밖에 노란 리본 하나를 발견했다. 포수의 가슴 보호대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참사 직후 추모의 뜻에서 모두가 리본을 달 때 프린팅했다가, 그냥 지우지 않고 놔둔 것일 뿐일까. 하지만 매일같이 장비를 차고 연습을 하고 경기에 나가는데 스스로 그 리본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검색을 해보니 그가 이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그의 행동에 대해 짜증을 내는 팬들은 꽤 있었다. 돈을 받고 뛰는 프로 선수가 왜 마운드에서 정치적 표현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 언제부턴가 노란 리본은 정치적 표현이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 프레임에 갇힌 결과일까, 아니면 지금의 상황에서 결국 답은 정치적 해결이므로 당연한 것일까. 이런 질문이 가 닿은 곳은 그 여름의 혜화동1번지였다. 극장의 에어컨은 노오란 심장들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고, 주최측이 나누어준 아이스팩조차 노오란 죄책감으로 금세 미지근해졌다. ‘세월호 이후의 연극, 그리고 극장’이라는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단순히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데서 나아가, 연극과 극장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나누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어서 관객의 기대도 컸다. 그래서 때로는 분노와 선언으로 뜨겁기만 한 무대에 다소 실망하는 관객도 있었고, 묵직한 질문들이 펼쳐지는 무대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기는 관객도 있었다. 2년째인 기획 공연이므로, 창작자들은 공연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부담뿐만 아니라 기획과정에서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그 여름을 더듬어보기 위해 <시간을 흐르는 배>의 이래은 연출과 <킬링 타임>의 구자혜 연출을 만났다. 더불어 기획 공연에 함께한 이오진 작가도 말과 생각을 보태었다.
이래은 연출(좌)과 구자혜 연출(우)
작년과는 어떻게 달랐나
- 한현주
- 구자혜 연출님은 작년에 이어 이 기획을 이끌었는데, 방향 설정에서 달랐던 점이 있나요?
- 구자혜
- 공연을 넘어 극장을 열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유가족 분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만났고 그 때문인지 416연대 측에서 간담회 요청을 먼저 해오셨어요. 휴가철이고 올림픽도 있는 8월이지만, 그래서 더 잊지 않기 위한 공연이라는 점에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셨죠. 또, 강연도 준비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려고 시도했습니다.
- 한현주
- 공연의 방향성에 대해서는요?
- 구자혜
- 관점의 부분은 창작의 몫으로 남겨두었어요. 작년에는 애도에 초점을 두었다면 올해는 기억하기를 넘어선... 뭐랄까... 굳이 말하자면 연대의 지점을 모색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직접적인 발언도 많았고요. 무엇보다 홍보가 가장 달랐죠. (웃음) 혜화역 4번 출구에 한 달 동안 전광판 광고를 했는데,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돈도 없거니와 혜화동1번지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 이오진
- 그 전광판은 충격이자 감동이었어요.
- 구자혜
-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여전히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연극이 있다는 걸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고, 그래서인지 인터넷 예매 사이트를 통한 예매도 많이 늘었어요.
- 한현주
-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달랐을 것 같아요. 특히 올해에는 가해자의 증언들을 무대로 옮겨왔는데요.
- 구자혜
- 작년에는 진은영 시인이 예은이의 이야기를 담아 쓴 시를 공연 중에 배우가 읽기로 했는데, 연습 중에 도저히 안 돼서 수화로 바꿨어요. 그래도 배우도 울고 관객도 울었죠. 사실 올해는 제가 희곡을 써놓은 게 있었는데, 배우들이 같이 공부하면서 같이 만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희곡을 접어두고 새로 접근했어요. 우선은 ‘애도’와 ‘정의’라는 틀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가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다고 해서 그들을 무대에서 심판하려는 것은 아니었구요.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정확하게는 그들의 말들을 무대에 나른다는 게 목표였죠. 증언 자료를 보면, 각 조직별로 서로 다른 증인이 말하고 있음에도 거의 말의 패턴이 같았고 쓰는 어휘도 비슷했죠. 또, 증인으로 선 가해자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급격하게 피로해져요. 늙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죠. 그런데 그 와중에도 고급스러운 어휘들을 습득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말이 유려해지는 경우도 있었어요. 어쨌든 저는 그들의 피로도를 무대에 그려보고 싶었어요.
- 한현주
- 관객도 일정 부분 피로를 느낀 것 같아요. (웃음)
- 이래은
- 일부러 형광등을 쓰신 거죠?
- 구자혜
- 일루전이 생기는 게 작품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 이래은
- 형광등 조명이 강해서 가해자를 똑바로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고개를 숙이게 되더라구요. 그러니 반복되는 말들이 더 예민하게 느껴졌어요.
- 이오진
- 이제는 제 자신이 나름 분노로부터 객관화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어요. 똑같은 말들의 변주를 듣다 보니... 아... 배우들을 미워하게 될까봐 얼굴을 못 보겠더라구요. 배우들의 움직임과 동선도 좋은데, 그 말 앞에서 다시 감정이 치솟는 저를 보면서 아직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 한현주
- 형식적 차원에서 지난 번 리뷰 작품이었던 <이반검열>이나 ‘극단 코끼리만보’의 <말들의 무덤> 같은 작품들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는데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 구술과 증언의 재연, 혹은 재현의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연구될 수도 있겠다는...

공포의 10시, 그리고 만들기
- 한현주
- 기획 단계에서 연출가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 구자혜
- 2월부터 4월까지 격주로 만났어요. 밤 10시에 초췌한 얼굴로. 기획의도를 써와서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공포의 밤이었죠. 작년에는 ‘내가 해도 되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올해는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연출로서의 접근 방식... 어려웠어요. 회의 끝나고 술 한 잔 마실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 한현주
- 이번 작품들 중에 드라마는 이오진 작가와 정진세 작가의 작품이잖아요. 사실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죠.
- 이오진
- 저는 이경성 연출의 <그녀를 말해요>를 보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언가를 고민하게 됐어요. 저는 이야기의 힘을 믿었던 것 같아요.
- 구자혜
- 정진세 작가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방법인 이야기로 풀어내겠다고. 그게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알지만 그렇게 해보겠다고... 참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작품이 다큐멘터리 연극의 형태로 제작되는 상황에서 큰 용기라고 생각해요.
- 이래은
- 실제로 <오십팔키로>를 통해 이야기의 힘을 느꼈어요.
- 한현주
- 그 모임에 강의로 도움을 주신 분들도 있다구요.
- 구자혜
- 작년에는 소설가 한강 선생님이 저희의 요청에 기꺼이 와주셨는데요.『소년이 온다 』를 쓸 당시의 경험을 들려주셔서 창작자들한테 큰 도움이 됐어요. 올해도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분들께 손을 뻗었어요.
- 이래은
- 저는 박주민 변호사님의 강의가 큰 도움이 됐어요. 그 분이 구체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나열해주신 사실과 법의 적용 등을 통해서 ‘사실’이 주는 힘을 느꼈죠.
- 한현주
- 그래서 ‘강의 연극’이 나온 건가요?
- 이래은
- 저는 연출 텍스트를 쓰긴 하지만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장나오씨(신경심리학자이자 배우)와 꾸준히 작업하면서 과학적 지식이 주는 힘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요. 그게 세월호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했죠. 제가 이야기에 회의적인 때였어요. 연극성에 대한 질문을 해보려고 수없이 장면을 넣었다 뺐다 했죠. 그때 누가 조언하더라구요. 연극성을 빼려고 할 때 오히려 연극에 대한 질문이 생기지 않을까, 라고.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무엇보다 거리두기가 필요했어요. 내 얘기로 시작해서 다른 얘기가 되는 과정이 되길 바랐지만 쉽지가 않았죠. 그래서 아예 밖에서(과학적 지식에서부터) 시작해보려고 시도한 겁니다.

세월호 이후의 연극
- 한현주
- 부제를 통해서 제시된 바가 작품에 다양하게 반영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정진세 작가의 작품도 궁극적으로는 연극의 역할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김재엽 연출의 작품도 배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문하는 부분은 그러한 지점과 맞닿아 있어요.
- 구자혜
- 이번에 단원고를 방문했을 때 한 유가족 분이 그런 말을 하시더군요. 당신들은 ‘세월호 세대’이지 않느냐... 그 명명을 통해서 극장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게 되더군요. 궁극적으로는 광장으로서의 극장에 대한 강박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해요. 음... 작년 공연을 마칠 때 한 관객이 그러더군요. 의의는 좋지만 예술적 성과가 부족하지 않았느냐고. 사실 저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올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가 고민해야죠. 관객도 많지 않고 연극의 파장이 크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연극이 감히 해낼 수 있는 것을 묻는다면, 극장을 다시 사유하는 자리로 만드는 겁니다. 결국 얼마나 성찰하느냐가 중요한 거니까요. 사유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올해는 강연에도 공을 많이 들였어요. 강연팀을 따로 꾸렸죠. 특히 이경미 선생님의 강연이 기억에 남는데요. 평론가와 창작자로서의 관계를 넘어, 연극의 역할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되었죠.
마지막 공연을 하루 앞둔 날, 간담회가 열렸다. 생존학생의 아버지이면서, 가족협의회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이 참석했다. 그는 대학생이 된 아이들 중 이미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여럿이라고 했다. 이제 이 사회는 생존학생들에게 단원고 출신임을 숨기고 살도록 억압하고 있다. 구자혜 연출은 간담회를 이끌어준 분과 식사를 하고 인터뷰에 함께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9월 말이면 끝나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연장을 위해 그분은 단식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미 바람은 선선해졌다.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